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라는 시간

주말마다 부산에 갔다 오고 있습니다. 이번엔 월요일에 처리할 일이 있어 오늘 돌아왔지만요…

기차를 타고, 다시 지하철, 마을버스를 타고, 다시 1km를 더 걸어야 재를 지내는 절에 갈 수 있습니다. 산길을 걸으며, 고인에겐 이렇게 할 수 있는 데 살아 있을 땐 왜 이렇게 못 했을까,란 고민을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고인을 향한 애도와 예의는 챙기면서 생전엔 왜 이렇게 못 한 것일까요? 전 얼마나 많은 미래를 기대한 것일까요? 어떤 시간을 기대한 것일까요?
부산에 가기 전, 요즘 제 몸 한 켠을 내주고 있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어떤 질문에 “다음에”라고 답을 미뤘습니다. 질문을 받은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에”란 시간은 과연 존재할까요? 예전부터 미래 시간을 믿지 않았지만 최근 일을 겪고 난 뒤로 미래 시간을 더욱더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왜 “다음에”라는 미래 시간을 기약한 것일까요?
관계를 예측할 수 없는 미래까지 유지하고 싶다는 바람의 표현일까요? 혹은 이 대답을 할 때까지는, 그 이상일 수도 있지만, 최소한 대답을 할 시간까지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바람을 표현한 것일까요? 혹은 현재를 유예하는 것일까요? 현재 시간을 늘이고 또 늘여서 더 길게 만들고 싶다는 바람일까요?
“다음에”라는 시간은 어떤 욕망 혹은 바람을 내포한 대답일까요? 미래라는 시간은 참 의미가 없는데 말이죠. 전 얼마나 더 많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까요? 그저 현재만,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 달리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말이죠.
“다음에”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금 슬펐고, 미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