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2009.02.21. 16:40. 아트레온 1관 지하3층 V-14.
스콧 피츠제럴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김선형 옮김. 서울: 문학동네, 2009

00
지난 토요일 오전, 자꾸만 영화관에 가고 싶었다. 딱히 끌리는 영화가 있었던 건 아니다. 물론 [다우트]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영화관에 가리라고 체크한 영화이긴 하지만. 🙂 하지만 영화관에 가고 싶게 하는 영화가 있다는 것과 영화관에 가고 싶다는 것은 다른 욕망. 영화관에 가고 싶은 날, 영화관에 가고 싶게 하는 영화가 있는 게 최상의 궁합. 하지만 그날 난 몸이 피곤했고, [다우트]를 보고 나왔을 땐 조금 지쳐있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나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위해 아트레온으로 향했다.

그리고 벌써 며칠이 지났다. 영화 감상문은 영화관에서 나온 당일 혹은 그 다음날 쓰는 게 가장 좋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감흥이 많이 떨어져 쓸 말이 있어도 쓸 동기가 안 생기기 때문. 쓰고 싶은 다른 주제의 글이라도 있다면 자꾸 미루게 되어 결국 안 쓰게 된다. 그러니 지금 이 글이 어떤 형태를 갖출지는 나도 모르겠다. 흐흐흐. -_-;;;

01
미리 말하자면 영화 중간에 난 종종 몸을 비틀었다. 그건 토요일의 두 번째 영화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무려 166분에 이르는 상영시간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중간에 좀 편집했으면 좋으련만, 얘기가 종종 늘어지는 느낌이 들어 좀 지루해서일 수도 있고. 아무려나, 영화가 끝났을 때 난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읽고 싶었다. 스콧은 어떻게 썼을지 너무 궁금했다.

스콧 피츠제럴드에 대한 나의 인상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스콧과 관련한 이야기를, 젤다 피츠제럴드(Zelda Sayre Fitzgerald)와 함께 들었기 때문이다. 글 재능이 너무도 뛰어났던 젤다가 글을 쓸 수 없었던 이유, 젤다가 생의 후반기에 고통을 겪어야 했던 이유 중 스콧으로 인한 경우가 너무 많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젤다의 많은 작품이 스콧과 공저로 출간되거나 스콧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놀라지는 않았다. 지금도 이런 경우는 너무도 빈번하니까. 다만, 놀랍지 않음이 스콧을 읽지 않게 하는 이유는 되었다. 그러니 영화가 끝났을 때, 스콧의 소설이 궁금했던 건 스콧의 스타일을 알아서가 아니다. 영화의 원작에 해당하는 소설이 어떤 형태일지가 궁금했다.

02
예전에 누군가의 글에서, 영화와 소설은 장르와 문법이 너무도 다르기에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 때, 소설에 충실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소설이라는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건 영화의 매력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이 지적에 동의한다면, 벤자민 버튼에 관한 소설과 영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성공적이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영화는 소설에서 주인공의 이름과 시간을 역행하는 인간의 일생이라는 아이디어, 두 가지만 빌렸을 뿐이다. 제목만 같을 뿐, 영화와 소설은 완전히 다르다. 사람들마다 각각의 매력을 발견할 텐데, 난 소설이 좀 더 재밌었다. 무엇보다도 짧아서… -_-;; 흐흐.

(+ 출생에 관한 아이디어만 보면, 벤자민은 중국의 노자를 닮았다. 노자는 한자로 老子, 즉 ‘늙어서 태어난 아이’란 뜻이다. 노자는 태어났을 때부터 백발의 노인이었고, 그래서 이름을 老子로 지었다고. 스콧이 노자의 얘기를 알았을지 몰랐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 노자가 벤자민처럼 시간을 역행했다는 기록을 읽은 적은 없다. 물론 노자가 태어났을 때부터 늙은 모습이었다는 말은, 노자를 신선으로 신화화하려는 기획 속에서 만들어진 얘길 수도 있다.)

02-1 소설의 경우
소설책을 샀을 때, 조금은 긴가민가했다. 책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라 영화관을 나서서 곧장 책방에 갔지만, 영화 개봉을 앞둔 날림번역이면 어쩌나 했다. 이런 염려는 소설의 첫 문단을 읽으며 사라졌다. 지금 책이 없어서, 대충 기억나는 대로 쓰자면, 의학의 높으신 신들은 출산을 병원에서 할 것을 명령하지만 1860년대엔 그러지 않았다는 식이다(영문은 http://en.wikisource.org/wiki/The_Curious_Case_of_Benjamin_Button/I 참고). 당대의 의료기술, 의학의 권위에 대한 이런 조롱으로 시작하다니, 호감이 아니 갈 수 있으랴. 이 소설은 1920년대 초반에 출간되는데, 당시의 의학이 가지는 권력과 권위는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체인질링]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듯.

아무려나 의학에 대한 조롱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아기의 출생 장면부터 재밌다. 로저 버튼(벤자민의 아버지)이 아이가 태어난 병원에 달려갔을 때, 의사와 간호사들은 로저를 기피하고, 어떻게든 벤자민과 관련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 한다. 아무려나, 로저가 신생아실에 도착했을 때 만난 장면은, 육십 하고도 열 살은 더 먹은 것 같은 노인네가, 아기가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 하게 막아 둔 울타리(?)에 발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다. 즉, 소설 속에서 벤자민은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나이를 대충은 파악할 뿐만 아니라 말도 무척 잘 한다. 심지어 아이들이 하는 놀이를 싫어할 뿐만 아니라, 로저가 사다주는 아동용 장난감보다는 백과사전을 보는 식이다. 소설엔 전반적으로 조롱과 해악이 넘치며, 지순한 사랑이나 해피엔딩 같은 건 없다. 그것이 스콧 자신에 대한 조롱인지, 변명인지는 모호하지만.

+
방금 인터넷교보로 확인하니, 비슷한 시기에 번역본이 무려 다섯 종류나 나왔다. -_-;; 내가 간 서점엔 문학동네에서 나온 것 밖에 없었는데, 노블마인에서 그래픽노블과 소설을 묶은 것도 있네. 아쉽다. 흐.

02-2 영화의 경우
소설이 1860년 즈음에 벤자민이 태어나, 스콧이 자신의 소설을 쓸 즈음을 벤자민의 일생이 끝나는 시점으로 잡는다면, 영화는 영화를 만들 즈음의 시기를 80 인생이 끝나는 시점으로 잡는다. 그러니 영화 속 벤자민이 태어난 시기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1차 대전 참전 용사를 애도하는 의미로 거꾸로 가는 시계가 만들어지는데, 이 시계가 등장한 후 벤자민은 태어난다. 아기의 몸이지만 무척 나이든 모습으로.

소설에서 로저가 벤자민이 싫지만 계속해서 키운다면, 영화에서 벤자민의 생부는 벤자민을 어느 집 입구에 버린다. 그곳은 나이든 노인들이 죽기 전까지 머무는 양로원. 이 설정은 확실히 흥미롭다. 나이든 얼굴로 태어난 벤자민이 무난하게 살아가기 위한 장치로 양로원만큼 좋은 곳은 없기 때문이다. 양로원의 한 할머니는 벤자민의 얼굴을 보더니, “내 죽은 남편을 닮았네”라고 반응한다. 양로원이란 공간, 나이든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머무는 공간에서 태어날 때부터 80살의 얼굴을 한 벤자민은 특별할 것 없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고 영화는 가정한다).

역사적인 차이를 의식해선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에서 벤자민의 애인이자 부인인 힐데가드는 벤자민과 결혼을 하고 별다른 능력이 없는 인물로 나온다. 반면 영화에서 데이지(케이트 블란쳇 분)는 유명한 댄서로 등장한다. 그리고 벤자민과 데이지는 결혼하지 않는다. 영화가 소설과 가장 다른 부분은 영화에서 데이지와 벤자민은 거의 80 평생을, 때때로 서로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시기가 있다 해도, 서로 좋아하는 관계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03
이 영화가 좀 지루했다면 80 평생의 사랑이란 설정 때문이기도 하다. 좀 심하지 않나?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사랑이란 말을 믿지 않는 이 시대에(나만 이렇게 믿나? -_-;;) 평생을 유지하는 사랑이란 이야기라니…. 그러니 이 영화는 평생을 사랑했다는 과거의 어떤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를 다시 끌어들이려는 욕망으로 읽을 수도 있다. 사랑이 더 이상 영원불멸의 것이 아니란 걸 알고 있기에, 낭만적 사랑이란 환상을 말하려는 것일지도. 혹은 사랑이 변한다는 걸 너무 잘 알기에, 일생을 함께 하는 어떤 관계에 대한 바람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고. 아마도 후자의 가능성이 크겠지? 그 어떤 관계도 안정적일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안정적인 어떤 관계를 바라는 욕망이 생길 수 있으니까.

그러니 각자의 집으로서 누군가와 평생 함께 한다는 상징이라면, 그럭저럭 괜찮다. 데이지에겐 벤자민이, 벤자민에겐 데이지가 멀리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어떤 집이라면. 서로를 구속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헤어지는 것도 아닌 어떤 관계라면. 물론 데이지와 벤자민은, 젠더 이분법이 완고한 사회에서 ‘여성’으로, ‘남성’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기에 그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살 수는 없다.

다른 한편, ‘남자’의 일생이란 측면에서 독해하면, 벤자민의 일생은 새로울 게 전혀 없다. 물론 미국의 맥락에서 ‘남자’의 일생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남자들은 나이 들어서도 애다.’라고 말하는 한국의 어떤 맥락에서 읽으면, 벤자민의 거꾸로 가는 시간은 ‘남자’로 지정받아 자신을 ‘남성’으로 이해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평균적인(!) 삶 아닌가?
(+ 평균적: 개개인에게 일괄적으로 적용해선 안 되지만 어떤 경향으로 이해할 수는 있는.)
데이지와 벤자민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벤자민은 자신의 변화로 인해 아이를 제대로 양육할 수 없다며 떠난다. 하지만 이는 아이 양육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으로도 독해 가능하다. 데이지가 아이 두 명을 키우게 할 수 없다는 벤자민의 말과 달리, 벤자민은 자신이 10대의 몸을 지니면서 데이지에게 돌아가고, 결국 데이지는 어린 아이가 된 벤자민을 돌본다. 이성애-젠더 이분법에서 ‘여성’과 ‘남성’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과 상관없이 이 영화에서도 반복한다. 읽기에 따라선 시간이 거꾸로 가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핑계를 대는 거 같다. 또한 영화의 설정에서, 벤자민은 생계부양자나 소위 ‘남성’의 역할이라고 불리는 어떤 규범도 실천하지 않는다. 부잣집 도련님의 운 좋은 일생이라고 해야 할까?

04
그나저나 케이트 블란쳇은 멋있다. +_+
아울러, 댄스 공연을 다니는 팀들 간의 관계와 관련한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흐흐흐. 너무 짧게 나와서 길게 얘기하긴 난감하지만, 가장 흥미롭고 재밌었던 부분. 히히.

8 thoughts on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1. 서양문화권에서도 ‘남자들은 나이 들어서도 애’라고 한답니다 ㅎ
    “Boys will be boys”라구요. 철들지도 않고 아프면 엄살 부리기만 하는 이미지.

    1. 아하핫. “Boys will be boys”란 말, 너무 정확한 거 같아요. 흐흐흐.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느 외국 카툰에서 남편을 어린 애 취급하는 장면을 본 게 기억나요. 흐흐흐

  2. 근래 본 영화, <렛미인>, <레볼루셔너리 로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전부 책을 찾아보려구요. <렛미인>은 다행히 2009년 한국에 번역 출간된다더군요 ㅋ (스웨덴어는 물론이고 영어도 못하는 사람의 비애ㅠ)

    1. 예전에 얼핏 [렛 미 인]의 책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와아 올해 출간된다니 완전 기대돼요. 헤헤헤.
      전 학술논문이나 전공영역이 아니면 한국어 번역이 좋아요… ㅠ_ㅠ 영어를 잘 하는 게 아니라, 전공은 번역 자체가 워낙 논쟁적이라서요…

  3. 케이트 블란쳇이, 영화홍보차 오프라쇼에 나온 걸 봤는데 어찌나 멋지던지…물 같은 배우^^

    1. 영화에서 완전 멋있게 나왔어요. 흐흐. >_< 전 이번 영화에서 처음 알았는데-_-;; 찾아보니 정말 많은 영화에 출연했더라고요. 아마 다음 작품도 찾을 거 같아요. 헤헤

  4. 그렇군요. 벤자민의 시계만 거꾸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대부분 남자들의 시계는 어른이 되면서 동시에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듯 해요. 크크.. 재밌는 해석이네요.

    1. 이번 강좌를 들은 효과랄까요? 흐흐흐.
      암튼, 오늘은 좀 쉬고 계시려나요?
      강좌 기획으로 정말 수고하셨어요!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