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얘기: 슬픔, 낙태 논쟁, 양희은

당고 댓글을 읽고 반성하며… 사실 항상 뭔가를 써야 하는데 하는 부담은 있었지만 살짝 방치했다는… 뭐, ‘목하 열애'(응? 크크크) 중이니까. 으하하;;

01
며칠 전, 눈이 내리던 날 알바를 끝내고 玄牝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심성락을 들었다. 수은등은 창백하고 또 흐렸으며, 바깥은 어둡고 또 김이 끼어 흐릿했다. 심성락의 아코디언은 바람의 소리를 내며 애잔했다. 나는… 장의차에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움직이는 관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어떤 불길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엄청난 죄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니다. 나는 그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다고 믿었지만, 이런 선택이 최선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슬퍼하고 있었다.

02
다른 한편, 누군가와 얘기를 하다가, 나는 뜬금없이 프로라이프(pro-life)가 되었다. 그 분은 생명이 소중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나는 당연히 소중하다고 답했다. 그리고 나는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이 되었다. -_-;;

물론 이 상황에서 나는 논쟁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과는 논쟁이 어렵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꽤나 피곤한 상태였고, 논쟁이 불가능한 사람과 논쟁하는 건 시간낭비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예, 예”라는 말만 반복했다.

갑갑한 건, 생명 vs 반생명(선택)이란 이분법 구도였다. 내가 아는 페미니즘에서 생명이 소중하지 않다고, 생명이 귀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책은 없다. 그런 페미니스트도 없다. 생명과 선택이란 이분법이 아니라, 낙태가 어떤 맥락에서 발생하는지 이해해야 하고, ‘여성’만을 비난하고 가해자로 내몰면서 ‘남성’은 부재중으로 만드는 구조를 비판하고, 태아를 초월적인 절대적 주체로 여기고 여성을 ‘인큐베이터’로만 대하는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고, 모든 여성은 이성애자고 결혼해서 어머니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인식에 문제제기한다. 등등. 간단하게 말하면 복잡한 현실을 복잡하게 고민하자는 건데, 소위 프로라이프라고 자처하는 집단은 모든 상황을 매우 단순하게 만들어 버리며 책임지지도 못할 말들만 화살처럼 쏘아댄다.

근데 좀 웃긴 건, 방송에서 프로라이프를 자처하는 분들의 발언을 듣고 있노라면, 그 논의에서 어떻게 낙태반대란 결론이 나올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논의 과정만 들으면 선택권을 지지할 거 같은데… ;;

03
아침마다 양희은 씨의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그리고 매번 놀란다. 양희은 씨의 발언이 멋져서. 물론 그동안 내가 양희은 씨를 비롯하여 공중파 방송 진행자에 대한 편견이 있긴 했다. 그들은 젠더 권력 관계의 문제에서 “참고 살라”며 ‘여성의 인고’를 강조할 것이라는 어떤 편견. 성교육강사라면서 여성에게 조심할 것을 요구하는 말도 빈번했으니까.

근데 양희은 씨는 달랐다. 3.8 여성의 날을 지지하고 낙태 논쟁에서 여성의 선택권과 남성의 부재를 지적하는 발언을 방송 서두에 말하는 건 기본. 며칠 전엔 여성도 아내가 있다면 직장 생활을 비롯하여 일을 매우 잘 할 수 있다고, 남편/남성은 회사 일에만 집중할 수 있지만 아내/여성은 사회적 조건이 다르고 회사 생활과 가사 노동 등의 여러 일을 동시에 책임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지적하더라. 언젠가는 왜 여동생이 오빠의 밥을 챙겨주느냐며 오빠가 여동생의 밥을 챙겨주는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성은 누나여도 여동생이어도 남자 남매의 밥을 챙겨줘야 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했던 말. 공동진행자가 뭔가 좀 이상한 말이라도 할라치면 능숙한 언변으로 바로 문제를 지적하기도 하는데.

라디오를 들으며, 감탄 또 감탄. 한계가 없진 않(겠)지만, 공중파 방송이라는 맥락을 감안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04
결국 이 모든 글도 트위터로 메모한 걸 정리했네요. 하하;;

5 thoughts on “이런 저런 얘기: 슬픔, 낙태 논쟁, 양희은

  1. 앗, 양희은 멋질 것 같다가도 안 멋질 것 같았는데 의외로 또 멋지네요ㅠ_ㅠ(뭔 소리야;;;;;;)
    음, 생명은 소중하다고 할 때 ‘생명’이라는 곳이 꼭 수정란이나 태아가 될까요. 이미 나와 있는 우리는 ‘생명’이 아니라 돌멩이나 먼지로 취급받을 때가 대부분인데. 이 사회에서 말이에요. 누구나 생명은 소중하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생명이 소중하다고 인식하고 그걸 지키기 위해 행동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다름이 아니라, 저는 그런 걸 종종 잊고 사는 것 같아서. 낙태랑 상관이 없는 얘기에요, 지금 이 덧글은. 저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해요. 더 이상 인간들이 태어나지 않는 상상. 난 이미 태어나 버려서 할 수 없지만, 더 이상 인간들이 태어나지 않고 지금 태어난 인간들만 살다가 죽으면 인간이 사라지는 거죠. 그냥 최후의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면서 인간으로서 유종의 미를 거두자?????? 냐하하- 이런 뻘덧글 죄송; 낙태를 찬성한다는 말도 이상하고 반대한다는 말도 이상해요. 하지만 전 종종 그런 생각은 들어요. 아가들이 꼭 태어나야만 할까; 그냥 인간이란 지구를 위해서 사라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점점 더 산으로 가는 뻘덧글;;;;;
    어쨌든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합의도 없잖아요. 인간이 지구를 구원해야겠다는 합의도 없고, 북극곰을 살려야겠다는 합의도 없고, 인간이 영원히 지구를 지배하겠다는 합의도 없고, 인구를 증가시켜야 한다는 합의도 없고…… 그런데 무조건 애를 많이 낳으라고 하고 생명은 소중한 거라고 하면, 그 말이 옳든 그르든 그 얘기는 어디서부터 온 걸까 싶어요. ‘생명이 소중하다’는 말을 사람들이 그렇게 뼛속 깊이 인식하면서 살까요? 풀이나 나무는 마구 자르면서, 지구에 있는 얼음은 다 없애면서, 야생동물을 사냥하면서. 그럼 인간의 생명만 소중하다는 걸까요? 아무도 생명을 소중히 하면서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아요. 근데 갑자기 절대로 깨뜨릴 수 없는 명제인 것처럼 ‘생명은 소중하다’ ‘그러니까 너희는 애를 낳아야 돼’라고 말하는 게 뜬금없어 보여요. 인간들은 그냥 자기 세를 불리고 싶은 걸까요? 유전자를 마구마구 퍼뜨린다고 해야 하나? 그걸 원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좀 징그러워요. 인간이 마구마구 불어나는 게 외계인의 침입 같다고나 할까. 왜 전 인간인데도 이런 생각을 하며 이렇게 긴 뻘덧글을 쓰고 있을까요;;;;;;;;; 그냥 패스하세요, 루인.

    1. 오오… 당고, 더 이상 인간들이 태어나지 않는 상상으로 소설을 써줘요!!!
      사실 생명 자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매우 논쟁적인데 이 부분 관련 논쟁은 빼고 약간 원론적인 측면에서 구시렁 거렸어요. ;;

  2. 오!! 양희은 선생님 급 호감!!!!

    당고님 덧글을 읽었는데요, 저랑 비슷한 상상과 생각을 하시네요 ㅎㅎ
    인간은 바이러스죠. 일종의ㅋ
    인구 늘리기 싫어서 저는 아이를 낳지 않을겁니다 ㅋㅋㅋ

    1. 양희은 선생님 짱!! 흐흐.

      전 지구 상의 인구가 10분의 1이나 100분의 1로 줄었으면 지구가 참 편할 거란 상상을 해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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