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우트

[다우트] 2009.02.21. 토. 14:14 아트하우스모모. B4층 1관 F-3

※토요일의 교훈
토요일엔 영화관에 가지 말 것: 평일이면 사람이 별로 없을 영화에도 사람이 너무 많음.
몸이 피곤한 날 영화관에 잇달아 가지 말 것: 두 번째 영화에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짐.

01
게일 러빈(Gayle Rubin)은 1984년에 “섹스를 생각하기Thinking Sex”란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을 독해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그중 하나는 이성애-젠더 이분법에 적절하지 않은 방식으로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실천하는 이들이 제도를 통해 어떻게 가시화(혹은 위계화) 되는지를 기술하는 역사서로 읽는 것이다. 러빈의 지적에 따르면, 미국은 1950년대 이후(특히나) 동성애자를 비롯한 규범적인 이성애가 아닌 성적 실천을 하는 이들, 트랜스젠더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일례를 들면,

1955년, 아이다호에 있는 보아이즈에서, 학교 선생은 조간신문을 읽으며 아침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았다. 그는 아이다호 제 1 국립 은행의 부총장이 소도미의 중죄로 체포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지역 검찰관은 지역에서 모든 동성애를 소탕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결코 아침식사를 끝낼 수 없었다. “그는 의자에서 뛰어 올랐고, 그의 슈트케이스를 꺼냈고, 할 수 있는 한 빨리 짐을 꾸려선 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학교 직원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고 왔을 땐, 차가운 달걀, 커피, 그리고 토스트가 그의 식탁에 남아있었다.”
(Rubin 1993, 쪽수는 기억이 안 남-예전에 발제한다고 날림 번역한 것의 일부를 사용한 것)

이런 식이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에서 체포될 수 있는 시대. 러빈이 인용한 어떤 사례엔 다음의 얘기도 있다: 한 겨울 동성애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목욕탕에 경찰들이 급습하였다, 경찰들은 목욕탕에 있던 이들이 수건으로 몸을 간신히 가린 상태로 모두 거리로 몰아냈다고 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동성애, 더 정확하게는 이성애-젠더 이분법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행동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태어났을 때 남성(여성)으로 지정받았지만 자신을 남성(여성)으로 인식하지 않아 여성(남성)의 복장을 입는 이들, 동성애자들, 양성애자들, “소아성애”로 싸잡아 비난받는 세대 간의 사랑 실천자들 등등 규범적인 성도덕을 실천하지 않는 이들은 경찰이 그 자리에서 체포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의심’ 받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의심만으로도 경찰에 잡혀갈 수 있었다.

더욱이 1940년대 후반 이후, 맥카시의 광풍으로 공산당이라는 의심만으로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분위기가 남아있는 1960년대에 의심은 그 자체로 위협이자 공포다. 특히나 동성애와 같이 증명도 반증도 어려운 일들로 ‘의심’받는다는 건 곧 그것으로 결정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의심’은 상대를, 그리하여 나 자신을 규제하는 장치다. 한국에서, 소위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정치인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의심만으로 경찰에게 끌려가선 고문당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박정희 시절엔 술자리에서 고위층의 비리에 불만을 표했다는 것만으로 잡혀갔었다. 그러니 의심은 가장 무서우면서도 효율적인 정치제도이자 규제 장치다.

#영화 줄거리를 쓰는 과정에서 스포일러일 수 있는 내용들이 포함되었습니다. 후훗.
02
영화 [다우트 Doubt]는 주인공들 중 한 명인 플린 신부의 연설(?, 설교는 아닌데, 그 뭐라고 하죠? -_-;;)로 시작한다. 그 내용은 의심에 관한 것으로, “의심은 확신만큼이나 확고하고 지속적이다”고 끝맺는다(정확하진 않지만 거의 비슷하게 인용;;). 의심은 확신만큼이나 확고하고 지속적이라는 말, 이 말이 이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 영화는 케네디가 죽은 다음 해인 1964년, 성 니콜라스 교구 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사건은 간단하다.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분)와 학생 도널드 사이의 알 수 없는 어떤 일을 알로이사(메릴 스트립 분) 교장 수녀와 제임스(에이미 아담스 분) 수녀가 의심하는 것, 의심하는 행위가 유발하는 일련의 연쇄반응들이 이 영화의 표면적인 사건이다. 알로이사 교장수녀는 플린 신부가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 도널드(인종범주로서 흑인, 이 영화에서 인종은 상당히 중요한 변수다)와의 일을 계속해서 의심하고, 결국 의심을 확신한다. 이제 알로이사 교장수녀는 학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플린 신부를 학교에서 쫓아내려 하고, 결국 플린 신부는 학교에서 나간다. 물론 종교계에서까지 떠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좋은 자리로 옮긴다. 재단은 무슨 이유로 플린이 성 니콜라스 교구 학교를 떠나는지 알지만 플린 신부를 승진시킨다.

알로이사 교장수녀가 최초로 의심한 사건은, 플린 신부는 세대 간의 사랑 실천자이자 게이로 도널드를 강제 추행했다는 것. 제임스 수녀가 수업을 하고 있는 중간에 플린이 도널드를 부르는데, 플린에게 갔다 온 후 도널드는 얼굴 표정이 안 좋았고, 술 냄새가 났다. 제임스 수녀는 교장수녀에게 이 사건을 상담한다. 교장수녀는 게이 신부가 나이와 지위, 인종이란 여러 권력을 통해 도널드에게 성폭력을 가했다고 믿는다. 교장수녀는 결국 도널드의 엄마, 밀러(비올라 데이비스 분)를 불러 사건을 넌지시 설명한다. 하지만 밀러는 관련 얘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건도 드러나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길 바란다. 알로이사 교장수녀가 밀러의 모성을 의심하자, 밀러는 도널드가 게이라고 밝히며 도널드가 성 니콜라스 교구 학교로 전학해야 했던 이유가 흑인인 동시에 게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며 밀러는 알로이사에게 조용히 지나가줄 것을 요청한다. 성 니콜라스 교구 학교를 졸업해야 좋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교장수녀는 도널드가 게이라는 사실을 통해, 플린 역시 게이임이 확실하다고 믿으며 기어이 플린을 학교에서 쫓아낸다. 그리고 플린은 떠난다. 이제 교장수녀는 기뻐하는가? 영화의 가장 마지막 장면은, 알로이사 교장수녀가 제임스 수녀에게 자신의 행동이 의심스럽다고 말하며 우는 모습이다. 확신에 차서 플린 신부를 쫓아냈지만, 그 확신이 의심스러워지는 찰나. 의심의 다중주.

누군가를 의심하고, 의심이 확신으로 용어가 바뀌는 경험을 하고, 확신으로 실천했던 일을 다시 의심하는 의심의 다중주. 사실 의심과 확신은 어감상의 차이는 있어도 내용상의 차이는 별로 없다. 영화 서두에서 플린 신부가 말했듯, 의심은 확신만큼이나 확고하고 지속적이며, 어떤 의심은 그 자체로 이미 확신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의심한다는 것은, 의심하는 내용을 100% 수준은 아니어도 확신한다는 뜻이다. 긍정적인 의미라 할 수 있은 어떤 확신 역시 100% 순도라고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의심하는 내용을 확신하는 것과 농도가 비슷하다.

영화 중간에 제임스 수녀는 미국의 역사를 가르치는 와중에 루즈벨트의 유명한 말,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이다”를 학생들에게 들려준다. 이 말이 지닌 문장구조는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의심과 확신을 이해하는 키워드에 해당한다. 의심을 의심하는, 의심을 의심(확신)하는, 의심(확신)을 의심하는, 결국 확신을 재차 확신하고자 욕망하는 긴 과정 속에서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확신하는 것일까? 확신한다고, 확고하게 믿는다고 믿는 순간 의심이 꿈틀거리며 몸을 감쌀 때, 이렇게 몸을 감싸는 의심이 다시 한 번 확신으로 변할 때, 무엇이 의심이며 무엇이 ‘진실’인지 구분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끊임없는 번복과 의심의 순환 구조 속에서 긴장하고 갈등할 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 영화의 결말부분은 매력적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계기인 플린 신부와 도널드 사이의 어떤 일이 무엇인지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정황들은 있지만 드러나는 건 정황들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명확하게 발생한 사건은 ‘의심’ 뿐이다. 의심이 어떻게 확신으로, 의심이 어떻게 사건으로 바뀌는지만 드러날 뿐이다.

03
의심의 정치학을 복잡하게 다루는 이 영화는, 또한 소위 남성들 간의 연대가 얼마나 돈독한지를 드러내는 정치서사이기도 하다. 남성들 간의 연대 혹은 신부라는 지위와 수녀라는 지위 차이는 이 영화 곳곳에서 드러낸다. 그것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 중 하나는 식사 장면. 세 명의 신부들은 고기를 썰고 뚱뚱한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을 농담이랍시고 웃으며 나누며 식사를 한다. 여덟 명의 수녀들은 간단한 음식과 우유를 마시며 조용하고 조촐하게 식사를 한다. 이 장면은, 만약 플린 신부가 도널드에게 정말로 성폭력을 행사했다 해도, 1960년대 동성애자란 의심만으로 불심검문과 구속이 가능한 시대에 플린 신부가 게이였다 해도, 남성간의 연대, 신부간의 연대, 종교의 성스러움을 유지하기 위한 종교재단의 욕망이 플린 신부를 보호해준다는 걸 암시한다.
(+만약 종교 재단이 플린 신부가 게이란 걸 인정하고 재단에서 추방한다면, 이는 신부 중에도 게이가 있다는 것, 게이여도 신부가 될 수 있다는 것, 게이 역시 신의 선택을 받을 수 있고 대중을 인도하는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걸 자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동성애를 혐오하고 신의 뜻에 위배되는 행동이라고 비난하던 1960년대 당시, 종교 재단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플린 신부의 ‘의심스럽지만 확증할 수 없는’ 행동을 묵과하며 승진시키는 길 뿐이다. 재단이 플린 신부를 추방하지 않고 승진시키는 것으로 플린 신부에게 가해진 모든 의심을 일축할 수 있는 동시에 종교재단에 게이 혹은 동성애자는 없다는 것을 공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플린 신부가 게이인지 아닌지, 플린 신부와 도널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밝혀지는 건 아니다.)

영화는 극히 단순하게 플린 신부를 진보적이고 종교를 가족처럼 편안한 공간으로 만들려는 인물로 그리고, 알로이사 교장수녀를 학교(기존의 제도 혹은 지배체제)를 지키고 규율을 지키기 위해 통제와 공포를 적절히 사용하는 인물로 그린다. 하지만 영화의 흐름 속에서 지배체제에 의해 보호받는 인물은 변화를 주창하는 플린 신부다. 체제 유지를 위해 애쓰는 알로이사 수녀는 자신의 확신을 의심해야 하는 처지에 빠질 뿐이다.

지배 권력을 획득하지 못 한 인물은 자신의 의심-확신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위치에 처하며, 지배구조를 의심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의심해야 한다. 그러니 의심을 의심해야 하는 인물은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획득하지 못 한 이들이며, 자신을 설명할 언어가 부인당하는 경험을 한 이들이다.

04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말을 토해내고 싶지만 결코 말하기 쉽지 않은 부분은 인종 논쟁.

밀러 부인과 알로이사 교장수녀가 만난 자리에서, 밀러 부인은 도널드가 복사 일을 못 하게 되자 아버지에게 얻어맞았다는 얘길 전한다. 처음엔 복사 일을 못 하게 된 것, 즉 도널드가 무언가를 잘못 해서 구타당한 걸로 알로이사는 이해한다. 하지만 밀러 부인은, 복사 일을 못 하게 된 잘못 때문이 아니라, 도널드가 게이여서 그렇다고 정정해준다.

나는 이 장면이, 나의 과도한 방어기재라 해도, 흑인들이 동성애혐오가 더 심하다는 편견을 강화시키는 장면으로 읽힐까봐, 혼자 괜히 염려했다. 흑인사회에 동성애 혐오가 더 심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한 사회에서 소위 소수집단이라고 불리는 집단의 사건은 언제나 과장되기 마련이다. 일테면 한국인의 절도는 그냥 한 개인의 사건이지만, 한국에 이주한 필리핀 사람의 절도는 필리핀 사람들 전체의 속성으로 이해되듯. 그러니 도널드를 이해한다고 여겨지는 유일한 인물이 플린 신부란 점은, 흑인은 아니어도 백인은 상대가 게이여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한 인상을 줄 뿐만 아니라,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적인 맥락에서 백인들 간의 동성애혐오 폭력을 은폐하는 기묘한 효과를 낳는다. 물론 이건 나의 과도한 독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미묘하다. 못내 찜찜하다.
(+밀러 부인과 알로이사 교장수녀의 대화중에, 알로이사 교장수녀가 당시의 인종차별이란 맥락을 전혀 무시하는 듯 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05
으악. 쓰다 보니 글이 길어졌다. -_-;; 그만큼 할 말이 너무 많은 영화란 의미겠지. 지금 어딜 가야 하는 관계로 이쯤에서 중단. 흐흐.

곧 쓸 또 다른 영화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일단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읽고 나서 같이 쓸 예정. 영화관에서 나오며 원작이 너무 궁금했거든.

4 thoughts on “[영화] 다우트

  1.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영화 자주 보네요 ㅋ 루인의 영화평은 언제나 재밌어요. 저에게도 영화 감상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ㅋ
    저에게 영화는 보고 있기는 해도 글로 풀어내기가 쉽지 않은 장르거든요.

    1. 씨네큐브는 나름 멀어서 잘 안 가는데, 아트하우스 모모는 가까운 거리라, 종종 가게 되더라고요. 흐흐흐.
      당고의 영화평은 어떨지 궁금하네요. 근데 독서평을 많이 쓰고 있잖아요. 🙂

  2. 저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봤어요.
    케이트블란쳇이 춤추는 것이 참 아름답다고 느꼈답니다. +ㅅ+
    저도 원작이 궁금한데..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흐흐

    1. 와아아. 저도 그 장면들 너무 멋졌어요. +ㅅ+
      무대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랑, 학생들에게 발레를 가르칠 때의 모습이 참 매력적이었어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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