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LGBT사전

아침 7시가 조금 넘어 연구실에 도착. 오오,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시간. 학부 1학기 시험기간 이후로 이렇게 일찍 학교에 온 일이 있었던가 싶다. 스스로도 당혹스러운 기억일 정도인데, 학부 1학기엔 무려 밤샘을 하며 시험공부를 한 날도 있었다. 고등학생시절까지의 습관이 남아 있었던 거겠지. 그리고 밤샘을 하고 치는 시험은 하나같이 망했다. 벼락치기를 안 했거나 밤샘을 하지 않은 과목은 잘 쳤냐면, 당연히 비슷하게 망했다. 잠을 푹 안 자니 시험시간에 지장이 많다는 깨달음 이후, 시험기간엔 평소보다 더 많이 자는 습관이 생겼다. (켁!) 그러니 당연히 공부하겠다고 일찍 나왔을 리가 없다. 건물 바닥청소를 하는 날이라 청소하시는 분께서 7시까지 나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하셨다. 7시엔 못 열었지만 너무 늦지 않게 문을 열었다.

지난겨울엔 영화관에 갔었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오늘 아침엔 뭐할까 하는 설렘이 있었다. 영화관에 갈까 하다가 끌리는 영화가 없었고, 마침 도서관에서 찾아야 할 자료가 있어, 도서관에 머물기로 했다. 하지만 진짜 고민은 오늘 아침에 뭐 먹을까, 였다. 첨엔 평소처럼 김밥을 사와서, 연구실 문을 연 다음, 매점에서 김밥을 먹을까 했지만, 문득 식당에 앉아 느긋하게 밥을 먹고 싶었다. 항상 학교에 와서 메일을 확인하며 김밥을 먹는 편이라, 이번만은 식당에서 “우아”하게(웩!) 밥을 먹는 환상. 그러며 학교 주변, 루인이 먹을 수 있는 음식점을 모두 떠올렸는데, 우아는 무슨 우아. 아침 8시에 열법한 식당 중에서(김밥가게는 제외) 깔끔 혹은 깨끗하게 운영하는 곳은 없다. 어느 가게건 오래된 행주로 식탁을 훔쳤을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달리 선택 사항은 거의 없었고, 그냥 평소 가는 곳에 갈 수밖에. 킥킥.

도서관에 가서, 예전에 주문해서 도착한 LGBT사전을 뒤적였다. 흥미로운 항목은 따로 체크를 했다가 복사를 하고. 사전을 뒤적이면서, 미국에선 이 만큼 관련 연구가 오래되었거나 활발함을 실감했다. 의외로 없는 항목도 있지만, 몇 백 개의 항목을 선정하고 수십 명의 필진들에게 항목을 배분하고 그렇게 책으로 낼 수 있는 기반들. 항목들의 맥락과 논쟁점을 짚고, 참고문헌과 항목을 담당한 저자의 이름을 표기하고. 각 항목을 쓴 필진의 이름을 적는다는 건, 다른 사람이 썼다면 내용이나 구성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위그에서 기획하고, 조만간에 나올-_-;; 책에도 몇 가지 용어/항목 소개가 들어간다. 일종의 소사전인 셈이다.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를 읽기 전에 미리 알아야 할 용어(일테면, 트랜스젠더, 트랜스섹슈얼, 성전환자, 부치 등등)들을 다섯 가지 방식으로 묶어서 위그 활동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미국의 특정 집단에서 사용하는 정의를 번역하거나 정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위그 활동가들이 직접 새로 썼다는 말은, 각각의 용어들이 한국이라는 지역에서 사용하는 방식이 다르며 이런 맥락들을 드러내려 했음을 의미한다. 일테면, 미국에서의 “트랜스젠더”와 한국에서의 “트랜스젠더”는 한글표기법만 같을 뿐 의미가 전혀 다른 것처럼. 이 작업은 이번으로 끝날 작업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할 작업이지만, 이 책엔 각 항목을 쓴 필진의 이름이 들어가진 않는다. 위그 내에서 검토한 만큼, 위그의 의견으로 나가는 셈이다. (물론 문체를 통해, 각각의 필진들을 짐작할 수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서 나온 LGBT사전을 뒤적이고 있자니, 앞으로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들이 마구마구 떠오른다. 언젠가 LGBT사전이 한국에서도 나온다면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항목 중 몇 개는 루인이 쓸 수 있을까? 기획을 담당하는 일은 없겠지만, 이런 상상은, 상상만으로도 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