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들으며 경험을 다시 경험하고 언어를 품는다

추석이 끝나고 玄牝으로 돌아와서 글을 쓰며, 그래도 이제는 매일 같이 글을 쓸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달리 여유가 생긴 건 아니지만 그래도 [Run To 루인]에 새로운 글을 쓸 여유가 없으랴 했다.

사무실에 같이 있는 사람은 알지만 월요일과 화요일, 사무실에 있는 내내 컴퓨터 책상에 앉아 있었다.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컴퓨터이니 [Run To 루인]과 만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글을 쓸 수 없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글을 쓸 수 없었던 건, 순전히 미뤘던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그 과정이 지난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책을 한 권 낼지도 모른다. 물론 루인 혼자서 쓰는 책은 아니고 참여하며 활동 중인 모임에서 내는 책이다. 그 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 일을 지난 이틀 동안 했다.

사실 그 일들은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130여 분 길이의 녹음 파일을 푸는 것은, 따지고 보면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 못 할 일이 아니다. (물론 어제, 화요일은 수업과 회의가 있어서 오후에만 조금 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지난했고 한 20분 했겠지 하고 확인하면 고작 3분이 흘러있었다. 녹취를 푸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듣는 과정이 어려운 일이다.

이런 과정은 비단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지난 8월 말에도 경험한 일이다. 이런 시간을 이틀 간 보낸 셈이다. 그러며 남는 건 우울과 상처뿐이다.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상처 받는 일이다. 특히나 자신과 비슷한 맥락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자신의 과거를 다시 경험하는 일이고, 그 목소리가 전해주는 경험을 동시에 경험하는 일이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는 것 같은 경험으로 받은 상처가 언어를 모색하는 힘이다. 과거를 다시 경험하면서 앎이라는 과정에 들어가고 언어를 모색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녹취를 풀 때마다, 이런 느낌을 가진다.

이른바 현장과 이론, 운동과 학문이라는 식의 이분법, 그것을 딱 잘라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현장의 경험들”이 “이론”이고 “이론”이 “현장의 언어”이다. 경험을 언어화하는 작업, 그러니까 문장으로 풀어낼 수 있는 작업이 곧 이론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느낀다. 그러니 이론은 그렇게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다. 그저, 절박하게 언어를 찾는 몸앓이일 뿐.

루인의 경험상으론 대학이라는 학제에서 멀리 있을수록 더 많은 언어를 가지고 있더라. 이 말은 이론이라는 것이 단지 대학물을 먹어야지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고 이른바 세련되었다고 말하는 표현은 사실 권력과 권위를 획득하기 위한 치장인 경우가 많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그저 루인은 책과 노는 것이 더 좋아서 대학원에 왔을 뿐, 대학원이 유일하게 언어를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어서가 아니다.

혼자서 우울해 하며 웅크리고 있다. 그냥 그럴 뿐이다. 이런 과정들이 행복이란 걸 안다. 만신창이로 만드는 말들이 하나하나 소중한 경험이고 불안에 떠는 순간이 언어를 품는 과정이다. (문득 진주를 품는 조개가 떠오른다.)

우울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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