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퀴어의 역사쓰기

지난 주 수업 때 제출한 쪽글입니다. 매주 제출이라 매주 쓰고 있는데 일주일에 하나 씩 공개할지 꿍쳐 뒀다가 새로 블로깅하기 귀찮을 때 할까 고민이지만요.. 으하하. ;;;
암튼.. 고민이 얕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저도 수긍할 수밖에 없고요. 상상력이 얼어버려서 고민을 밀고 나가지 못 했거든요.. 하하 ;;;
===
2013.10.08.화. 15:00-
타자/퀴어의 역사쓰기
-루인
타자가 처해 있는 “예외상태가 상례”(337)라는 건 “야만의 기록이 아닌 문화의 기록이란 결코 없다”(336)는 뜻이기도 할 터다. 타자의 역사, 야만의 기록은 지배 규범적 역사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배 규범적 역사는 타자(의 역사)를 억압하며, 그럼에도 타자를 그 자신의 토대 삼으며 구성한 시간이다. 문화의 역사는 지배자의 감성으로 구성한 역사이자(336) 타자를 예외 취급하며 구성한 시간이다. 그러니 타자는 별개의 존재 같지만 이 사회 질서에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는 이 사회의 규범을 구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하지만 마치 예외처럼 취급되어 별도로 인지될 뿐이다.
소위 여성이나 퀴어에겐 종종 “예전에 비하면 지금 많이 좋아지지 않았느냐”는 말을 한다. 예전에 비하면 좋아졌다는 식의 언설은 진화론적, 단선적 시간, 그리하여 열악한 과거, 현재와 단절된 과거를 상정한다. 하지만 이런 시간은 소위 얘기하는 남성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남성은 늘 예전보다 지금이 ‘열악’하거나(“예전엔 남편의 말이 하늘 같..”) 남성의 현재는 과거의 남성이 아니라 다른 남성의 현재와 비교된다. 소위 여성이나 퀴어의 단절된 과거가 현재보다 열악하다고 가정하지만, 그때가 정말 지금보다 열악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미 기록이/역사가 없(다고 여기)는 존재기에 현재의 재현이 전부다. 그 과거는 구체성 없이 막연한 형태로 존재한다. 혹은 지배적 역사/문화의 기록에 누락된 형태로만 존재한다. 그리하여 그저 지금 이 순간 뿐이라서 “인용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존재…
물론 타자도 ‘역사’가 있다. 퀴어가 늘 듣는 질문 “넌 언제부터 네가 퀴어란 걸 깨달았니?”는 퀴어의 기원, 개인의 역사를 묻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비-퀴어는 받지 않는다. 그리고 이 질문의 대답은 대체로 어떤 규정에 따라 평가받는다. 규정된 서사로 구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 자체를 의심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퀴어에게 혹은 타자에게 부여된 역사는 동적이고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것, 박제된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 지금시간의 구성 대상이고(345), “역사적 인식 주체가 투쟁하는, 억압받는 계급 자신”(343)이라면 역사는 타자의 맥락에서 재구성되어야 하거나 재구성될 수 있다. 비록 현재의 지배 규범으로 유통되는 역사가 지배자의 통치를 돕고 지지하는 역사, 지배하는 자에게 감정이입해서 기술된 역사라지만, 이 역사는 또한 타자의 역사란 점에서 그러하다(336). 그리하여 타자/퀴어의 역사를 인용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면, 퀴어/타자의 역사를 “성좌구조”(349)에 배치할 수 있다면?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인다. 1980년대 출판된 책을 지나 1970년대 출판된 책의 목차를 훑는다. 없고, 없고, 없다. 없는 와중에 드물게 있다. 드물게 불쑥 튀어나와 지금의 나와 조우한다. 1970년대에 출판된 퀴어 관련 기록이 2013년의 나와 불쑥 조우하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 과거가 지금 이 찰나에 ‘현재’로 등장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옛시간과 만난다. 나는 내가 태어나지 않은 시간에 존재하고, 내가 태어나기 전의 기록은 지금 이 순간 다시 숨쉰다. 물론 이 기록은 단절 없이 지금과 매끈하게  접합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기록은 타자의 역사, 혹은 역사를 ‘인용할 수 있는 것’으로 바꿔낸다. ‘구원’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렇게 불쑥 튀어나온 역사의 흔적은 기존의 역사를 다시 인식하도록 하고 다시 쓰도록 한다. 그 한두 구절 속에 역사의 새로운 국면이 움트고 있다. 어쩌면 나는 역사에서, 과거에서 구원 혹은 희망을 찾는 건지도 모른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