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로 산다는 건 참 고단한 일이다

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로 산다는 건, 참으로 피곤한 일이다.

숙박하는 행사에 참가하기로 했다. 방 문제와 샤워시설 문제로 참여하지 않을까 했지만 준비하시는 분들의 고생으로 어떻게 ‘해결’되었다. 그 분들에겐 고마울 따름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트랜스젠더가 아니라면 하지 않을 고민을 해야 한다는 건, 인식론적 특권이라고 말하기엔 때때로 그저 고단한 일이다. 그냥 귀찮은 일이고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행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하려는 유혹에 시달렸다. 여러 선생님의 노력과 고민으로 내가 참가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게 또 나 혼자 특권을 누리려는 것인지, 괜히 까탈스럽게 구는 것인지…와 같은 고민도 함께 든다. 그냥 나만 참가하지 않았다면 누구도 고단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괜히 참가한다고 했구나 싶다.
그리고 나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결된 것은 아니다. 모든 시설이 젠더 이분법으로 분명하게 나뉜 현실은 여전하다. 그냥 나만 예외다. 그렇다고 이것을 행사 주최측에 불만으로, 문제점으로 제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번 행사에서 문제제기할 대상은 주최측이 아니라 막연할 수밖에 없는 이 사회다. 모든 인간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확고하게 나누는 이 사회다. 그래서 문제제기를 할 수도 없다.
이번만이 아니라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기로 선택한 트랜스젠더로 살면서 고단함을 겪을 때마다 ‘확 호르몬 투여라도 해버릴까보다’라는 고민을 한다. 호르몬 투여가 충동으로 하기엔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알면서도 이런 고민을 한다. 물론 호르몬 투여를 선택하진 않는다. 악착같이 쉰까지는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는 트랜스젠더로 살면서 까탈스럽게 살겠다고 다짐한다. 고단하다면서 이렇게 살겠다고 다시 다짐하는 나도 참 악취미다. 하지만 요즘 들어 쉰이 넘었을 때 의료적 조치를 시작하면 어떨까란 고민을 아주아주 가끔 한다.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50살에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어떻게 예측할 수 있으랴. 그냥 가끔 이런 상상만 한다. 혹은 죽을 때까지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고 살 수도 있다(이게 자연사일지 사고사일지는 모를 일이지만).
참, 그런데 난 트랜스젠더인데다 채식도 한다. 최악이다. 크크크크크크크크. ㅡ_ㅡ;;
(사실 이 두 가지 범주보다 내 성격이 나쁘다는 게 더 큰 문제긴 하다. 으하하하 ;;;;;;;;;;;;;; )

퀴어함, 고단함, 그리고 삶

흐리고 비가 올 것만 같은 날씨,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느 토요일 오후.

어느 가게에서 호르몬투여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mtf가 간단한 장을 보고 나왔다. 호르몬 효과로 체격이 좀 변했고 얼굴은 곡선형으로 바뀌었다.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그가 트랜스젠더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다. 내가 mtf 트랜스젠더라고 분류하는 유형에 어느 정도 들어맞아 mtf라고 해석했을 뿐이다. 그는 트랜스여성이 아니라 비트랜스여성일 수도 있다. 비트랜스여성이라고 해서 몸의 형태가 유사한 건 아니다. 때로 비트랜스여성 간의 신체 차이가 트랜스여성과 비트랜스여성 간의 신체 차이보다 더 클 수도 있다. 그러니 그가 mtf 트랜스젠더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그의 몸이, mtf로 통하고, 이태원이란 공간에선 여성으로 통한다는 점이 조금 부러웠다.

나의 욕 나오는 몸은, 언제나 내게 골칫거리다.

얼추 한 달 전. 외국에서 온 누군가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호르몬투여를 비롯한 어떤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는 이유가 정치적인 효과를 위해서냐고 물었다. 그렇진 않다고, 내가 무얼 바라는 건지 결정하지 않았으며 지금 상태가 문제가 덜 되기에 의료적조치를 취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는 다시, 나의 행동이 정치적인 행동과 효과를 위해서냐고 물었다.

1990년대 이후, 미국에선 트랜스젠더 운동과 이론이 활발하다. 아울러 퀴어운동이 급부상하며서 트랜스젠더는 때로 퀴어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때론 퀴어가 아니라 기존의 규범을 강화하는 존재로 불리며 상당한 논쟁을 유발했다. 이 과정에서 몇몇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 활동가는 자신의 성전환과 호르몬투여를 정치적인 행동, 퀴어함의 상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여성으로도, 남성으로도 통하지 않는 몸이 다른 사람에게 혼란을 주는 효과를 긍정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의료적 조치를 취하지 않은 mtf는, 자신의 몸이 남성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젠더범주는 여성이라고 설명하며 젠더범주와 그에 적합한 몸의 형태 간의 관계에 균열을 냈다. 일상에서 여성으로 통하는 mtf는 자신이 m(남성)의 역사와 흔적이 있는 여성이라고 말함으로써 역시나 범주와 몸의 관계에 파열음을 냈다. 비록 트랜스젠더의 몸은 가시성을 획득하는 순간 그 자체가 운동이지만, 그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나는 나의 몸이 일으키는 혼란과 헷갈림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런 헷갈림을 즐기고 적극 활용한다. 그렇다고 마냥 즐거운 건 아니다.

나를 인터뷰한 이가 “당신의 행동이 정치적인 효과를 위해서냐?”고 반복해서 물었을 때, 불쾌했다. 그의 쿨함때문에? 글쎄. 어쩌면 글 몇 편 읽고, 그것도 트랜스젠더 몸의 정치적 효과에 관한 글 몇 편 읽고 질문하는 느낌이라 불쾌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활동가의 삶과 행동을 모두 “정치”적인 행동으로만 수렴하는 태도가 불쾌했는지도 모른다. 내 몸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효과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면 나는 신나게 얘기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내가 활동가이니 “정치”적인 효과를 위해 의료적 조치를 취하지 않은 거라고 어느 정도 확신하고 질문했다.

난 퀴어한 쾌락, 혼란과 헷갈림을 유발하는 행동을 좋아하지만 내가 정말 살피고 싶은 건, 그런 행동에서 언뜻언뜻, 때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고단함이다. 내 몸으로 인해 발생하는 혼란과 논쟁이 너무 좋지만, 그래서 그걸 즐기지만, 즐기는 만큼이나 고단하다. 난 내 몸이 미학적으론 최악이라고 판단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싫어하진 않는다. 그저 늘 짜증날 뿐이다. 내 몸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많은 불편을 초래하고, 이런 몸이자 이런 몸에서 살아가는 삶은 늘 고단하다. 그래서 난 퀴어의 쾌락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고단함에 더 끌린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퀴어/트랜스젠더로서의 어려움, 힘든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언론에서 기사로 팔기 위해 요청하는 그런 고통의 전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쾌락과 함께 오는 고단함이 나의 관심이다. 그래서 더 어렵다. 때로 난 나의 고단함만으로 버거운데 종종 타인의 고단함도 살피다보면 타인의 고단함을 나의 수준으로 수렴하거나, 타인의 고단함이 피곤하여 도망친다. 그래서 또 한 번, 고단하다.

어느날 의료적 조치를 취한다면 나는 덜 고단할까? 글쎄… 내가 만약 의료적 조치를 시작한다면, 그저 괴물이 되기 위해서다. 지금보다 더, 사람들이 종잡을 수 없는 그런 몸으로 바꾸기 위해 호르몬 투여를 시작할 것이다. 지금은 이런 판단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헷갈려하는 반응에 깔깔 웃으면서 더 많은 고단함을 느끼리라. 내 삶은 더 피곤해지리라.

나는 어떻게 살까? 내 몸은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

그리고 내가 mtf라고 추정한 이는 어떤 삶을 살까? 내가 행여 의료적조치를 취한다고 해도, 선택한 배경이 다르니 끝내 서로의 고단함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는 어떻게 살아갈까?

에잇.. (뜬금없이) 올해는 연애를 할까보다. 하지만… 연애란 게 하겠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닌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