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과 인문학

요즘 제가 이런저런 일로 바빠 안타깝게도 책 읽을 시간이 거의 없어 지하철 타는 9분 정도 읽는 안타까운 일이. ㅠ_ㅠ
이렇게 쓰면 마치 평소엔 책, 아니 글자라도 읽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켜 문제가 있지만요… 아하하. ㅠㅠ
꼭 평소 공부를 안 하면서 바쁠 때면 바빠서 공부를 못 하겠다고 핑계를 대고 있는 1人이랄까요.. 음하하.;;;
암튼 바빠서 대충 때우는 포스팅이 맞아요… 으하하…;;;

암튼 읽고 있는 김영민의 책에 재밌는 구절이 많더군요.

<상상력은 도약 이다>란 장에선

어쩌면 이 ‘어처구니없이 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기존의 지식을 넘어서 상상을 펼치는 것이야말로 신나고 흥분할 만한 일이고 … 지성의 활동을 보이는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여덟 길동이 팔도에 다니며 호풍환우하는 술법을 행하니 … 팔도가 요란한지라 … “라는 구절을 대하는 우리는 이 사태의 반상식에 그리 괴로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기묘한 공명의 희열에 들뜨기까지 한다. 우리는 본래 도약을 위해 준비된 존재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옷이 자연이 아님은 옷을 입는 행위 속에 자명해진다: 옷이 몸을 입는 것이 아니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상식은 ‘바람이 제 갈 데로 불 듯이’ 홀로 자존하지 못하고 숙주를 필요로 한다.

<상상력은 떼어진 것을 붙이는 기운(氣運)이다>란 장에선

떼어진 것들에서 붙어 있는 것들로 도약하는 것 – 상상력의 진수는 이러한 능동성 속에 있다.

모든 인간의 경험은 상상력을 통해서 인간적으로 통합된다. 상상력의 ‘붙이는 힘’이 개입되지 못한 세계와 그 경험은 데이타의 무의미한 집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은 그 주체적이고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문학적인 배경을 갖는다. 물론 모든 학문이 인문학은 아니다. 그러나 개들이 하는 학문이 아닌 이상 모든 학문은 – 그 정도에 시비가 있을 수 있겠지만 – 인문학적일 수밖에 없는 조건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문학을 구태여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지적 탐구가 인문학적 색깔[humanistic coloring]을 내장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전제된 조건이다. 안경을 끼기 위해서 안구(眼球)를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구절들이 요즘 고민에 실마리가 되어서 좋달까요… 아하하.

인용 구절 출처 제대로 안 밝혔다고 출판사에서 딴죽 거는 건 좋은데, 그 전에 품절시킨 거 다시 발간부터 좀… -_-;;

『동무와 연인』 중에서

조국은 남자의 발명품이다. 조국(祖國)은 말 그대로 ‘할아버지의 나라’이지 할머니의 것이 아니다. 광개토대황의 조국이든 윤도현의 조국이든, 혹은 유관순의 조국이든 그것은 죄다 남자의 것이다. (… 중략 … ) 그것은 효도가 부모들의 발명품이고 우정이 약소자(弱小者)의 발명품이며 연애가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사실과 다를 바 없다. (21)

대의(大義)가 푯대라면 그 푯대 아래 ‘동지’가 모인다. 그들은 거사(擧事)에 함께 투신하고 혁명에 신명을 바친다. 그 과정에서 취향은 무시되어도 좋고, 사랑조차 종종 걸림돌일 뿐이며, ‘의사소통적 합리성’도 부차적이다. 더불어 벤야민의 비평론이 가릋듯이, 객관성(Saclishkeit)마저도 당파적 실천을 위해서 희생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배신만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다.
그러나 친구에게는 대의도 이데올로기도, 관념의 일관성만으로 묶어둘 끈도 없다. 전두환들이나 김영삼들이, 최민수들이나 강호동들이 웃는 표정만으로 족하다. 이론이 부재한 자리를 정서적 일체감이 들물처럼 채우는 사적(私的) 우연성, 그것이 친구다. 공유된 이념이 없으니, 원칙상 배신도 존재할 수 없는 두루뭉수리한 관계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배타적 관계의 형식은 대의와 이념의 부재가 남긴 정서의 진공 속에서 생긴다. 대의는 공간적 관념의 정합성이 없는 대신, 친구는 ‘시간’을 먹고 산다. 이와 대조적으로 동지는 무시간적 관계랄 수 있는데, ‘같은 뜻[同志]’은 원리상 시간을 초월해서 동아리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햇차가 좋고 묵은 술이 좋다고 하듯이, 친구는 시간의 명암과 굴곡을 거치며 얻은 탁하고 묵은 관계다. 그것은 시간이 보존해온 향수이며, 그 향수를 공유하는 몸의 기억이 만든 관계다. 그래서 친구의 관계가 정실에 치우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동무는 동지도 친구도 아니다. 굳이 조어로 그 취지의 한 극단을 잡아내자면, 동무는 동무(同無)다! 오히려 서로간의 차이가 만드는 서늘함의 긴장으로 이드거니 함께 걷는다. 공유된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면서 히틀러나 스탈린의 수염 같이 가지런히 정돈된 길을 행진하는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길없는 길’을 걷고 어울려 다른 길을 조형하면서, 잠시만 한눈을 팔면 머 -얼 -리 몸을 끄 -을 -며 달아나 그림자조차 감추어버리는 관계다. 그것은 일찍이 니체와 짐멜만이 거의 유일하게, 그러나 다소 흐릿하게 파악한 ‘신뢰’의 관계다. 우선적으로 ‘기분’과 ‘감정이입’의 차원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것은 친구가 아니며, ‘뜻(이념)’ 중심주의적 결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지도 아니다. (31-33)
김영민 『동무와 연인』 서울: 한겨레출판, 2008.

요즘 한글로 쓴 책이나 글을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어 잠들기 전 이 책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문장 좋은 글을 읽고 싶었는데, 이런 바람에 부합하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괜찮은 구절이 많다. 위에 인용한 구절도 그 중 일부다. 특히 같은 뜻이란 시간을 초월한다는 구절,  동무는 동무(同無)는 곱씹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