방학

1.
며칠 전, 무려 물보라 땡스 파티에 가서 기말보고서의 개요와 목차를 잡았다. -_-;; 멋진 행사를 신나게 구경하는 짬짬이 목차와 개요를 짤 수 있었던 건,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른 덕분. 더 좋았던 건 수업을 담당하는 교수의 성향에 맞춰 나름 사회학적인 형식을 갖췄다는 거. 이미 인문학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게 찍힌 상황이라 나름 사회학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러며 그날 저녁, 지렁이 회의를 끝내고, 사회학적 글쓰기에 어느 정도 훈련이 된 사람에게 사회학 논문 쓰기가 어떤 거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하하. 형식은 둘째 치고 보고서 주제를 전개하는 자체가 이미 사회학 논문과는 거리가 있어도 한참 있다는 걸 깨달았다. ㅠ_ㅠ 형식도 사회학 논문이 요구하는 것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고. 물론 여성학과에선 무방한 형식이지만, 이른바 사회학 논문의 전형이라고 불리는 형식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리하여, 그냥 멋대로 쓰기로 했다. 냐하하.

2
최초 주제는 지금과 달랐다. 언젠가 [Run To 루인]에 쓴 것 같기도 한데, 최초의 고민은 “이성애-젠더이분법이 완고한 가족에서 트랜스젠더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협상하는가?” 였다. 4학기를 다니는 동안, 기말보고서의 주제는 언제나 트랜스젠더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수업의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를 썼으니, 이번에도 트랜스젠더라는 키워드는 바뀌지 않았다. 이번 수업이 가족과 관련한 수업이니 기말보고서 주제도 이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짠 것. 그리고 고민은, 가족관계에서 경험하는 완고한 젠더이분법을 트랜스젠더들은 어떻게 협상하는가, 였다. 그러며 두 명과 인터뷰를 했다. 얼추 두 달의 시간 간격을 두고 인터뷰를 했고, 인터뷰를 하는 와중 다른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두 번째 인터뷰를 한 후, 결국 기말논문 주제를 바꿔야 함을 깨달았다.

최초의 주제, “이성애-젠더이분법이 완고한 가족에서 트랜스젠더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협상하는가?”에서, 나는 묻지 않고 당연시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었다. 가족은 정말로 이성애-젠더이분법으로 완고하게 이루어져 있는가? 행여 그렇다고 해도 가족관계에서 어떤 균열도 없을까? 법과 제도를 통해 가족은 이성애-젠더이분법이 완고한 공간이라고 얘기하지만, 정말 완고한지, 혹은 완고하다는 믿음을 통해 다른 어떤 가능성도 상상하지 못 하게 하는 건 아닌지.

일테면 “여성”이지만 가족들은 “아들”로 부르며 “남성”의 역할을 요구해서 “남성”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거나, “딸”이지만 “상주”와 “장남” 역할을 수행할 때, 그리고 가족관계에서 이런 상황이 상당히 빈번할 때, 과연 “가족은 언제나 이미 이성애-젠더이분법으로 결정되었다”고 성급하게 결론내릴 수 있을까? 가족관계는 당연히 이성애-젠더이분법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기에 이런 경험들을 배제하고 있는 건 아닐까?

기말보고서는 바로 이런 고민에서 출발했기에 내용을 새롭게 구성해야 했다. 그래서 제목은 “가족은 언제나 이미 이성애-젠더이분법으로 결정되었나?” 이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제목이라고 느낄 분도 있을 텐데, 맞다. 버틀러의 “Is Kinship Always Already Heterosexual?”(가족은 언제나 이미 이성애적인가?)란 논문의 제목을 살짝 바꾼 것이다. 흐흐. ;;;

3
보고서를 쓰는 동안 최대 위기는 시간이 부족했다거나 내 무식함으로 보고서를 쓰기가 어려웠다가 아니다. 최대 위기는, 다름 아니라 뜬금없이 플래시 게임에 빠져든 것. ;;; 일테면 [페르시아 왕자]라는 전설적인 게임도 플래시로 발견했고, 유명하진 않지만 은근히 중독이고 감질맛 나는 그런 게임에 빠져선, 보고서는 안 쓰고 하염없이 게임만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이란! (엉?) 그래서 보고서를 제출하고 수업도 종강한 조금 전, 또 다시 게임을 했는데, 확실히 보고서를 쓸 때만큼의 재미는 없다. -_-;;;

4
어제 밤, 늦게 玄牝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보고서를 제출하면 논문을 찾아 읽고 싶다는 욕망이 넘치기 시작했다. 아, 이 황당함이란! 알바도 해야 하고 연말까진 논문은 안 읽기로 했는데, 갑자기 논문이 마구마구 읽고 싶어졌다. 스스로를 비웃었다. ‘수업이 끝나니까 공부가 하고 싶더냐?’ 라면서. 읽고 싶은 논문은 수업자료가 아니지만, 뭔가 웃겼다.

더 황당한 건, 며칠 동안 잠을 설치며 지냈는데,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보고서만 제출하면 늦잠도 자고 실컷 쉴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잠에서 일어났을 때, 이미 이런 생활에 몸이 익어, 눈이 따가울 정도로 피곤해도 잠은 안 온다는 거. ㅠ_ㅠ

이런 내가 정말 싫다. ㅠ_ㅠ

5
누가 뭐라고 해도, 연말까지는 알바와 소설책, 만화책만 읽을 거다. 영화도 실컷 읽을 거라고! 꼭!
(과연?)

8 thoughts on “방학

  1. 땡스파티에서 계속 혼자 계셨다고 해서 마음 쓰였는데.. 다행이군요. 글 구상에 도움이 되었다니. ^^

    1. 앗, 그랬네요.
      저는 혼자 앉아 있는 게 편해서 일부러 혼자 있었는데, 신경 쓰였다니, 오히려 미안해요. 🙂
      아참, 그리고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목차와 개요 구상은 결단코 쉬는 시간에 짬짬이 한 거예요. 본문에 쓴 글을 다시 읽으며 공연은 안 보고 개요만 짠 것 처럼 읽혀서요. 흐흐. ^^;;;

  2. 조금도 그렇게 오해하거나 상상하지도 않았어요. 짬짬이 하신 거라고 처음부터 생각했어요. ^^

  3. 가장 공부하고 싶을 때가 시험이 끝날 때가 아닐지..-ㅂ-ㅋㅋ

    그나저나, 정신과 달리 몸이 ‘선천적’ 부지런함을 타고나신듯..-ㅂ-;;

    1. 푸핫. 깔깔깔.
      정말 그래요. 가장 공부하고 싶을 때는, 시험이 끝날 때 즈음이에요. 흐흐흐.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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