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책장

며칠 전 학교 근처의 어느 동네를 지나는 중이었다. 예전에도 몇 번 지나다닌 적이 있는 길이었다. 그 동네에선 얼추 2년 정도를 살았으니 아주 낯선 곳은 아니다. 나로선 놀랍지 않게, 그곳에 잡화를 파는 가게가 있다는 걸 그날 처음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 가게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이렇게 빨리 깨닫다니… 랄까. -_-;; (내가 이사한 이후 그 가게가 생겼다기엔 얼추 10년은 그곳에 있었을 법한 분위기였다. 글고, 기억을 더듬으니 예전에도 그 가게를 본 거 같다. 확실하진 않지만-_-;;)

그 가게를 발견(무려 발견!)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찾던 크기의 책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폭이 넓지 않고 6단으로 나뉜 구조. 玄牝에 책장을 새로 하나 들인다면 딱 좋을 크기였다. 그러니 내가 인식한 건 책장이었지 가게가 아니었다. 책장으로 인해 가게가 덩달아 인식되었을 뿐. ㅡ_ㅡ;; 저 책장을 사면 좋겠다고 중얼거렸을 때, 사도 괜찮을 핑계 거리는 많았다. 바닥에 쌓아둔 책을 깔끔하게 보관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니까… 바닥에 쌓아둔 책 중에 일부를 깔끔하게 보관할 수 있다. -_-;; 사면 안 될 이유는 별로 없었다. 책을 더 살 수 있고, 책장을 둘 자리가 있긴 하지만 그럴 경우 방문을 여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당장의 생활비야 부족해도, 간사비가 입금되면 그걸로 대충 수습할 수 있을 듯 하니 무시하자. 사면 안 될 이유로 당장 떠오르는 건 고작 세 개 뿐이었다. … 구차한 거 나도 안다. 말을 더할 수록 더 구차해질 뿐이란 것도 안다. 하지만…. 흑.

두어 달 전에 학교 도서관을 통해 주문한 책이 입수되었다는 메일을 몇 주 전에 받았다. 입수되어도 정리하고 여러 행정 절차를 거치다보니 열람하는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 (개인주문도서의 경우, 대출예약을 하면 일찍 처리해주는데, 현재의 나는 책을 빌릴 수 없는 처지다. 그래서인지 열람하는데 시간이 오래걸렸다.) 책 내용을 확인하고선 제본하기로 결심했다. 속으로 몇 번이고 ‘미쳤다’고 욕했다. (출판본을 사기엔 하드커버의 백과사전이라 금액이 무시무시할 뿐만 아니라 현재 환율은 외국어 서적의 출판본 구매를 불가능한 상황으로 만들었다.) 책 제본이, 홀수로 제본할 때보다 짝수로 제본하면 단가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어 아는 선생님께 같이 하자고 찌르는 메일을 보냈는데 선생님도 하겠다는 답장을 줘서 기분이 좋았다. 같이 한다는 내용도 기분이 좋았지만, 그 선생님 역시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관심 영역의 책은 일단 소장하는 편이고, 그렇게 소장해서 종종 넘겨 보다가 도움을 받는 경우가 있기에 제본을 한다고 해서 더 좋았다. 나의 상황이 위로 받는 느낌이랄까. 아하하. ㅠ_ㅠ

‘나 왜 이렇게 사나’ 싶으면서도 읽고 싶은 책은 사고 있다. 과장 안 하고, 지금 玄牝에 있는 책을 모두 저축했다면 玄牝을 계약하며 지불한 보증금의 두 배는 모았을 거 같다. 과장하면 세 배. CD와 테이프를 안 사고 저축했으면 보증금과 비슷하거나 보증금보다 조금 더 많거나. 올 초, 통장에 잔고가 없어 생활이 완전 위태로웠을 때 이런 거 계산하고 있었다. 크크크. 그렇다고 후회하느냐면 그렇진 않다. 내 팔자려니 해야지. 이렇게 구시렁거릴 수 있는 것도 애정의 표현이잖아. 후훗.

암튼, 지금 내 안에 책장 하나 커다랗게 자리잡았다. 실제 구매하지 않고, 이렇게 자리 잡았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
누구나 알지만 아주 드물게 오해받는 것 하나. 책이 많다는 것과 책을 많이 읽는다는 건 완전 별개다. 내게 책은 장식일 뿐… ㅡ_ㅡV

6 thoughts on “책과 책장

  1. 저는 요즘 홍대, 신촌의 헌책방에 종종 책을 팔아서 용돈을 마련하고 있는데…… 이거 뭔가 부쿠럽군요?ㅠ_ㅠ
    주변 도서관에 책이 없어서 요즘은 정독까지 다녀요 흑-

    1. 헉… 당고가 팔아서 용돈을 마련하는 책이 어쩌면 저 같은 사람들이 다시 사고 있겠네요… 흐흐. -_-;;
      근데 아는 사람이 예전에 책을 다량 내다 팔 때 깨달은 거라며 말해 준 건데요, 헌책방에 책을 파는 것보다 고물상에 파니까 가격을 더 많이 쳐주더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하..하..하… -_-;;
      주변 도서관을 넘어 정독까지 간다니.. 너무 고생이 많아요. 참, 대출은 안 되지만(확실하지 않음) 국회도서관은 어때요? 아, 그리고 당고가 다닌 학교는 졸업생 대출제도가 없나요? 하긴 있어도 보증금과 연회비가 너무 비싸 무용지물이지만요. 저도 그 금액이 너무 비싸 포기했거든요. ㅠ_ㅜ
      (오늘 무척 빌리고 싶은 책이 있었는데 빌릴 수가 없어 조금 안타까웠지요. 흑)

    2. 국회도서관은 대출이 안 돼서;; 그리고 졸업한 학교는 대출이 안 된다고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상담소의 다른 상근자를 통해 보증금 20만원을 내면 대출을 해준다고 들었죠. 졸업생들에게 받은 20만원씩을 모아 어디 다른 데에 돈을 굴려서 이자를 불리는 걸까요?-ㅅ- 어이가 없어요-ㅅ-;; 저는 그 학교에 더 이상 한푼도 내기 싫거든요. 설사 나중에 돌려 받더라도 ㅋㅋㅋ

    3. 정말 그 비싼 보증금을 왜 받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다닌 학교도 그렇거든요. 심지어 연회비도 따로 내고요. 그간 낸 등록금이 얼만데 싶어 전 도서관 출입증만 만들었지요. 근데 책을 빌릴 수 없는 상황이 되니 빌리고 싶은 책이 잔뜩 생기더라고요. -_-;; 흐흐

  2. 저 책장 가게는 실제로 있는 거죠?;; 이제 가게 얘기 하시면 다 허구같이 들려요. ㅋㅋ

    1. 푸핫. 깔깔깔.
      그, 그렇군요. 흐흐흐.
      근데 실제 있는 가게예요. 제가 헛 것을 본 게 아니라면요. 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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