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애인님과 살림의원에 가기 위해 구산역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서 어느 일행이 나의 가방에 잔뜩 달려 있는 뱃지 중, '차별금지법 제정하라'를 두고 떠들었다. 무슨 소리를 하려나 했는데, 차별금지법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내 가방에 붙인 뱃지에 대해 계속 떠들었다. 심지어 한 명은 뱃지를 이렇게 달면 무겁지 않냐, 또 다른 사람은 이거 다 뭐냐고 대놓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갈등을 극도로 회피하는 나는 그냥 냅뒀는데, 평소에는 매우매우매우 소심하지만,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더욱 소심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싸우길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애인님이 화를 냈다. 그들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애인님은 뱃지를 두고 떠는 인간들이 다 들으라며, "세상에 이렇게 무례한 사람은 처음본다", "진짜 너무 무례하다"와 같은 말을 하며 화를 냈고, 나는 그 말에 동조하는 반응을 했다. 그리고 뱃지를 두고 떠들던 인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여러 가지 말할 거리를 주는데.. 일단 뱃지를 한국어로, 메시지가 정확하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한국어로 만들어진 뱃지에는 반응했지만 나머지 뱃지는 그냥 까마귀만 언급하고 끝이었다(까마귀가 들어간 뱃지가 있다). 한국에서는 한국어가 가장 전달성이 좋다는 점에서 당연한 이야기지만 생각보다 한국어로 만든 뱃지가 많지 않다. 6색 무지개의 상징성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고, 내가 착용한 뱃지 역시 6색 무지개, 트랜스 프라이드 색깔, 바이 프라이드 색깔을 이용한 뱃지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메시지도 이해하기 쉬워야 하는데, '차별금지법 제정하라'는 명확해서 이해하기 쉽지만, '트젠 투쟁' 뱃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트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한편으로 이 사건은 애인님과 나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다. 애인님은 자신이 받는 부당한 피해나 불이익에는 대체로 넘어가는 편이다. 하지만 본인에게 소중한 사람이 같은 피해나 불이익을 겪을 때, 그리고 본인이 지지하는 정치학을 누군가 혐오로 반응할 때면 참지 않는다. 불과 같은 힘으로 대응한다. 나는? 갈등을 극도로 회피하는 타입인 나는 무조건 사태를 회피한다. 물론 급발진할 때가 있는데 그건 학술대회나 수업, 토론회와 같은 자리일 뿐이고, 그 외에 대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갈등은 다 회피한다. 이런 내가 인권단체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겠지만... 나는 기록물을 조우하지 인간을 만나지는 않는 일... 아카이브여서 지금까지 활동을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고.

갈등을 극도로 회피하는 성격이라면서 가장 열심히 뱃지를 착용하고 다니는 것은... 뭔가 매우 모순 같지만 아무려나 그렇다. 갈등을 회피하기 때문에, 뱃지로 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평소에는 이어폰을 쓰고 있어서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뒤에서 떠드는 소리를 직접 들으니, 뱃지는 더 열심히 착용해야겠네. 길벗체로 '차별금지법 제정하라'라는 문구를 쓴 뱃지는 비온뒤무지개재단에서 만들었으니, 참고하시길...


2022/04/09 16:43 2022/04/09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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