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아메리카

[트랜스아메리카], 2006.06.25. 영화. 어둠의 경로;;;;;;;;;;;;;;;;;;;;;;;;;;;

오랜만에 토요일은 玄牝에서 종일을 보냈고 일요일은 5시 즈음 사무실에서 玄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둠의 경로를 뒤적였다. 요즘은 어떤 영화가 나오나, 하고. 영파라치 이후 어둠의 경로는 포기한데다 최근 일정이 어둠의 경로와 접속할 여건도 아니었기에 그냥 재미삼아 뒤적였다. 그러다 거슬린 제목, [트랜스아메리카]. 설마 했다. 설마 트랜스/젠더, 트랜스/섹슈얼을 다루는 영화일라고. 그냥 미국을 횡단하는 여행영화겠지, 하며 지나갔다. 그런데 몇 번이고 계속 거슬렸다. 자꾸 걸렸다. 그래서 제목을 검색하니… 으하하하하, 성전환 수술을 앞둔 트랜스를 그린 영화였다.

처음엔 그냥 대충 어떤 내용인지만 확인하고 말 의도였지만, 계속 봤다. 그러며, 인상적인 혹은 몸 아픈 몇 장면.

영화 시작하는 초반에 의사와 상담하는 장면이 나온다. 성전환수술을 앞두고 (추측하건데 정신과) 의사의 ‘허가’를 받기 위한 마지막 상담. 의사는 여러 가지를 말하고 묻는다. 어떤 수술을 받았느냐고 물으며 “진짜” 같다고 성형수술을 상당히 잘 했다고 말한다. 그러며 기분이 어떠냐고 주인공 브리(펠리시티 허프먼)는 행복하다고 했다가, 다시, 수술을 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정정한다. mtf인 브리에게 지금의 외부성기를 어떻게 느끼느냐고 묻자 역겹다고 말한다.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 하냐고 묻자 부모는 죽었다고 대답했던가. 이 장면들을 읽으며 트랜스들이 어떻게 의료체계에 포섭되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복잡함을 느꼈다. 지금도 행복하다고 했다가 수술을 못 받을까봐 수술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정정하는 장면, 페니스를 역겹다고 말하는 장면, 모두 기존의 의료체계가 요구하는 정답들이다. 사실 브리가 자신의 페니스를 역겨워하는지 안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역겨워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의사 앞에서 후자의 대답은 결코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대답은 정해져 있다. 한 ftm은 페니스구성수술과는 별도로 질제거수술은 받고 싶지 않아 하는 트랜스들의 욕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의사에게 물었지만, 의사는 그런 ftm 트랜스는 없다고 말했다. 의료체계에서 수술을 통한 트랜스 몸의 구성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의사에게 있다. 바로 이 지점이 기분 더럽게 다가오기도 하고 그런 의료체계에서 어떻게 협상적인 언어를 쓸 것인가를 갈등하는 브리의 모습이 아프기도 했다. 자신의 외부성기의 모습과 젠더 정체성은 별다른 관련이 없음에도 의료체계에선 외부성기=젠더 정체성으로 간주한다는 점, 지금의 법체계에서 트랜스는 모두 성전환수술을 한 사람으로 한정한다는 점에서 며칠 전의 대법판례와 기사들이 떠올랐다.

이 영화의 이야기 구성은 18년 전, ‘레즈비언’ 관계로 성관계를 가졌다가 존재를 몰랐던, 감옥에 갇혀있는 아들에게서 전화가 오고 그래서 여행을 하면서 어떻게 관계를 맺어 가느냐에 있다. 토비는 친아빠를 찾아가고 브리는 이 여행이 끝나면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물론 아들인 토비는 영화의 후반부까지 브리가 친”아빠”인지 모른다. 그저 “예수쟁이”로 알 뿐이다. 이 여행 중에 겪는 일들을 통해 관계가 조금씩 변해간다. 영화 중 재미있는 하지만 아픈 에피소드들.

히치하이커가 있어서 차를 태워주는데, 잠깐 차에서 내려 쉬는 사이에 히치하이커가 차를 훔쳐간다. 그때 브리가 외친 말: “내 수술비! 내 호르몬!” 결코 웃을 수 없는 장면. 차가 아까운 것이 아니라(애시 당초 목적지에 도착하면 팔아버릴 예정이었다) 차에 둔 호르몬이 브리에겐 더 절박했다. 그 불안함, 절망, 좌절.

하지만 이 장면에 앞서 나오는 장면, 여행 중에 묵을 곳이 필요해 소개로 들른 곳이 트랜스들의 모임이 있는 집이었다. 브리는 상당히 불편해하고 토비는 그냥저냥 지낸다. 그 집을 나와 토비와 브리의 대화: 브리는 “가짜고 인공인 여자들”이라고 ‘혐오’하는 것 같은 발언을 하고 토비는 “다들 착해 보이는데 왜 그러느냐”고 반응한다. 브리의 반응이 와 닿았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랬겠지만, 일단은 자신이 트랜스임에도 그것을 토비에게 들키지 않고 싶을 때, 브리는 더욱더 부정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트랜스는 역겨워”라고 말함으로서 자신이 트랜스임을 들키지 않으려는 전략. 트랜스들을 옹호 혹은 지지했다가 자신의 트랜스 정체성을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트랜스는 다른 정체성보다 좀더 복잡하다. 트랜스일 때, 이 영화에서처럼 mtf(male-to-female)일 때, 사실 mtf란 표현은 문제적인데 단 한 번 자신을 “남성”으로 느낀 적 없을 때 의심 받는 것의 느낌:”여성”임에도 “남성”으로 의심받는 것을 폭력으로 느끼기에 더 적극적으로 트랜스혐오 발화를 할 수도 있다. 혹은 “남성”으로 느끼다가 젠더 정체성의 변화로 “여성”으로 느낄 때, “여성”이 아니라고 의심 받을까봐 더 적극적으로 트랜스혐오 발화를 할 수도 있다. 이런 복잡한 지점에서 트랜스”여성”은 “가짜고 인공”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물론 그런 발화는 자기혐오와 겹쳐서일 수도 있다. 자신의 트랜스 정체성과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이 트랜스임에는 께름칙함을 느끼는 반응.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재미있는 건 토비의 반응이었다. 자신과 무관한 일일 땐 얼마든지 “관대”할 수 있지만, 이후 브리가 트랜스임이 드러났을 때 토비는 완전히 다르게 반응한다.

물론 토비는 거짓말해서 기분 나쁘다고 하지만, 솔직히 루인은 그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웠다. 친밀함을 느꼈던 사람이 “변태freak”일 때, 그 사실을 접할 때 가려둔 또 다른 감정이 드러난다. 그래서 루인은 브리가 트랜스임을 알고 보인 토비의 반응은 단순히 거짓말을 해서(혹은 처음부터 트랜스임을 밝히지 않아서)만이 아니라 트랜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반응은 토비가 브리에게 성적으로 매혹되었을 때, 바로 그때 토비가 찾으려고 하는 “아빠”가 브리임을 알았을 때, 엄청난 혐오와 폭력적인 행동을 통해 다시 한 번 드러난다. 물론 이를 단순히 트랜스혐오라고 읽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 숨겼다는 점, 적어도 자신의 “아빠”만은 트랜스일리가 없다는 믿음, 이런 세련된 혐오(“내 가족, 내 주변 사람만 아니면 다 괜찮아”라는 식의 쿨한 반응), ‘이성’으로 사랑한 사람이 “아빠”라는 사실의 ‘혼란’ 등등의 복잡함 속에서 이런 폭력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떻게 끝나느냐고? 미국산의 대부분이 그렇듯, 해피엔딩이다. 단 그 해피엔딩은 어느 누군가의 ‘희생’이나 포기가 아니라 각자의 길을 가면서도 그 길에서 소통하는 방식으로의 해피엔딩. 브리는 토비의 반응에도 성전환수술을 하고 토비는 포르노그래피 배우가 되고 둘 사이에 존재하는 어느 정도의 간극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둘이 다시 만났을 때, 서로를 용서하는 끔찍한 방식(용서라니, 누가 누굴 용서해?)이 아닌 서로의 방식에서 소통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이 좋았다.

#아아, 검색로봇에 어떤 말이 걸릴지 가히 두렵다-_-;;

2 thoughts on “트랜스아메리카

  1. 자신의 정체성이 퀴어일때 그런거 있지 않나요.. 음.. 나는 비록(?) 퀴어지만 (특히) 내 형제도 퀴어라면 (일 때).. 상상만 해도 싫은 것. 퀴어는 나 하나로 족하다는.. ㅎㅎ 그런 생각.. 그럴때의 느낌이나 생각을 뭐라 할 수는 없겠지만, ‘너마저?’내지.. ‘나 하나 힘든거로 족한데 너까지 힘든…’ 두 가지 정도 생각이 교차하는 듯해요. 모성애, 부성애.. 등등의 영화에서는 누군가가 ‘희생’, ‘포기’하므로 인한 해피엔딩식 결말이 많잖아요. 전 그렇게 싫더라구요. 그게 정말 해피엔딩일까? 자포자기식 해피엔딩이라면 몰라도.. -_-; 그래서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한 행복은 싫더라구요. 아. 이 말하면서 좀 찔리네요. ㅜ.ㅜ

    1. 그런 것 같아요. 루인도 그래서, 브리가 다른 트랜스들에 보이는 반응에 감응했더래요. 하긴 때론 스스로가 퀴어란 사실이 낯설기도 하니까요. 흐흐ㅠ_ㅠ
      정말 상당수의 해피엔딩이 뜬금없는 “자포자기식 해피엔딩”인 것 같아요. 그래서 해피엔딩이 오히려 불편하기도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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