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에 고등색, 갈색, 검은색 등이 어울린, 일명 삼색 고양이는 리카.
검은색에 흰색 신을 신은 고양이는 카노.
흰색에 고등어무늬의 고양이는 노아.
흰색에 주황색 가필드 무늬가 있는 고양이는 아메.
하지만 아메가 실제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 고양이가 셋 이상인 건 확신했지만, 자주 만나는 건 리카와 카노. 노아와 제대로 만난 건 어제 밤이었다. 내가 집 근처에 있는 시간은 아침과 늦은 밤이라 만나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대충 셋 이상이라고 짐작했다.

내가 귀가하는 시간, 나를 기다려주는 냥이는 리카나 카노였다. 어젠 리카와 카노가 자동차 아래서 식빵 굽는 자세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밀하겐 ‘나’를 기다린 건 아니지만.. 하하.) 그런데 리카과 카노 외에도 노아가 잔뜩 긴장한 자세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히히.

아메는 어느 아침에 잠시 만난 적이 있다. 늦은 밤에 잠시 만났다가 이른 아침 자동차 아래서 식빵을 굽고 있는 아메를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노아와 헷갈린 건진 확실하지 않다. 밤의 고양이와 아침의 고양이는 다르다. 낮의 고양이는 또 어떤 표정일까?

리카를 처음 만난 건 지붕 위를 걷고 있는 모습이었다. 난 단박에 리카에게 반했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뻤다. 그런 리카가 가끔은 나를 기다린다. 물론 우리의 거리는 2미터. 하지만 적정 거리만 유지한다면 리카는 도망가지도, 숨지도 않는다. 카노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카노는 좀 더 용감하다. 카노의 적정 거리는 1.5미터. 리카가 가까운 거리에 사람이 있으면 꼼짝도 안 한다면 카노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매우 조용하게 움직인다. 둘은 자주 같이 다니거나 같이 앉아 있다. 남매/자매/형제 관계인 걸까? 알 수 없다. 노아는 따로 다니는 거 같다. 하지만 리카, 카노와 낯선 사이는 아닌 듯하다. 노아는 아직 나와 익숙하진 않다. 하지만 나를 알아 봐주는 거 같아 매우 기뻤다. 리카도 사람을 많이 가리지만, 노아는 더 심하다. 리카는 눈을 마주하며, 내가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한다면 노아는 숨어버린다. 도망가지는 않지만 자신의 몸을 가급적 숨긴다. 그리고 아메는 … 정말 존재하는 걸까? 내가 착각한 걸까?

그리고 내 삶이 변하고 있다. 행복하고, 기쁘지만 그런 만큼 불안하고 걱정이다.

+
다섯 번째 다른 냥이가 나타난다면, 아리라고 부를 거다.냥이 이름을 메리라고 붙일 순 없잖아. 그리하여 냥이들 이름을 붙인 방식이 드러났다. 으하하. 나도 참 상상력 부족이다.

++
언젠가 어떤 이야기를 쓰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지금은 짧은 흔적으로 충분하다.
2009/11/30 14:51 2009/11/30 14:51
“그보다 서스펜스랑 미스터리는 어디가 어떻게 다른 건데?”
“조마조마한 게 서스펜스. 수수께끼를 푸는 건 미스터리예요!”
“호모의 일상 그 자체네. 근사한 남자가 가게에 오긴 했는데 이를 어쩌나. 게이일까? 아닐까? 봐, 서스펜스와 미스터리 종합 세트잖아.”
-기노시타 한타. 『악몽의 엘리베이터』(김소영 옮김. 파주: 살림, 2009)

이번 달엔 이래저래 바빠 책을 몇 권 못 읽을 줄 알았다. 근데 어쩌다보니 논문을 제외하고도 10권은 읽었으니 아주 게을렀던 건 아닌 듯.

일본에서 1970년대 숟가락을 구부리는 초능력을 가진 초등학생 사건은 현대일본 작가들에게 일종의 집단기억을 형성한 걸까? 미야베 미유키의 『용은 잠들다』엔 관련 내용이 꽤나 자세하게 나온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에선 상당히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그리고 기노시타 한타의 소설, 『악몽의 엘리베이터』에도 초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숟가락을 구부리는 장면이 나온다. 1990년대를 한국에서 보낸 사람들에겐 “개구리 소년들”이 일종의 집단기억일 수 있을까? 뉴스를 안 보던 나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로 그 시절 한국사회는 “개구리 소년들”로 들끓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오늘날 소설을 쓰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2000년대 이후 등단한 작가들이나 출간한 소설을 잘 안 읽으니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잘 모르겠다. 딱히 어디에서 읽은 기억도 없고. “개구리 소년들”보단 서태지가 더 강한 인상을 준 거 같기도 하고. ㅡ_ㅡ;;

암튼 『악몽의 엘리베이터』는 무척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소설을 끝까지 읽는 재미가 있다. 그렇다고 굳이 독후감을 쓸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난 독후감을 잘 안 쓴다. 그럼에도 굳이 이렇게 글을 쓰는 건 위에 인용한 구절이 재밌어서. 장르의 특성만 뽑아서 얘기하자면, 정말 절묘한 구절이다. 그래서일까? 커밍아웃과 파트너를 찾는 과정을 서스펜스와 미스터리로 풀어간 영화가 있었던 것도 같다. 암튼 이 책엔 게이(책에선 “호모”로 표현)가 등장하니 조만간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에 기증할 예정이다. 혹시나 그 전에 이 책을 깨끗하게 읽고 돌려주실 분이 계시면 리플 다세요...라고 쓰지만, 아무도 안 달 거 안다;;; 아울러 이럴 땐 오프라인으로 만나기 어렵지 않은 분에게만 빌려 줄 수 있지 우편으로 주고 받기는 애매하다. 우편료가 책값보다 비싸기 때문;; 아무려나 혹시나 원하시면 빌려드릴게요. :)
2009/11/29 12:26 2009/11/29 12:26
01
2007년 설 연휴가 지나고, 당시 사무실과 연구실을 겸해서 사용하던 곳에 갔을 때, 나는 바짝 말라 죽은 화분을 보았다. 일주일 동안 사무실을 비운 동안, 허브는 오랜 가뭄으로 말라죽은 것처럼 죽어있었다. 나는 너무 미안했고, 일종의 죄책감에 다시는 살아 있는 생명과 함께 살지 않기로 다짐했다. 아니, 내가 책임질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함부로 다른 생명/존재와 함께 살지 않기로 했다. 이건 무서운 교훈이었다.

2007년 추석 연휴 기간, 설에 부산에 갔는데, 추석에도 가야 하느냐며 서울에 머물렀다. 날마다 연구실 혹은 사무실에 나왔다. 그러며 학교고양이들에게 참치캔을 주었다. (관련글은 여기) 다른 날이라면 학교에서 음식을 찾기가 어렵지 않겠지만 추석 연휴 동안은 쉽지 않을 일. 사람들이 없기에 학교는 일시중지 상태에 빠진다. 사람을 기준으로 학교는 일시중지. 하지만 학교에서 살아가는 식물들, 고양이들은 여전히 살아야 한다. 제 삶을, 생을 일시중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추석연휴 기간 동안에만 음식을 주기로 했다. 최소한의 음식으로 생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아울러 나와 고양이가 서로 적응하지 않고 서로에게 길들지 않도록.

추석이 끝났을 때, 나는 ‘고양이사료라고 불리는 음식을 사서 꾸준히 줄까’라는 고민을 했다. 하지만 결국 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민으로 끝났다. 그 이후 내가 머물던 연구실 혹은 사무실이 있는 건물 근처의 고양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여전히 잘 살고 있을까? 그해 겨울이 지나면서 익숙했던 고양이 울음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걱정했지만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진 않았다. 지금에 와선, 그냥 음식을 조공(!)했어야 했다고 판단하지만, 이 판단은 현재의 것이다. 그 시절엔 거리두기, 무심하기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것이 비록 나 편하자고 내린 결론이라고 해도.

02
학교마다 사람을 주인으로 삼지 않는 동물(혹은 비-인간)들이 있는 거 같다. 내가 다녔던, 여전히 일을 핑계로 만날 드나드는 학교에도 몇 종의 동물이 있다. 토끼도 있고(아직도 있을까?) 고양이도 있다. 고양이는 계속해서 모습을 바꿔가며 출몰한다. 그 고양이들은 길고양이가 아니라 학교고양이일 테다. 학교를 생태계 삼아 살아가는 이들.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 학교란 공간을 자신들의 집 삼아, 생태계 삼아 살아가는 고양이들.

지금 내가 일을 빌미로 자주 드나드는 학교엔 고양이가 최소한 둘 있다. 한 아이는 흰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얼룩이고 다른 아이는 가필드를 닮은 고양이다. 재밌게도 둘의 성격은 너무 다르다. 얼룩이는 놀랍게도, 사람들 근처에 다가와선 곧바로 몸을 뒤집어 배를 드러내며 애교작렬이다! 덕분에 난 생전 처음으로 낯선 고양이와 접촉할 수 있었다!! 쓰다듬으면서 느낄 때의 행복이란!!! 얼룩이는 무려 나를 포함한 사람들 주위를 떠돌고 몸을 부비며 친밀함을 표했다. 아아. 난 얼룩이를 쓰다듬은 후, 톰 소여가 좋아하는 이와 처음 악수했을 때처럼, 고양이를 쓰다듬은 손을 평생 씻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유치함을 발휘했다. 하하. 반면 가필드는 여전히 사람을 경계한다. 혹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물론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길고양이처럼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면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다. 그저 사람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얼룩이가 애교작렬이라면 가필드는 고양이 특유의 도도함이라고 불리는 것을 매우 잘 보여준다. 음식이나 고양이 간식을 줘도, 가필드는 사람이 너무 성급하게 다가가면 그냥 무시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얼룩이에겐 꾸준히 밥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 듯하다. 난 며칠 전에야 발견했지만, 고양이 음식 접시도 있다. 그리고 그곳에 고양이사료(비스켓처럼 생긴 거)를 주는 날도 있고, 쌀밥을 주는 날도 있다. 그 덕에 적어도 얼룩이는 살이 올랐고, 털 빛도 고와졌다고 한다. 사람에게 다가가는 걸 꺼리지 않는 얼룩이는, 그 덕에 적당한(그러나 고양이에게 적당한 음식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었으리라. 반면 가필드의 털 빛은 어떻게 변했을까? 아마도 얼룩이에게 주는 혹은 학교고양이들에게 주는 음식을 같이 먹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한 아이의 건강이 다른 아이의 건강에도 전염되어, 같이 건강해지지 않을까?

아무려나 추측컨데 고양이의 음식을 챙겨 주는 사람은 한 명은 아닌 듯하다. 처음엔 한 명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음식접시를 챙긴 사람은 한 명이었을 테다. 그리고 그곳에 물과 밥을 준 사람도 한 명이었을 테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사람이 챙기는 밥 외에도 시중에 파는 사료를 챙기는 사람, 고양이 간식을 챙기는 사람이 생겨나고 있다. 그저 이런 일이 일시에 중단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다른 사람이 챙길 거라고 믿는 순간, 누구도 챙기지 않는 일이 생기니까. 일정한 조공(!)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학교고양이에게 조공의 중단은 매우 위험한 일일 수 있으니까.

난 아직은 간식거리(포로 만든 간식) 정도만 가끔 챙기는 1人이다. 12월 중순이 지나서도 내가 학교를 드나든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그저 처음 접시를 가져다 둔 사람이 꾸준히 음식을 챙겨주길 바랄 뿐이다. 내가 가끔 간식을 주는 건, 고양이에게 조공을 받치는 것이기도 하지만, 처음 접시를 가져다 놓고, 밥을 주기 시작한 사람을 지지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이것이 중요하다. 혼자가 아니란 걸 깨닫는 것,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기에 서로를 독려하고 격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03
어제 밤, 집 근처에 가만히 서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며칠 전 나타났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리카가 나왔다. 온전히 리카에게만 신경을 쓰며 기다렸지만, 리카는 돌연 나타났다. 흰색에 갈색과 고등색, 검은색이 예쁘게 어울리는 길냥이, 리카. 나는 잠깐 놀랐고, 놀람은 곧 기쁨으로 설렘으로 변했다. 리카는 소리없이 나타나선 잠시 멈춰 나를 보았다. 우리는 눈을 마주쳤다. 리카는 다시 사뿐한 걸음으로 자동차 밑으로 들어갔다. 나는 자동차를 지나 낮은 담을 뛰어넘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리카는 자동차 밑으로 들어가선 내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으로 나와선 멈췄다. 앞발을 세우고 앉은 자세를 취했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곧 깨달았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리카는 움직이지 않고 나를 보았다. 나는 다시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리카는 만족스러운 듯, 자동차 밑에서 나와 낮은 담을 돌아 지나갔다. 그러곤 ‘그곳’으로 갔다. 나는 매우 조용히, 조심스럽게 세 걸음 앞으로 나갔다. ‘그곳’에 리카가 있었다. 리카는 나를 등지고 있다가 뒤돌아 보았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라고 내가 우기는 거다;;). 나는 손을 흔들고 인사를 하고선 玄牝으로 들어갔다.

오늘 아침에도 리카와 마주쳤다. 평소 아침에 만나는 일은 드물어 기뻤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는 멈췄다. 리카가 안심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기. 사람이건 고양이건, 모든 생명과 존재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가만 서있었다. 하지만 그 거리가 리카에겐 불편했나 보다. 리카는 얼른 자동차 아래로 들어갔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리카를 보았다. 리카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두근거림으로 한참을 마주보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동차의 다른 쪽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쪼그리고 앉았다. 리카는 나를 정면으로 볼 수 있게 몸을 틀어 나를 보았다.

리카는 나를 기억할까? 알 수 없다. 눈이 마주친 건, 나 혼자의 착각일 수도 있다. 리카는 나를 경계하며 언제든 도망갈 수 있게 준비하는 건지도 모른다. 리카에게 난 그저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인지도 모른다. 괜찮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일방적으로 구애하는 이와 경계와 거리를 유지하며 바라보는 걸 허락해주는 이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그리고 매일 비슷한 시간, ‘그곳’에서 만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2009/11/28 11:16 2009/11/28 11:16
진부한 표현을 빌리면,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구글웨이브(Google Wave) 초대장이 왔다. (구글웨이브 소개글은 여기, 사용관련 소개는 여기 그 외에도 검색하면 관련 내용을 쉽게 찾을 수 있을 듯.) 처음 구글웨이브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 신청을 했고, 지난 9월 말부터 구글웨이브 측에서 초대장을 배포하기 시작했다. 초대신청서에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줄 사람, 적당히 피드백 할 사람, 그냥 즐길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었고, 난 ‘그냥 즐길 사람’을 표시했다. 그래서인지 배포 초기에 초대장이 안 와도 놀라진 않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 안 와서 포기할까 했는데, 어제 밤 초대장이 도착했다!! 으하하.

그래서 얼른 계정을 생성했는데. 흠. 그간의 소문처럼 구글웨이브는 결코 혼자 노는 걸 좋아하는 나 같은 인간이 좋아할 서비스가 아니다. 철저하게 협업을 위한 서비스다. 즉, 특정 문서를 공동으로 작성할 필요가 있거나 게시판을 만들어 낙서하면서 놀기에 매우 유용한 서비스란 것.

예전에 누군가와 문서를 하나 만들어야 했는데, 그땐 구글독스(Google Docs)를 사용했다. 일단 내가 글을 쓰고 저장하면 상대편이 확인하고 수정해서 다시 저장하면 내가 그걸 보고 다시 고치는 식이었다. 자동저장 기능이 있다고 해도 글을 수정하고 나면 저장해야 상대방이 수정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금 불편했다. 헌데 구글웨이브는 이런 점에서 매우 유용할 듯. 몇 초 간극으로 동기화하여 내가 수정한 내용과 쓰고 있는 내용을 상대방은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고, 수정할 수도 있다. 그러니 문서를 작성해야 하는 회의나 모임에선 매우 유용할 듯.

하지만 이메일과 RSS리더 기능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건 매우 아쉽다. 2009년에야 비로소 이메일이란 서비스를 만든다면 어떤 형태일까란 상상에서 구글웨이브를 만들었다는 말에, 구글웨이브 안에서 이메일을 사용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더라. 현재로선 문서협업 도구에 가깝다. 초대에 의해서만 사용할 수 있고, 아직은 시작 단계니까, 더 기다리고 더 사용하면 어떤 효용이 있을지 확인할 수 있을 듯. 아직은 초기라는 것이 중요.
(어쩌면 이메일을 '소식주고받기+문서협업도구+서로 심심할 때 낙서하며 놀기'로 재정의한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필요한 분들에게 초대장을 드릴게요. 하지만 이미 알고 지내는 분들에게만 배포하겠습니다(이미 댓글로 소통을 한 적이 있는 분들에게만 배포한다는 얘기). 공유 및 협업 시스템이라 아무래도 이미 알고 있는 분들에게 드리는 게 좋을 듯해서요. 즉, 구글웨이브 초대장으로 검색해서 들어오신 분들은 참아주세요. :) 공개건 비공개건 지메일 주소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5분께 초대장 드릴게요.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지나면 구글웨이브에서 초대장을 보낸다고 하고요.

+
구글웨이브 관련 검색하다 찾은 재밌는 포스팅. http://bit.ly/3lRUn4 무려 과반수가 로그인하고선 그냥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는 말에 완전 공감. 같이 놀 친구가 없는 현재, 사용자가 매우 적은 현재의 문제점이랄까. 웹에서 놀기 좋아하는 친구가 대여섯 명만 있다면 구글웨이브는 무척 즐거운 서비스일 거 같다. 메신저를 즐겨 사용한다면 훨씬 재밌는 서비스가 될 거 같고. 하지만 지금은 그저 멍때릴 뿐~ 흐흐. 최종 투표결과는 http://bit.ly/iEbEY
2009/11/25 11:25 2009/11/25 11:25
01
어제 블로그 관리창을 확인하다, 이제까지의 댓글이 총 5000개를 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5,000번째 댓글은 누가 달았을까, 싶어 확인하니 지구인 님이었다! 마침 같은 곳에 있어 그 자리에서 고마움을 표했다. 뭐라도 선물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인데 …. 구할 수 있다면 대충 찍은 건 있다. 하지만 구할 수 있을지가 관건. 아무려나 나중에 5,555번째 댓글을 쓰는 분께는 그럴 듯한 선물이라도 할까? 하하. 문제는 나의 답글도 모두 포함하기에, 자칫 내가 5,555번째 댓글을 쓸 수도 있다는 것.

사실 방문자수로 뭔가를 하고 싶었다. 숫자도 정했는데, 어제 관리창을 확인하니 이미 훌쩍 넘었더라. 하고 싶었던 숫자는 10만 명, 50만 명, 100만 명 같은 숫자가 아니라, 같은 숫자의 연속. 가장 멋진 경우는 아마도 댓글 5,555에 방문자 555,555명을 동시에 찍는 경우일까? 하하. 하지만 방문자를 이렇게 찍으려면 1년도 더 지나야 가능하다. 아무려나, 몇 명 기념 오프라인 모임을 한다고 제안해도 사람들이 모일 것 같지 않은 이 블로그에서 고마움을 표현하는 방법은 이런 방법 뿐이다. 하하.

아무려나 이곳에 방문하고 댓글 달아준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

02
내가 가진 책들부터 시작해서 여러 사람의 책을 모은, 작은 도서관 혹은 무상도서대여점 같은 걸 만들고 싶은 바람이 있다. 내가 가진 책 중 어떤 책은 특정 주제로 계속 공부를 하는 이상 소장하고 있어야 하지만 어떤 책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추리소설을 비롯한 장르소설의 경우, 적은 수를 제외하면 굳이 소장할 필요가 없는 책들이 대다수. 하지만 또 그냥 배포하기엔 아쉽다. 그래서 책을 깨끗하게 읽는 제한된 범위의 사람들과 책을 대출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는다.

예를 들어, 난 미야베 미유키 소설을 무척 좋아해서 가급적 소장하려고 한다. 하지만 미야베의 책 중에서 다시 읽을 책은 그리 많지 않으면서도 소장하고 싶지 누군가에게 주고 싶지는 않다. 이때 만약, 내 책을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주고, 나 역시 굳이 사고 싶진 않지만 한번 읽어는 보고 싶은 책을 빌려 읽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고민을 한다. 이걸 작은도서관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 딱히 누가 지키고 있지 않아도, 어떤 조합처럼 특정 공간에 책을 두면 알아서 빌려가고 알아서 갖다 놓는 시스템. 전공서적처럼 내놓을 수 없거나 공유하기 애매한 책도 있지만, 소장하고 있으나 공유할 수 있는 책도 있을 터. 그렇다면 공유할 수 있는 책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작은 사무실 같은 곳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문제는 사무실을 마련할 돈이 없다는 것! 하하. 10평 정도의 크기에 벽엔 책장으로 채우고, 가운데 의자 두어 개만 있으면 무난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 사무실을 마련할 돈이 없다! 관리비는 어떻게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도서관처럼 신분증을 제시하고 대출증을 만드는 시스템도 좋지만, 그냥 아는 사람들끼리, 취향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 꿈. 요즘 꾸고 있는 꿈 중 하나다.

2009/11/25 11:16 2009/11/25 11:16
방값을 알아 볼 겸, 다른 일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어제 이태원에 갔습니다.
부동산에 가서 그냥 집값을 물었는데요.
평당 오천만 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싼 곳이 평당 이천만 원이라고 합니다. ... 허억.
전 제 집의 보증금이면 집 한 평은 살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런데 한 평도 못 사는 군요. 흑흑.
시세를 확인하니 기본 보증금에 월세가 대충 나오죠. 만약 10평인 방을 구한다면 전세로 못해도 이천만 원에서 칠, 팔천만 원이 필요하고 월세로 구한다면 음... 그냥 계산하지 않으렵니다. ㅠ_ㅠ
이태원에서 살기로 한 계획은 포기해야 하는 걸까요? 흑흑.
2009/11/24 10:59 2009/11/24 10:59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2009.11.22.일. 12:10. 아트레온 9관 11층 G-10

지난 토요일 쓴 것처럼, 영화관에 갔습니다. 이 영화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 할 말이 없습니다. ㅠ_ㅠ 오락영화로서 재밌습니다. 문제는 그냥 가볍게 즐길 수 없는 영화란 거죠. 일테면 [디스트릭트 9]은 가벼운 오락영화로도 재밌지만, 정치적인 해석에서도 꽤나 유쾌합니다. 그런데 [바스터즈]는 오락영화로 재밌는데, 정치적인 해석에선 꽤나 불편합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란 제목의 영화가 있었던 거 같은데, 비교할 바 아니긴 하고요. 영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도대체 왜 저런 제목을 선택한 건지 알 수 없는 영화라면, [바스타즈]는 시종일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입니다. 그리고 매우 잘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란 정치학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데 있는 거죠.

나치군을 처단하려는 미국 군대 “바스타즈”는 프랑스 지역 나치군을 전멸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누구 한 명 살려두지 않죠. 하지만 예외로 살려 둘 땐 이마에 나치표식을 새깁니다. 바로 이 부분이 불편함의 핵심이죠. 이마에 나치표식을 새기는 건, 나치가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혹은 변태)에게 표식을 새긴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울려 트랜스젠더 관련 기사마다 빠지지 않고 달리는 댓글, “트랜스젠더들은 이마에 표시를 새겨서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트랜스젠더인 걸 모르고 연애를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와 다르지 않은 정치학이고요.

감독은 아마, 신우파가 득세하는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지배질서로 자리하고 있는 이 시대에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표시 남기기라면, 그건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처럼 변할 수 있는 힘을 전면 부정하고 개인을 특정 시기에 고착시킬 뿐이란 점에서 동의하기 힘들어요. 과거를 반성하는 건 당연하지만, 한국의 친일파와 같은 행각은 매우 곤란하지만, 하지만 그것이 몸에 낙인을 새기고 전시하는 방식이라면 … 글쎄요. 선뜻 동의하기 힘듭니다. 이런 방식은 결국, 한 사회의 비규범적인 존재들을 낙인 찍는 방식으로 재생산될 테니까요.

아무려나, 이 영화, 잘 만든 영화이긴 합니다. 영화 초반이 후반보다 더 재밌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요. 흐흐.
2009/11/24 10:54 2009/11/24 10:54
왜 가끔은 내 안의 무수히 많은 언어들이 다 어디갔나, 싶을 때가 있죠. 다들 경험하셨겠지만요. 무언가를 쓰고 싶지만, 무엇하나 주절거리기에 부족한 내용들이라 무언가를 쓰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고민들의 조각들을 늘어놓는 수밖에 ….

전 요즘 길고양이들은 겨울을 어떻게 보내나, 하는 고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추운 겨울, 길고양이들에게 겨울은 어떤 풍경일까요? 집에서 사는 것이 익숙한 저에겐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죠. 찬 바람이 쌩쌩 불고 때로 겨울비와 눈이 내리는 밤, 고양이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걸까요?

혹은 트랜스젠더 강의는 어떻게 해야 ‘쉬울까’를 고민합니다. 사실 전 트랜스젠더 특강 가서 트랜스젠더에 관한 얘기는 거의 안 합니다. 사람들은 트랜스젠더의 어려움을 듣고 싶어하지만, 저는 젠더 경험에 초점을 맞추죠. 그리고 비트랜스의 젠더경험과 트랜스젠더의 젠더경험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고 애씁니다. 아무래도 초보 강사니 여러 강의안을 만드는데요. 최근 ‘딱 학부생용이다’ 싶은 강의안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 정도 그 강의안을 바탕으로 강의를 했는데요. 최근 특강을 들으신 선생님(저를 특강으로 초대한 선생님이기도 하죠)께서 말하길, 학부생이 듣기엔 너무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헉. ㅜ_ㅜ 그래서 혹시나 하고 “그럼 대학원생이 듣기엔 어떨까요?”라고 물었더니, 대학원생(아마도 여성학/젠더이론 전공일) 정도면 무난하겠다고 답하셨죠. 우허엉. ㅠ_ㅠ 며칠 전 특강의 수강생들의 감상문을 받았는데요. 어렵다는 말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너무 많은 내용을 말해서 초점을 모르겠다는 말도 있고요. 이건 모두 중요한 지적입니다. 가장 정확한 지적은 강사님은 강의를 많이 안 하신 듯해요, 란 논평이었습니다. 매우 고마운 논평이죠. 초보 배우는 무대에서 발걸음부터 어색하다고 했나요? 저런 논평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겁니다. 아무려나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트랜스젠더의 경험과 비트랜스의 경험을 분리하지 않는 강좌를 쉽게 하기. 이 고민을 하며, 저는 ㅎ님을 스토킹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갈 수 있는 시간대면 ㅎ님 강좌를 따라 다니기로 한 거죠. 하하. 스토킹하겠다고 말했는데 특강 일정을 알려주는 경우도 스토킹인지는 애매하지만…. 암튼 열심히 배워야죠. :)

다른 한편, 자신의 권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이를테면 제가 트랜스젠더 이슈로 특강을 할 수 있는 건, 제가 가진 어떤 권력 때문이죠.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는 매우 많고, 트랜스젠더 연구를 전공한 사람은 저 외에도 여럿 있고, 트랜스젠더 이슈로 특강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여럿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저보다 강의를 더 잘하고, 글도 더 잘 씁니다. 그럼에도 제가 한다는 건 제가 가진 어떤 특권적 자원과 떼려야 뗄 수 없겠죠. 이것이 제가 가진 권력이라면, 어쨌든 이것이 권력이라면,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 해야 겠죠. 한땐 권력을 전면 부정한 시기도 있습니다. 권력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이해한 시기도 있고요. 하지만 권력이 맥락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저에게 활용할 만한 권력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적절히 활용할 것인가? 즉, 미약하나마 어떤 권력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힘으로 전환할 것인가, 이것이 관건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암튼 내일은 극장에라도 갈까 봐요. 선택할 만한 영화가 없어 고민이지만요. 그리고 무척 피곤해서 늦은 밤이지만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시간입니다.
2009/11/21 22:27 2009/11/21 22:27
뮤즈(Muse)가 내년 초에 내한한다고 합니다. 이미 철지난 소식이지요. 네. 철지난 소식을 이제야 말합니다. 뮤즈가 내한하면 무조건 가겠다고 말했던 전례에 비추면 저의 시큰둥한 반응이 의외일까요? 전 뮤즈가 내한한다는 소식을 매우 늦게 접했습니다. 그런데 별로 흥분이 안 되더군요. 갈까, 말까를 망설일 정도였습니다. 공연예매는 어제 저녁 6시였지만, 그 시간에 전 컴퓨터 앞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몇 해 전, 뮤즈가 내한할 때 그토록 흥분한 저는 어디갔을까요? 예전같았으면 알바하는 곳에서 어떻게든 예매를 하려고 했겠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무려 알바가 끝나고 웹에 접속했을 때도 예매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시큰둥한 반응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무려나 오늘 아침에도 오전에도 저는 예매하지 않았습니다. 무려, 갈까 말까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뮤즈가 내한하면 무조건 간다고 호언장담하던 저인데, 무려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네. 저는 망설였고, 알바시간을 감안하여 가기 힘들겠다고 중얼거렸습니다. 아무튼 그랬습니다.

하지만 오늘 오후 어느 햇살이 눈부시던 시간, 저의 핸드폰에 예매번호를 알려주는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결코 제가 예매한 거 아닙니다. 올앳카드를 충전하고, 예매사이트에 접속하고, 잊어버린 아이디를 찾고, 스탠딩 석을 선택하고, 카드결제를 했습니다만, 결코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그냥 어느 순간 모든 게 되어있었습니다. 수동태로 적어야 합니다. 제가 한 게 아닙니다. 뭔가가 순식간에 되어있었습니다. 네, 뭐, 이런 거죠. 이런 겁니다. 결코 제가 한 게 아니라, 그냥 제 안의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와선 제멋대로 한 겁니다. 믿어주세요. 결코 제가 한 게 아니란 걸. 구차한 변명이란 거 압니다. 하지만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 걸요. 햇살이 좋았다고 치죠. 암튼 전 그냥 결제했을 뿐입니다.

결론은 올해 두 번째 지름신이 왕림했다는 거죠. 하지만 행복합니다. :)
2009/11/20 21:39 2009/11/20 21:39
간절함에서 평이함으로, 다시 무뎌짐으로 그리하여 잊혀짐으로.
세월의 힘은 때로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반짝인다.
2009/11/18 22:14 2009/11/18 22:14
한 분야에서 10년이면 달인이 되는 게 아니라, 그제야 비로소 초보를 면하는 거다. 그러니 조급함을 느끼지 말고, 그냥 묵묵히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는 것.
(그러데 생계는?)

책방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모두 책을 많이 읽는 건 아니다. 하지만 손님들은 책방에서 일하는 사람은 책을 많이 읽거나, 모든 책을 다 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책을 많이 읽는 점원도 있고, 거의 모든 책을 다 아는 점원도 있다. 하지만 난 아니다. 난 부끄럽게도 가끔 책을 읽고, 내가 아는 책은 매우 적다. 그래서 손님들이 얘기하는 책의 대부분을 귀설어 한다. 그러니 내가 매우 당황하는 경우는, 책을 추천해달라고 할 때. 으헉. ㅡ_ㅡ;; 내가 가급적 하지 않은 일은 무언가를 추천하는 거고, 그 중에서도 음악과 책은 어지간해선 추천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거니와, 내가 무언가를 추천할 정도로 아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경우, “저도 잘 몰라서요….”라고 얼버무리거나, “책은 추천하는 게 아니라서요.”라고 단호하게 거절한다.
(드물게 추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상황과 자리가 추천해야만 할 때 뿐이다.)

혹시 이곳에 들르는 분들은 이런 경우 어떻게 하나요?

암튼 책을 읽은 역사를 더듬으면 10년은 족히 지났다. 10년이라니. 20년은 안 되지만, 독서의 역사가 얼추 20년에 가깝다. (넘었나? ;;; ) 그런데도 난 아직 책을 잘 모르겠고, 모르는 책이 잔뜩이다. 지금 나의 단계는 출판사의 홍보문구에 덜 낚이는 정도. 때때로 광고문구엔 혹한다. 물론 베스트셀러에 낚이는 경우는 없지만. 내게 베스트셀러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이다. 딱 이정도다. 10년이면 달인이 된다지만 내게 10년 혹은 얼추 20년의 세월은, 초보는 간신히 면했지만 여전히 이제 막 책을 읽기 시작한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할 뿐이다. 누군가에게 추천할 수 있는 책 목록을 고를 능력은 없지만, 내게 고양이 같은 책, 사과 같은 책, 김밥 같은 책, 육류 같은 책을 구분할 수는 있는 정도. 딱 이정도다.

그러니 10년이면 달인 혹은 전문가가 된다는 말에서 10년은 그냥 숫자일 뿐이다. 나처럼 더디고 무딘 인간은, 20년은 더 파야 할 거 같다. 아니 30년은 파야 간신히 뭐라도 중얼거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강의를 할 때마다, 글을 기고 할 때마다 자학한다. “아직 강의를 하고, 글을 쓸 단계가 아닌데…”라며. 하지만 강의도, 글도 최소한 10년이 지나야 내공이 쌓이니 이래저래 한참 멀었다.

내일이 걱정이다. 으흑.
2009/11/18 21:47 2009/11/18 21:47
2009 LGBT인권포럼을 합니다.
많은 참가 바라요. :)

주최: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www.lgbtact.org)
일시: 2009년 11월 21일 토요일 13:00-
장소: 이화여대 ECC155호(Gate2)

13:00- 등록
13:30- 전체마당: 포럼소개, 인사나누기
14:00- 그룹토론1: 지역에 기반한 LGBT 운동의 가능성과 전망
          그룹토론2: 청소년 성수수자 운동 어디로 가야할까?
16:30- 전체토론: 성소수자 정치를 만나다.


2009/11/17 21:16 2009/11/17 21:16
無學文盲. 무학문맹.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사이트(http://bit.ly/36yLNT)에 따르면 “배우지 못하여 글을 읽지 못함. 또는 그런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유학(有學)은 “불교의 진리를 인식하였으나 아직 번뇌를 다 끊지 못하여 항상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닦는 성문(聲聞).” 즉, 유학은 아직도 배울 것이 있는 상태란 뜻이다. 그렇다면 무학문맹은 이제는 배울 것이 없어 자구에 얽매이지 않는 상태를 뜻하는 건지도 모른다.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라는 어느 선사의 말처럼.

나는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선, 문자를 읽지 않고선 세상과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책을 읽는다. 나는 책을 읽어야 간신히 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 책을 통해서야 비로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책이 없으면, 문자에, 자구에 얽매이지 않으면 세상을 이해할 수 없는 종족. 언제나 문자에 갇혀, 문자 이상을 이해할 수 없는 무지의 꼭대기에 머무는 종족. 책을 읽지 않으면 불안해서 언제나 손에 책을 들고 다니며 책 속으로 숨어드는 갯강구. 재빠르게 문자 속으로 숨었다가 인기척이 사라지면 더듬이로 눈치를 살피며 바깥으로 나와 우쭐거린다.

책은 내가 얻은 가장 완벽한 보호막인지도 모른다. 나와 당신의 거리를 더 이상 좁힐 수 없도록 하는 완벽한 벽이기도 하다.

겨울이 왔다. 피아노 소리가 사랑스러운 겨울이 왔다. 책 속으로 숨어들어, 더듬이를 잘라 버리고 지내도 괜찮은 겨울이 왔다.
2009/11/15 21:43 2009/11/15 21:43
한 선생님과 통화를 하다가 선생님께서 "이번 주는 '지옥의 한 철'이다"란 말을 하셨다. 그 말에 나와 선생님은 박장대소를 하며 한참을 웃었다. 하지만 '지옥의 한 철'은 이미 지난 주부터였다. 그저 이번 주는 정점을 찍고 있을 뿐.
토요일에 공개적인 행사는 학술대회 하나. 하지만 내가 준비해야 하는 행사는 공개적인 학술대회를 포함 다섯 개.
다른 시기라면 학술대회를 제외한 네 개는 각각 하나만 준비하는데도 일주일 정도의 여유를 두고 사나흘은 준비를 해야 간신히 준비할 수 있는 일들. 그러나 이런 일들이 하루에 모두! 음하하. 저는 살아 남을 수 있을까요? 후훗.
아무려나 정말이지 최근 몇 주는 '지옥에서 보낸 한 철'로 기억되리라.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지만 결코 발설할 수 없는 이슈들 뿐인 안타까운 나날.

하지만 토요일이 지나면 인수인계만 준비하면 된다! 이히히.
2009/11/11 21:17 2009/11/11 21:17
01
평소 커피를 마신다면 아메리카노를 마시지만(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하고;; ), 가끔 에스프레소를 마십니다. 아메리카노보다 에스프레소를 더 좋아하지만 에스프레소는 양이 너무 적어서;; 오랜 시간 커피를 즐기고 싶어 양 많은 아메리카노를 마신달까요. 하하. ;;; 물론 커피콩을 제대로 보관하지 않은 가게에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간 무척 괴로우니 조심하는 점도 있고요.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면 시럽 첨가를 싫어하지만(물론 맛없는 커피라면 시럽을 첨가합니다;;) 에스프레소를 마실 때면 설탕을 부어 바닥에 녹여 먹는 걸 좋아합니다. 이때 중요한 건 스푼으로 휘젓지 않는 것! 설탕 탄 에스프레소를 마시려는 게 아니니까요. 뜨거운 바닥에 가라앉은 설탕을 녹여 커피사탕처럼 만들어 먹으려는 거니까요. 그래서 전 뜨겁지 않은 에스프레소를 싫어합니다.

어제 늦은 밤, ㅈ님과 할 얘기가 있어 카페에 갔다가 에스프레소를 주문했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약간의 카페인이 필요했거든요. 너무 피곤한 날엔 그냥 잠드는 것보다 약간의 카페인을 섭취하는 게 도움이 되니까요. 그래서 커피 중에서 카페인이 가장 적다고 하는 에스프레소를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 에스프레소가 미지근하고 싱거워!! -_-;; 아, 물론 아메리카노보다야 진하겠지만, 에스프레소에 기대하는 농도가 있잖아요. 하지만 어제 마신 에스프레소는 분명 에스프레소이긴 한데, 뭔가 물에 희석한 느낌이 들 정도로 싱겁더군요. 쓴 느낌이 안 드는 건 아닌데 뭔가 밍밍한 느낌이랄까요. 뭔가 안타까웠습니다. 그래도 ㅈ님과의 얘기가 대충 끝날 때까지, 영업시간이 지났음에도 별 말 없이 기다려 준 건 고마웠고요. :)

02
휴식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하지만 이번 주까지는 그럴 수가 없어 안타깝습니다.

03
내 안의 분노 혹은 적의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와 얘기치 않은 사람을 푹, 찌르는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2009/11/10 13:18 2009/11/10 13:18
[디스트릭트 9] 2009.11.07. 토. 09:40. 아트레온 5관 7층 D-5

01
형식과 내용에 있어, 상당히 만족스러운 영화다. [렛 미 인]이나 [레이첼 결혼하다]와 같은 영화가 있어, [디스트릭트 9]을 올해 최고로 꼽을 순 없지만, 그래도 매우 잘 만들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비규범적인 존재나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를 다룬 영화라고 설명한 듯하여 내가 다시 한 번 말을 보탤 필요는 없을 듯. 짧게만 언급하면, 영화 초반에 “외국인도 아니고 외계인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이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몇 주 전 [시사인]  커버스토리에서 대한민국 평균의 인식을 다뤘다. 그때 나온 질문 중 “자식이 외국인과 결혼한다면?”과 “자식이나 친구가 동성애자라면?”이 있었다. 5명의 대답을 요약하면, ‘외국인은 괜찮아도 동성애자는 안 돼!’ 였다. [디스트릭트 9]에 대입하면 동성애자는 외계인인 걸까?

한국사회에서 ‘이방/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외계인(“프론”)에게 감정이입하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주인공의 몸 변형 과정은 화학적 거세와 성전환 과정을 연상케 한다. 혹은 유전자 변형 식품을 향한 납득하기 힘든 공포를 연상케도 한다. 영화 전체는 철거, 이주, 계급, 인종 등의 이슈를 노골적으로 연상케 한다. 만약 한국 감독이 한국에서 만들었다면, 이 영화는 현재의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삼은 풍자와 블랙코미디로 분석되었을 터. 극장 상영 자체가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어느 기사에서, 이 영화가 남아공의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삼았다고 한다.



02
#이제부터 스포일러 있음!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바커스는 외계 유동액으로 유전자 변이를 일으켜 몸이 서서히 외계인으로 변해간다. 바커스가 일하는 곳인 MNU는 일종의 국제기구이자 세계 2대 군수업체다. MNU가 노리는 건, 외계인들의 무기. 하지만 외계인들의 무기는 모두 외계인의 DNA에만 반응하고 작동하기에 지구의 인간들은 사용할 수가 없다. 근데 유전자 변이를 일으킨 바커스가 외계인의 무기를 작동시킬 수 있자, 이 기회를 놓칠 MNU가 아니다. MNU는 바커스의 몸을 생체실험용으로 사용하려고 한다. 간신히(혹은 당연히?) 도망친 바커스는 외계인 거주지 디스트릭트 9에 숨어들고 그곳에서 크리스토퍼를 만난다. 크리스토퍼는 아마도 외계 비행선 조종사인 듯. 암튼 크리스토퍼는 바커스에게, 유동액에 따른 유전자 변이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해주고, 당장이라도 고쳐줄 것처럼 말한다. 문제는 어떤 기회로(영화에 잘 나옴;;) 자신의 동료들이 생체실험 대상이자 해부학 대상으로 사용됨을 알고선, 분노하여 바커스 치료보다 고향으로 돌아가 군대를 끌고 오는 일을 우선하겠다고 말한다. 고향에 갔다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온 3년 뒤에 바커스를 치료해주겠다고 말하는 것. 하지만 바커스는 사랑하는 자신의 아내를 당장 만나야 하기에 고향 크리스토퍼가 고향 가지 전에 먼제 치료부터 해달라고 요구하는데.

뭐, 예상할 수 있듯, 고난을 함께 겪은 이들의 ‘우정’으로 3년 뒤에 돌아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크리스토퍼는 고향으로 간다(이 ‘우정’은 이 영화에서 가장 생뚱맞고 재미없었던 부분 중 하나, 난 적어도 이 영화라면 다르게 이야기를 풀어갈 줄 알았다). 그리고 지구에 남은 바커스. 3년 뒤에 크리스토퍼가 돌아올지 돌아오지 않을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바커스는 외계인과 같은 외모로 변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거주지역 디스트릭트 10에 머무는데.

#스포일러 끝.

03
난 영화 마지막 부분에 주목했다.

자신의 의지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그저 3년이란 확신할 수 없는 약속만 믿고 기다려야 하는 바커스의 삶이 사랑의 형벌 혹은 사랑이라는 유형(流刑)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갈 수도 없고, 찾아갈 수도 없는 상태. 서로를 사랑하는 상황이지만, 바커스의 아내 사라는 바커스의 생사 여부 자체를 모르고, 바커스는 결코 사라에게 다가갈 수 없다. 외계인의 몸으로 변한 바커스는 새 이주지역, 하지만 사실상 구금지역 디스트릭스 10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곳을 벗어난다는 건, 언제든 지구인들의 구타와 폭력, 혹은 거주지 이탈에 따른 위반 행위로 즉결 처분도 가능한 위험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행여나 다른 사람 몰래 바커스가 사라를 찾아간다고 해도 그것은 위험하다.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이 사람에게 다가갔을 때, 괴물의 외모만으로 사람들이 경악하고 악마로 취급했던 것처럼, 사라 역시 그러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바커스의 변한 외모는 사라가 전혀 모르는 바커스다. 사라의 맥락에서 외계인 형상의 바커스는 바커스가 아니다. 그러니 차라리 3년이란 막연한 세월을 견디는 수밖에. 마지막 통화에서 서로 기다리겠다고,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사랑의 약속은 언제나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같이 한 다짐이어도, 어느 한 쪽이 깰 가능성이 너무 크단 점에서 사랑의 약속은 일방적인 다짐이다.

“나를 기다려 주세요” “우리 꼭 다시 만나”란 말은 창살 없는 감옥이자, 자기 스스로에게 구형하는 무기징역의 형벌이다. 스스로 그 구형을 거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지 않는 이상 평생 갇혀 지낼 수밖에 없는, 언어의 감옥. 바커스는 바로 이런 감옥에 갇혀 지내고 있다. 그가 풀려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3년 뒤 크리스토퍼가 돌아와서 바커스를 치료하는 것. 하지만 이것은 바커스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막연한 기다림이다. 이 기다림은 평생 지속될 수도 있다. 영원한 이별일 수도 있고, 기간 한정 이별일 수도 있는 불안정한 상황.

그리고 3년이면 사랑이 변하고, 또 변할 수도 있는 시간이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실한 기약 없는 상황에서,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3년이란 세월은 사랑의 감정을 유지할 수도 있겠지만, 얼마든지 사랑이 끝날 수도 있는 시간이다. 헤어지는 과정 자체가 워낙 극적이라 그 감정을 유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사랑의 감정을 냉동보관한 건지, 극적인 상황 자체를 기억하는 건지 확실하지 않다. 무엇보다 바커스와 사라는 서로 너무 다른 상황에 있다. 사라는 바커스의 생사여부를 모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연애와 사랑이 가능한 곳에 머물고 있다. 외계인 혐오증이 있는 바커스는 외계인의 몸으로 변한 상태에서 사라만 그리워하며 외계인 거주지역에 머물러 있다. 바커스는 사라를 죽을 때까지 그리워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사라도 그럴까? 3년 뒤 크로스토퍼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그때도 사라는 바커스를 기다릴 수 있을까? 그리고 바커스는 어떤 감정으로 사라를 기다릴까? 그때도 여전히 사랑이라는 말로 감정을 포장한다면, 어떤 모습의 사랑일까?

이 불우한 사랑의 끝은 어떤 모습일까? 이루고 싶어도, 서로가 서로를 바라고 있어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결말은 어떤 모습일까?

... 나는 이런 상상을 하고 있었다.

2009/11/08 12:51 2009/11/08 12:51
강의 일정 및 장소 확정 파일입니다. :)

제1차 유섹인 섹슈얼리티 강좌

제목 : 십대 섹슈얼리티 전문강사 워크샵 : 십대의 섹슈얼리티를 배우다
기획 : 유섹인(유쾌한섹슈얼리티인권센터 Pleasure, Danger and Empowering Center)
후원 : 도서출판 동녁, 안세M치과
대상 : 십대 교육 관련자, 쉼터 관리자. 교사, 성교육강사 등
일시 : 11월 9일 - 12월 7일 매주 월요일 7시~10시
장소 : 서강대학교 마테오관 201호
수강료 : 12만원(유섹인 회원 10%할인)
*임금계좌: 우리은행 1005-001-549121 예금주: 유쾌한섹슈얼리티인권센터

"십대/섹슈얼리티 전문가들과 십대 섹슈얼리티 상담의 실천 방향을 찾아봅니다"

1강 11월 9일 십대의 섹슈얼리티 통제와 보호 : 예스, 노우, 그리고 탈주?!(변혜정)
2강 티켓다방 십대여성의 일, 놀이, 문화(김주희)

3강 16일 모바일 테크놀로지, 그리고 진동하는 십대(김예란))
4강 미디어에서의 십대 섹슈얼리티 재현(손희정)

5강 23일 조기모성과 십대여성의 섹슈얼리티(서정애)
6강 십대의 성폭력피해의미와 성문화(변혜정)

7강 30일 소년원(구금시설)에서의 십대여성의 섹슈얼리티(황선희)
8강 신촌지역에서 만난 십대이반의 섹슈얼리티(잘해보지)

9강 12월 7일 민/관의 섹슈얼리티 교육과 십대의 만남(박현이, 최자은, 김민혜정)
10강 종합토론(성적자기결정권과 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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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7 13:21 2009/11/07 13:21
01
어느 선생님께서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대로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죠. 술자리를 비롯하여 일상에서 성폭력을 빈번하게 행하면서도 진보연 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 행동하는대로 혹은 몸 가는대로 생각하기엔 너무 고통스러워서 생각대로 행동하고 싶은 건지도 모릅니다. 몸 가는대로 생각하고, 그렇게 마음을 놓아보내면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에 차마 몸 가는대로 할 수 없는 거죠. 하지만 또 알고 있죠. 결국 몸 가는대로 간다는 걸. 결국 삶이란 불을 너무 사랑하여 불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 같은 것일까요? 제 몸이 까맣게 타버린다는 걸 알면서도 날아드는 그런 ….

02
고종석 씨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문장에 반했습니다. 하지만 내용엔 불편한 구절이 적잖아요. 뭐, 어차피 문장을 읽으려고 책을 샀지, 내용을 읽으려고 산 건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잠들기 위해 누워선 몇 쪽을 읽는데 문장이 너무 좋아 잠드는 게 아쉬울 때가 많아요. 그래서 하루에 세 꼭지 정도만 읽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물론 부작용도 있습니다. 그의 문장을 읽고 나면 저의 문장이 너무 비루하여 어떻게 수습할 수 없는 감정에 빠진다는 거죠. ;ㅅ;

03
얼마 전 어느 고등학교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내세워 이슈가 되었죠. 교장은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주려고 했다나 어쨌다나. 요즘 전 그 교장이 특이할 것 없는, 매우 흔한 모습이라고 중얼거립니다. 학생 성적이 학교 평균에 안 좋은 영향을 주니 전학 가라는 교장, 두발이 교칙에 맞지 않다고 학생에게 욕을 하는 교장, 학교 발전 기금이란 명목의 돈을 안 냈다고 학생을 괴롭히는 교장  …. 따지고 보면 제가 경험한 교장들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내세운 교장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물론 모든 교장이 그렇진 않습니다. 일제교사 대신 체험학습을 신청한 학생들을 허가해줬다고 처벌을 받았지만 계속해서 체험학습을 허가하겠다는 교장도 있으니까요. 교장은 모두 나쁘다는 식의 일반론을 펼치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언론을 타는 부정적인 교장이 특이한 경우가 아니란 말을 하고 싶은 거겠죠. 제 글에서 결론이 생뚱맞은 것 역시 특이할 것 없다는 거 아시죠? ;;;

04
가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상하죠? 여타의 인쇄매체나 출판물보다 이곳, [Run To 루인]이란 블로그가 제게 더 큰 책임감을 요구합니다. 당연한 말이긴 하죠. 제가 직접 꾸려가는 곳이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곳에선 하기 힘든 말, 상당히 조심하는 말을 다른 매체에 기고하는 글에선 거리낌 없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매체 대부분은 이곳을 찾는 분의 수보다 더 많은 이들이 구독하는 매체인데도 그렇습니다. 이곳이 제겐 애증인 공간일 수도 있다는 의미일까요? 아, 애증의 공간은 맞아요. 하지만 이곳에선 종종 구체적인 표현을 할 수 없어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제가 글을 쓰는 공간이 이곳만이 아니란 점이죠. 네, 제가 글을 쓸 곳이 이곳 뿐이었다면 제 삶의 일부는 흔적을 남기지 못 하고, 제 몸 깊은 곳에 침잠하고 용해하여 형태를 못 가졌을 지도 모릅니다. 특정 시간에 기록해야만 의미가 있는 형태를 못 가져 예기치 않은 순간에 엉뚱한 모습으로 튀어나왔겠죠. 다행입니다. 이곳이 제가 흔적을 남길 유일한 공간이 아니어서.

아무려나 제 몸은, 제 몸의 일부는 여러 공간으로 흩어지고 하나로 통합할 수 없는 상태로 부유합니다. 거울에 비친 제 몸엔 꿰맨 자리와 땜질한 자리가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미쳐 꿰매지 못 한, 땜질하지 못 한 제 흔적들이, 제 몸의 일부들이 언제나 제 방에 둥실둥실, 저 허공 어딘가에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이 풍경. 아름다운 풍경.

05
하나의 일이 끝나고 있는 시간입니다. 전 결국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팔자도, 쉴 수 있는 팔자도 아니란 걸 깨닫고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제가 인복이 많다는 걸,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애쓰면 결국 저와 같은 혹은 비슷한 일을 하고 싶거나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 시간입니다.
2009/11/06 22:14 2009/11/06 22:14
빗방울이 떨어졌다. 안경의 렌즈에 맺혔다.
나는 눈물이 고인 줄 알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고 믿었다.
2009/11/04 21:43 2009/11/04 21:43
콜린스의 책 『흑인 페미니즘 사상』 리뷰를 쓰며 18년간 한국에서 미등록거주자로 살았지만 결국 ‘추방’된 미누 씨 이야기를 조금 썼습니다. 펜으로 쓴 초고 포함 총 5개의 교정본에선 남겼지만, 6번째 교정본에선 지웠습니다. 콜린스의 책과 매우 밀접한 이슈지만 제 글의 전체 주제와는 밀접하지 않을 수도 있어서요.

며칠 전 콜린스 관련 글에서, 책엔 트랜스젠더란 단어가 몇 번 나오지만 트랜스젠더 맥락에서 분석하진 않고 그저 단어만 몇 번 나올 뿐이란 지적을 했습니다.
사실 이건 바이/양성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일부러 바이/양성애의 부재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줄이라도 언급하면 어떤 식으로건 효과는 있겠죠. 하지만 전 그걸 ‘나 양성애/바이 이슈에도 관심있어서 이렇게 언급한다~’란 태도로 느낍니다. 적어도 저 자신에겐 이렇게 판단합니다. 9월에 쓴 이태원 관련 글에서도 바이/양성애를 언급할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내용은 트랜스젠더 범주로 분류할 수도 있는 이들에 관한 것인데 딱 한 곳에서 양성애/바이를 잠깐(한 줄 분량으로) 언급한다는 건, 마치 ‘나 바이도 언급했다~’란 쇼 같았죠. 제대로 분석할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분석범주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면 어설프게 언급하는 건 “언급하지 않았으니 은폐했다”는 식의 비난을 피하려는 과잉방어일 뿐이니까요. 단 한 번 언급하여 알리바이를 만들려는 어설픔이죠. 그리고 지금은, 한두 번 어설프게 언급하는 게 더 문제란 걸 배웠으니까요. 어설프게 한두 번 언급하는 건 말 그대로 타인을 자신의 지식 자랑, 정치적 올바름 자랑을 위한 악세사리로 동원하는 짓이니까요.

이런 이유로 미누 씨 이슈를 지웠습니다.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에요. 현재 한국사회의 이슈에서 콜린스의 책과 미누 씨 이슈는 상당히 시의적절하게 연결되니까요. 그리고 제 글을 읽는 이들은 누구나 미누 씨를 기대하거나 떠올릴 테니까요. 하지만 그저 서너 줄 정도, 전체에선 서너 번 정도 언급할 바엔 언급하지 않는 게 낫죠. 이런 언급은 ‘타자’를 ‘타자’로 확증하는 일이니까요.

아, 리뷰에 미누 씨 이야기를 뺏다는 변명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언젠가 이와 관련한 글을 쓰려고 계획했지만 항상 미루고 있었거든요. 그러다 오늘 다시 떠올라 쓰는 겁니다. 굳이 이번 리뷰가 아니어도, 미누 씨가 아니어도 이와 관련해서 쓸까 하다가 쓰지 않은 이슈는 상당하니까요.

그러고 보면, 이렇게 지우는 행위의 정치학을 배우면서 동시에 글쓰기 방법도 배우네요.
2009/11/03 22:33 2009/11/03 22:33
01
패트리샤 힐 콜린스의 책 『흑인 페미니즘 사상』(박미선, 주해연 옮김. 서울: 여이연, 2009)의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애초 협의한 날짜는 이미 지났지만 원고를 청탁하신 분의 말을 믿고 다음 주 중에 발송하려고요.

이 책의 리뷰는 매우 간단하게, 단 한 줄로 쓸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제까지 읽은 페미니즘관련 책에서 당신의 언어를 찾을 수 없었거나 아쉬움이 남았다면 이 책을 읽으세요.”

미리 얘기하자면 이 책의 교정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Run To 루인]에 이 책 관련 글을 쓰는 게 겸연쩍기도 해요. 하지만 이런 이유로 더 애정이 가기도 합니다. 책 자체가 좋기도 하고요. :)

02
리뷰의 형식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른 리뷰들을 뒤적이기도 합니다. 책이 논하는 이론적 배경을 설명하고, 이런 맥락에서 해당 책의 위치를 설명하고, 이 책이 현재 어떻게 유용한지를 밝히고. 이건 리뷰나 독후감의 기본 형식입니다. 반드시 이렇게 써야 하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책의 맥락을 설명해주고 책과 리뷰를 쓰는 사람의 긴장 관계를 드러내는 식이죠. 그러니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리뷰를 쓴다면 미국에서 흑인여성의 상황, 페미니즘에서 인종 논의, 젠더와 인종을 논한 이론 개괄, 흑인 페미니즘의 현재 등이 리뷰에 들어가겠지요. 하지만 이런 관습적인 방식의 글을 쓰기에 저는 적절한 글쓴이가 아니죠. 해당 전공자도 아니거니와 이런 내용을 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수십, 수백 명은 되니까요. 제가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리뷰를 쓰면서 미국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역사적인 맥락을 훑는다면, 적어도 저에겐 코미디입니다. 벨 훅스 조금 읽었을 뿐이고, 오드리 로드 글 몇 편 읽었을 뿐인 걸요. 사실 상 아는 것이 없죠.

이런 고민은 조금 나중에 했습니다. 흑인 페미니즘 전공자, 미국현대문학전공자, 미국흑인문학전공자, 미국 사회학 전공자, 이주와 인종 이슈 전공자들이 매우 많은 상황에서도 굳이 저에게 이 책의 리뷰를 청탁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먼저 고민했습니다. 아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전공자들이 쓸 거라 예상하는 글이 아닌 다른 어떤 리뷰를 바란다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사회학자나 미국문학전공자가 쓸 수 있는, 쓸 거라 예상하는 글을 바랐다면 애당초 저에게 리뷰를 요청하지도 않았겠죠. 즉, 트랜스 활동가의 맥락에서 이 책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가를 바랐던 거겠죠. (아…, 아닌가? ;;)

03
트랜스젠더 혹은 퀴어 활동의 맥락에서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리뷰하기. 쉬운 일은 아닙니다. 쉬운 일이 아닌 건, 제 블로그 [Run To 루인]에 쓰는 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글을 싣는 매체의 성격과 형식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처음 계획은, 리뷰를 쓰는데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 글이었습니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인식론과 방법론를 밑절미 삼아, 콜린스가 한국어판 서문에도 밝혔듯, 이 책이 “배타적으로 흑인여성의 소유물로만 그치지 않”(7)고 “사람들과 대화를 촉진하는 논의”(8)로 활용하는 글쓰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문제가 있더군요. 이렇게 쓸 경우,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읽은 사람은 왜 이런 리뷰를 썼는지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읽지 않은 사람들로선 황당하겠죠. “리뷰라는데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단 한 번도 언급을 안 해? 도대체 이 리뷰와 책은 무슨 상관이지?”라는 식으로.

저의 욕심은 간단했습니다. 이 책이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에 무관할 것만 같은 이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도 중요하다는 것. 고민을 풀어가는 데 있어 매우 소중한 조언이 될 것이란 것. 어쩌면 활동을 하고 공부를 하는데 등대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 이런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결국 저는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봉합사 삼아 글을 풀어가기로 했습니다. 최근 제 고민들, 활동들을 엮고 꿰매는 봉합사로서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리뷰하기. 한 가지 다행인 건 그 매체가 형식 자체를 따지진 않는다는 거죠. 글쓴이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거죠. 그래서 좀 편하게 쓰고 있습니다. 수필도 아닌 것이 논문도 아닌 것이 리뷰도 아닌 것이 일기도 아닌 것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떤 형식으로.

그래도 걱정인 건 어쩔 수 없네요. 제가 나름 소심해서,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밀어붙이고선 나중에 벌벌 떠는 타입이거든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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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옮긴이들에게 미리 변명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흐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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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쓴 관련 글
『흑인 페미니즘 사상』: 매우 짧은 리뷰
인용: 『흑인 페미니즘 사상』 + 이종태 기자의 기사
2009/11/01 12:03 2009/11/01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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