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친구가 이사를 한다고 했다. 이삿짐 나르는 일을 도와주러 갔다가 시간이 붕 떴다. 시간 계산에 착오가 있었고, 그리하여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갈까 했지만,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더 많이 들겠다 싶어, 근처의 지하철역으로 갔다. 지하철역에 가면, 책상과 의자가 있으니까.

루인은 블로그에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면지에 볼펜으로 글을 쓴다. 이런 얘길 사람들에게 하면 요즘 들어 이런 경우는 드물다며, 모니터 화면을 보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는 얘기도 자주 듣는다. 지하철역에 가서 책을 읽을까 하다가 어제의 내일인 오늘이 마감인 글을 쓰기로 했다. 이면지는 언제나 몇 장정도 가지고 다니는 편이기에 종이는 넉넉했다. 다만 걱정은 요청한 원고 분량이 원고지 5~6장인데, 펜으로 쓰다보면 그 분량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 아무려나 일단 대충 하고 싶은 얘기를 썼다. 그러곤 한 번 수정하고 나서 글자수를 세기 시작했다. -_-;;; 크크크. 대충 이 정도 분량이면 5~6장이겠다 싶은 분량으로 해서 수정과 편집을 거친 후, (분량이 적었기에 반복해서 쓴다고 해서 힘들진 않았다) 일단 초안은 완성. 나중에 사무실에 돌아와 워드작업을 하니, 후후후, 딱 요청 분량. 내용은 만족스럽지 않은데 분량을 맞췄다는 사실에 혼자 좋아했다. ;;;

이제 곧 있을 인권영화제에서 해설책자를 내면서 인권해설이란 글이 들어가는 듯한데, 그곳에 실릴 목적으로 글을 청탁 받았다. 그곳에서 요청한 주제는 “인권해설은 성전화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알기 쉽게 써주시면 됩니다.“였다. 하지만 쓴 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잡았다. 왜냐면, “우리는 어떤 차별을 받고 있다”는 식의 글을 별로 안 좋아 하기도 하거니와 이와 관련한 내용은 기사검색만 해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좀 다른 접근을 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적어도 영화제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더욱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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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 혹은 “나”를 어떻게 얘기할 것인가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나”의 어떤 지점을 어떤 식으로 주장할 것인가란 고민 때문이다. 흔히 트랜스젠더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불일치해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얘기하곤 한다. 물론 자신의 몸이 변하면서(일테면 사춘기를 거치며 가슴이 나오거나 월경을 하는 것, 목소리가 굵어지고 수염이 나는 것) 몸과 갈등을 겪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세상엔 남성과 여성이란 두 가지 성별뿐이며, 태어날 때 할당 받은 성별과 어떤 갈등도 경험하지 않는다는 식의 가정을 은폐한다. 이럴 때 트랜스젠더들이 경험하는 갈등과 긴장은 “그들 개인의 문제”이고 “치료”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불일치한다”란 식의 언설은 트랜스젠더들의 경험을 설명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일 수는 있지만, 유일한 설명 방식은 아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만 설명한다면, 현행 호적제도나 신분제도 등으로 인해 경험하는 갈등, 그리하여 끊임없이 호적상의 성별을 변경하고자 하는 요구들을 설명하기 힘들다.

이 글에서는 트랜스젠더들이 얼마나/어떻게 고통 받고 있는지를 쓰지 않는다. “나”를 주장하기 위해 “나”의 고통을 전시하고 “나”의 고통을 증명해야 하는 건 아니며, “내”가 이 만큼 고통 받고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주장할 수 없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인권운동이 우리는 이 만큼 고통 받고 있으니 이를 해결하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범주를 어떻게 만들고, 인권의 의미를 누가 어떤 식으로 해석하는가란 질문과 같이, 해석들이 경합하는 장을 만드는 작업이라면, “나”의 고통을 말하기에 앞서 고통의 전시를 통해서만 나를 주장할 수 있는 맥락들을 얘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질문은 “트랜스젠더가 되는 이유는 무엇이냐”와 같은 형식이 아니라 사회적, 법적, 문화적 제도가 사람들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가, 어떻게 사람들을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기획하는가로 바뀔 필요가 있다. 동시에 트랜스젠더와 어떻게 소통할지 모르겠다와 같은 말은, 상대방이 트랜스젠더라는 걸 알았다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 오는지와 동시에 고민할 때에야 비로소 의미 있는 언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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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아이디어는 “Transgender? Transgender!“에 썼던 내용들을 토대로 했다. 팜플렛에 들어갈 내용으로 썼는데 팜플렛이 나왔는지 모르겠고 -_-;;; 아이디어는 비슷하다고 해도 그런 아이디어를 구성하는 문장 방식은 변했다는 느낌이 있다. 이 느낌을 믿어야지.

[TV]제 378 화 “내 남편에게는 비밀이 있다”

[부부 클리닉 – 사랑과 전쟁] 제 378 화 “내 남편에게는 비밀이 있다
방송 2007년 4월 6일 금요일 밤 11 : 15
극본 김 효 은
연출 박 효 규
출연 남편 (유석) : 이 석 우 , 아내 (선미) : 최 정 원 , 태준: 양 동 재

지난 서울여성영화제 기간이었다. 지렁이에서 같이 활동하던(했던?) 한 활동가가 이 프로그램을 얘기했다. 한 번 보라고. 봐야지, 하면서도 벌써 몇 주일을 미루고 있다가 며칠 전에야 봤다. 뭔가 일이 밀려 있으니, 이런 식으로 도망간다고 할까. (프로그램 제목에 링크했음. 로그인만 하면 무료로 볼 수 있음.)

미리 말하면, 이 프로그램을 읽는 내내 괴로웠다. 자꾸만 창을 닫고 싶다는 충동. 한 장면 한 장면이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따지고 보면 뻔한 구성임인데도 아슬아슬하고 들키는 그 과정을 참기 어려웠다. 등장의 누군가와 이입하다가 밀려나기를 반복했다.

내용 소개를 그대로 퍼 와서 내용설명을 생략하려니, 별 도움이 안 될 법해서, 간단하게 요약하면, 주말부부 유석과 선미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지만, 사이가 무난한 편. 근데 대전지역에서 일하는 남편이 서울로 다시 발령을 내려도 거절하고 계속 대전에서 지내길 원해서, 아내가 뒷조사를 하니, 남편은 호르몬 투여 등의 성전환을 바라는 트랜스여성이라는 설정. 그리고 뻔한데, 아내는 이혼을 거부하고 남편은 정말 미안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자신의 몸이 끔찍하다고 죽을 것 같다고 말하고. 루인은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수시로 이입과 밀려남을 반복했다.

내용을 설명하며 “뻔한데”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런 상황이 상당히 많다는 의미에서기도 하고, 트랜스젠더를 묘사하는데 있어 언론에서 요구하는 방식(소위 “이야기가 된다”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며칠 전에 전해들은 한 얘기에서, 누군가는 트랜스젠더를 그런 식으로 얘기했다고 한다: “죽을 만큼 싫은데, 너무도 끔찍해서 절단하고 싶다는데 어쩌겠느냐”고.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를 소비하는 몇 가지 방식 중의 하나인 이런 언설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고 말하고, 몸의 일부를 도려내고 싶다고 말하고, 그리하여 이런 식으로 말해야만 “진성 트랜스젠더”임을 “승인”하는 구조. 그리고 이런 말들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죽을 만큼 싫다는 이들은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굳이 수술해야 하느냐고 말하는 구조들.

이 프로그램의 구조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데, 남편은 아내에게, 거울을 통해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괴롭고,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이 말에야 비로소 아내는 어느 정도 체념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런 식으로 “진성 트랜스젠더임”을 증명해야 만 비로소 수술에 대한 욕망을 이해하는 구조. 어떤 사람은 이 프로그램 속의 남편처럼 수술이 아니면 죽을 것 같고 자신의 몸을 볼 때마다 괴롭다고 얘기하고 다른 사람은 사람들이 “남성”과 “여성”이란 식으로만 나누지 않으면 별 상관이 없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고통을 전시하고, 고통을 통해 호소해야만 비로소 “진성”으로 받아들이는 그 맥락을, 이 프로그램은 얘기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이 프로그램은 단 한 번 얘기하지 않지만(아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맥락으로 사용함),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구조는, 동성애금기다. 동성혼 자체를 얘기하지 않음으로서 동성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그 구조가 너무 분명해서, “동성혼은 절대로 안 되니까,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건가, 하고 중얼거렸다. 며칠 전 커밍아웃과 관련한 글을 적으며 모든 트랜스젠더를 “이성애자”로 간주하는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하는 것의 의미를 살짝 언급하며 지나갔다. 어떤 자리에서 루인이 트랜스라고 커밍아웃을 하면 사람들은 루인을 당연히 mtf/트랜스여성이라고 간주하며(왜 사람들은 루인이 ftm/트랜스남성일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은 걸까? 물론 이 이유를 짐작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때부터 사용하는 수사는 “예쁘다”거나 “남자친구 있느냐”이다. 꾸엑!!! 이럴 때 루인의 커밍아웃은 무엇을 커밍아웃한 걸까? 이런 수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에 존재하는 “이성애자 트랜스젠더”임을 커밍아웃한 걸까? 이런 이유로 루인에게 커밍아웃은 지금까지의 관계 방식을 지속하면서도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고 얘기하자는 의미일 수밖에 없다. 모든 트랜스젠더가 “이성애자”는 아니고, “이성애”의 의미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을 계속 얘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 얘기가 옆으로 세어 나갔는데, 어쨌거나 이 프로그램은 “동성애는 절대 안 돼!!”라는 부르짖음 같았다. 아직은 수술을 할 의향이 없는 레즈비언 트랜스여성과 “이성애”여성의 결혼이 불가능한 건 아닌데. 수술을 할 의향은 있지만, 여전히 아내를 혹은 남편을 사랑할 수도 있고, 아버지가 반드시 “남성”이어야 하고 어머니가 반드시 “여성”이어야 하는 건 아닌데. 공중파 방송에서 할 수 있는 어떤 방식에 따라 구성한 내용이겠거니 하면서도, 아쉬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