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호를 규범 삼지 않기를…

강의를 할 때면 가끔.. “어떤 트랜스젠더는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으면서 비규범적으로 전복적으로 사는데 하리수 씨 같은 경우처럼 순응적으로 사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이렇게 순응적으로 사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경우가 있다.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런 뉘앙스의 질문은 꽤 많은 편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단발적 질문이 아니다. 여성학이나 페미니즘 내부 혹은 그 언저리에 있는 곳에선 특히나 선호되는 방식이다. 즉 페미니즘 내부 혹은 그 언저리에 있는 이들은 모호하거나 전복적으로 여길 법한 주체를 참 애호한다 싶다. 이를 테면 몇 년 전 세 명의 ftm이 등장한 다큐에서 소위 여성주의 주체, 규범적이지 않은 남성성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인물이 유난히 인기가 많았다. 소위 남성성 규범을 강화하는 듯한 등장 인물이 중요한 이야기를 매우 많이 했음에도 그의 말은 주목받지 못 했다. 때론 규범적이라 여기는(실상 전혀 규범적이지 않은데도!) 삶을 저어하거나 때때로 폄훼하기도 했고.
이런 분위기, 이런 발화를 들으며 차마 직접 못 하고 담아둔 말이 있는데… 모호하고 전복적 삶을 사는 인물이 그렇게 좋으면 최애캐로 삼지 말고 직접 그렇게 사셨으면 좋겠다. 자신이 못 하는 것 혹은 하지 않고 있는 것을 타인에게 요구하고, 특정 범주의 인물을 전복의 주체로 재현하지 말고 본인이 직접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이 못 하는 것 혹은 하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요구하고 그 요구를 규범 삼아 판단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니까 애호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런 애호가 마치 자신의 정치적 입장, 자신이 직접 행하고 있는 행위이자 실천인 것처럼 믿으면서 그렇게 살지 않는 존재를 재단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재단하지 말고 그냥 직접 실천하시면 더 좋고.

잡담: 규범, 공부, 결과, 글

규범을 균열 내는 건 어렵다. 그렇다고 규범에 내재하는 균열을 놓치는 건 곤란하다. 규범은 솔기 없이 단단한 것이 아니라 허술한 형태다. 규범은 혼종이다. 그래서 규범의 균열을 읽는 작업이 중요하다. 적어도 내겐 이런 작업이 내 삶에 숨통을 틔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알바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택배가 와 있었다. 주문한 게 없는데? 이런저런 생활비에 돈 나갈 일이 많아 책 지름을 못 하고 있다. 그리하여 택배를 받을 일이 거의 없다. 최근 무언가를 주문한 일도 없고. 그런데 뭐지? 주소를 확인하니 출판사였다. 4월 말 주로 지하철에서 쓴 원고가 이제 출판되었나보다. 소리 소문 없이 글이 나온 느낌이다. 글을 쓸 때만 해도 언제 나오나 싶었는데 나오고 보니 나오긴 나오는구나 싶다. 아울러 글을 쓸 당시만 해도 6월이 언제 오나 했는데 벌써 6월 중순이다. 오늘 오후에 하나 마무리하고 이제 한두 편만 더 쓰면 상반기 마감이다. (4월부터 6월까지 총 6편이라고 했는데… 7~8으로 수정해야.. ;ㅅ; 1월부터 기준으로 하면 오늘까지 8편을 썼구나.. 끄응…)
암튼 이렇게 잡지에 출판된 글을 보니, 그래도 좀 뿌듯하다. 그동안 뭔가 하긴 했는데 그 형태가 안 보여서 ‘나 지금 뭐하고 있나’싶을 때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계속 바쁜 일상인데 그 결과는 확인할 수 없는 시간. 특히 글을 썼으면 지금까지 쓴 글 목록에 등록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 그냥 빈둥거리며 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바쁘다고 흰소리만 한 것 같고. 그래서인지 책의 형태로 글이 나오니 조금은 뿌듯하다. 얼마나 잘 썼는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어쨌거나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 좋다. 뭐, 이 정도의 자기만족이라도 있어야지… ;;;
그러고 보니 지난 6월 8일에 또 다른 글이 하나 출간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왜 소식이 없지? 2월 경 급하게 마무리한 글인데…;;; 물론 글 자체는 초고부터 완성까지 거의 10달 걸렸지만…
뭔가 계속 생산하고 있는데, 생산만 하고 있으니 깊이는 없고 다들 얄팍하구나.. 훌쩍..
과거 어떤 학자는 10년에 한 편, 책을 냈다. 근데 가만 고민하면 10년에 한 편이 아니라 10년에 걸쳐 한 권의 책을 쓴 것이다. 둘은 전혀 다른 작업이다. 나도 그런 책을 쓸 수 있을까? 지금처럼 돌려막는 느낌으로 쓰지 않고 좀 진득하게 작업할 수 있을까? 역시나 박사학위 논문이 유일한 희망일까… 아아…
그래도 지금 상황은 내게 과분한 복이다. 지금 상황이 고마울 따름이다. 글을 요청하는 곳이 있고 읽어주는 분이 계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메모] 인터섹스, 치료 혹은 수술, 윤리

역시나 며칠 전 강의에서 사용하려고 메모한 내용. 비문, 오탈자 등이 난무합니다.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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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인터섹스의 몸을 둘러싼 수술 과정에 의료는 어떻게 개입하는가. 이 질문은 의학이 인간의 몸에 따라 어떤 윤리와 선입견으로 접근하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작업이기도 함. 의학이 사람을 살리는 작업이라곤 하지만 그 ‘살림’이라는 실천이 사회적 규범에 따른 규범화 작업이고 이에 따라 죽임 혹은 배제에 가까운, 죽임을 동반하는 ‘살림’이기도 함.
지난 강의에서 얘기했듯 인터섹스 수술은 외부성기 형태를 규범적 여성의 외성기, 규범적 남성의 외성기 형태에 맞추는 과정. 그리고 이 과정은 ‘모호’하다고 여기는 성기 혹은 섹스를 “모호하지 않게” 만드는 과정. 하지만 ‘모호’하다는 판단과 ‘모호하지 않게’ 만드는 작업은 인터섹스 본인의 의중이 아니라 의사가 느끼는 혼란, 모호하다는 선입견이 빚은 조치. 하지만 의사는, 아이의 인터섹스 성기 재구성 수술에 따른 젠더 변경이 친척의 혼란을 초래하고, 이런 혼란은 아이에게 악영향을 줄 거라고 가정하며 친척과 헤어지는 것이 인터섹스 아동을 위한 처방이라고 주장.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수술 사실을 비밀에 붙일 것을 주장함. 아이에게 사실 대로 말하면 아이는 이 사실을 감당할 수 없을 테고 이로 인해 상당한 충격과 우울증 등 부정적 효과만 낳을 것이라고 얘기함. 아울러 의사는 종종 인터섹스의 부모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수술을 하는데, 이는 부모 역시 태아의 인터섹스란 조건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 그래서 종종 부모에게 어떤 얘기도 하지 않고 의사 임의로 수술을 시행함.
의사가 부모에게 직접 얘기할 때도, 의사는 아이의 성기관, 외부성기가 아직 다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났다는 식으로 주장하며 부모를 설득함. 소위 여성형 외부성기와 남성형 외부성기만이 규범적 형태라고 주장하고, 이런 형태만이 제대로 발달한 인간 형상이라고 주장함. 따라서 미발달 상태, 혹은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난 인터섹스는, 아마 이런 식의 수사는 많이 익숙할 텐데요, 외성기 수술을 통해 제대로 된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함.
그렇다면 인터섹스의 조건이 인터섹스 본인에게 건강상 부정적 효과를 줄 것인가? 의사는 인터섹스 태아가 태어나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아이의 건강에 해롭고 이른 나이에 죽을 수도 있으며 불행한 삶을 살 것이라고 주장함. 그러며 수술과 이후의 적절한 의료 처방이 최선이라고 얘기함. 이런 주장에 부모는 설득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태어나서 며칠, 혹은 몇 달 이내에 수술을 함. 그럼 이 수술은 정말 인터섹스의 건강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여기서 인터섹스 성인의 주장은 좀 다른데 ㄱ. 수술 후 어떤 성감도 느낄 수 없다고 증언, ㄴ. 인터섹스란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 것이 제 삶을 더 불행하게 만든다고 얘기함. 후자의 경우, 수술은 인터섹스의 프릭 혹은 기형 상태를 해소하기보다는 인터섹스 자신을 더욱더 기형으로 느끼게 함. 인터섹스는 타인 혹은 의사에게 동정 받으면서도 제 역사를 들을 수 없게 되면서 불행하다는 느낌을 가지며, 의사는 이를 통해 인터섹스를 심각한 기형으로 판단하고 인터섹스는 기형이어야 한다고 결정함. 의사가 인터섹스와 때때로 부모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기만은 인터섹스 본인에게 혼란과 부끄러움 만을 부추길 뿐. 실제 많은 인터섹스가 자신의 과거를 알 수 없는 상황, 의사의 쉬쉬하는 태도가 제 삶을 더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얘기함. 아울러 쉬쉬하는 태도에 많은 인터섹스가 비판하길, 환자가 암일 때도 당사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의사 임의로 수술을 하느냐고 질문.
아울러 인터섹스의 ‘뭔가 좀 다른’ 외부성기 형태는 그것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는 있다고 해도 그 자체로는 겉모습이 단지 달라 보이는 것 뿐. 인터섹스의 조건은 당사자의 삶을 위협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저 인터섹스가 속한 문화를 위협할 뿐이다.
의사가 수술을 시행한 후, 그럼 인터섹스의 건강은 정말 좋아졌을까? 수술을 하지 않으면 정말 일찍 죽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 의학 연구가 충분히 있는 것일까? 장기 팔로우업 연구를 확인한 결과에 따르면 그런 건 없다는 것이 현실. 의사는 장기팔로우업 연구를 시도하곤 하지만 대부분 몇 년 이내에 다 놓치기 마련. 그래서 수술을 겪은 인터섹스 혹은 수술을 겪지 않은 인터섹스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이는 인터섹스에게 처방하는 표준처방이 실제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 표준처방이라는 것은 있지만 그것의 실질 효과에 대한 장기 연구는 없는 것이 현실.
이런 현실과 관련해서 아나스는 괴물윤리란 개념을 도입함. 예를 들어, 샴쌍둥이 태어나면 의사는 분리수술을 주장함. 분리해서 규범적 인간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 이 과정에서 한 아이는 죽을 수도 있지만 이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의학의 입장. 아나스는 이런 태도가, 샴쌍둥이는 너무 괴물스럽고 끔찍하니 그들을 규범화하기 위한 어떤 수술도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여기는 괴물윤리라고 비판함. 다른 수술 과정에선 진지하게 고려될 윤리 규정이 인터섹스나 샴쌍둥이에겐 무시됨.
이런 괴물윤리는 장애이슈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작용할 듯. 의사의 조언과 처방이 해당 당사자의 몸에 정말 적합한지, 의료적으로 증명되었는지는 논쟁적. 기존의 많은 의료적 처방은 비장애인의 몸을 토대로 삼아 이루어져 있음. 그것을 장애인에게 일방적으로 적용하거나 장애에 선입견을 가지고 적용함. 이는 저보다는 여러 분이 더 잘 알고 있고, 황지성 선생님 논문에도 잘 나와 있음. 이를 테면 장애여성이 임신하고 출산할 수 있는가의 개인적 조건과 상관 없이 장애여성은 출산해선 안 된다는 규범/선입견이 낙태와 불임시술을 의료적으로 적절한 처방이라고 주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