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유통기한, 쓸모의 유통기한: [할머니와 란제리],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지난 수업 쪽글입니다. 영화 <할머니와 란제리>,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보고 쓴 글이고요.
글과 관련해서, 제가 “결국 청춘이 기준”이라고 했는데,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청춘과 관련한 상상력은 존재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고민하니, 한국에선 나이와 관련한 풍성한 상상력이 없더라고요. 그저 규범적 생애주기만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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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4.화. 15:00-  영화 후기 쪽글
삶의 유통기한, 쓸모의 유통기한
-루인
나이 60에 학부에서부터 수학을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얘길 하곤 한다. 학부 시절 수학 공부를 허술하게 한 것이 아쉬워 나중에 꼭 제대로 다시 배우고 싶다는 바람의 표현이다. 그리고 내 말을 들은 이들 중엔 “나이 예순에 새로운 공부라니…”라는 반응을 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공부도 아니고 수학이라니’란 뜻일까, ‘다른 일도 아니고 공부라니’란 뜻일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나이 예순이면 아직도(조금씩 변하곤 있다지만) 뭔가를 새로 시작할 나이는 아닌 듯하다. 은퇴(가 가능한 일을 내가 한다면)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걱정할 나이다.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소일거리 중심이고 학업이라고 해도 외국어를 배우는 정도다. 노년에 할 일은 주로 이런 이미지로 유통된다. 하지만 나의 고민은 양호하다. 내 고민은 적어도 노년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의 영역, 사회적/젠더화된 금기가 존재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베티나 오베를리의 영화 <할머니와 란제리>는 노년의 나이에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 사이의 갈등을 얘기한다. 나이 들면 뒷방 늙은이가 되거나 양로원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노년에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소일거리 삼아 새로운 걸 배울 순 있어도 ‘노인이 할 법한 일’에서 벗어나는 건 금기 위반이다. 영화 초반에 나온 장면처럼 노년의 삶은,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이 헐값[discount]에 팔리듯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년의 여성이 여성 란제리를 판매하는 일을 한다면? 남성의 속옷이 아닌 여성의 속옷을 공공연히 전시하고 판매한다는 것과 그 일을 노년의 여성이 한다는 건, 마을 당의장의 주장에 따르면 “마을의 전통”을 위반하는 일이다. 속옷은 일상에서 매우 중요한 물건이지만 여성의 란제리 판매는 마을에서 조롱거리가 되고, 노년의 여성 마르타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어쩌면 당의장이 몸소 보여준 것처럼 노인은 멸시의 대상이며 양로원에서 얌전히 지내면 그만인 존재라는 게 마을/사회의 “전통”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단순히 영화 속의 풍경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상상력 뿐만 아니라 나이듦과 관련한 상상력 자체가 매우 부족하다. 가능한 몇 안 되는 사회적 상상력은, 다양한 연금보험에 가입하는 현재에 기대고 있을 뿐이다. 보험으로 시작해서 보험으로 끝나고 현재를 저당잡거나 ‘경제활동인구’를 저당잡을 뿐이다.
결국 노년을 둘러싼 상상력은 은퇴 후의 휴식이거나 기껏해야 제 2의 청춘이다. 결국 청춘이 기준이다. 나이가 들면 인생에서 그리고 공동체에서 쓸모가 없어진다는 상상력은 서구 근대적/지배 규범적 생애주기의 근간을 이룬다. 노년은 무언가를 하는 나이가 아니라 지금까지 해둔 걸 ‘까먹는’ 나이다. 사회에서 생산하는 나이, 쓸모가 있는 나이는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청춘에서 노년 이전까지다. 아녜스 바르다의 다큐멘터리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바로 이 지점에 개입한다. 상품으로 판매할 수 없어 버려지는 것, 하지만 사용하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줍는 사람들의 모습을 찍은 이 다큐멘터리는 쓸모의 유통기한을 질문한다. 현대 산업 사회에서 쓸모는 실제 사용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판매할 수 있는지로  결정된다.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치가 있지만 시장에서 거래될 수 없다면 그것은 곧 쓸모 없는 ‘쓰레기’와 같다. 그래서 신선한 야채도 판매할 수 없다면 쓰레기로 버려진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상품으로써 쓸모가 없어진 물건, 하지만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줍는다. 그리고 그 물건에 또 다른 쓸모를 부여한다. 쓸모는 시장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의 인식, 태도에 따른 것이다. 쓸모의 재해석은 사물의, 그리고 삶의 유통기한을 재정의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것은 정확하게 <할머니와 란제리>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많은 사건과 갈등에도 결국 마을 사람을 설득하고 란제리 가게를 운영하는 마르타는 영화 말미에, 속옷엔 유통기한이 없다는 농담을 한다. 농담이지만 이 말은 영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속옷에 유통기한이 없다는 농담은 또한 꿈을 이루는데 유통기한이 없다는 뜻이다. 노년은 유통기한이 지났기에 양로원에서 조용히, 조신하게 지내거나 자식세대가 요구하는대로 무시[discount]당할 시기가 아니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이삭’줍는 사람들이 보여준 것처럼 쓸모와 노년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자연질서가 아니라 사회적 해석이다. 그리하여 유통기한 자체를 다시 사유해야 한다.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며 죽어가고 있는 게 아니라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가 이 자리에 있다고 말하기가 쉬운 것만은 아니다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퀴어가)”이 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란 말과 “이 자리에 있다”란 말의 간극은 매우 크다.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란 말은 존재 가능성은 열어 두지만 실제 존재하고 있는 개인을 다소 모호한 상태로 만든다.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은 없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함께 내포하기 때문이다. 퀴어를 긍정하기 위한 표현이 자칫 퀴어의 존재를 애매하게 만든다. 그래서 난 강의를 할 때면 “이 자리에도 있다”고 말한다. 실제 나 외의 다른 어떤 퀴어가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없어도 상관 없다. “이 자리에도 있다”와 같은 단정적 표현은 퀴어를 모니터 너머에만 존재한다고 알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구체성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요지는, 그 자리에 나 아닌 퀴어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다. 퀴어를 구체적 개인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이런 나의 전략은 대학생 이상이 있는 자리에선 큰 문제가 없다(라고 믿고 있다).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라면? 글쎄.. 쉽지 않다. 한국 사회에선 퀴어 혐오가 상당하고, 초중고등학교의 왕따 이슈가 심각하다. 트랜스젠더도 아니고 게이도 아니지만 여성스러운 남학생이 있을 경우, 그 아이가 트랜스젠더로 혹은 게이로 왕따 당할 수 있다. 여성스럽지 않은 여학생이 있을 경우, 그 학생이 트랜스젠더 혹은 레즈비언으로 왕따 당할 수도 있다. 가능성은 이것 만이 아니다. 평소 어떤 소문이 돌았다면 나의 말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증거가 될 수 있다. 초중고등학교가 단체 생활을 하는 폐쇄 집단이란 점에서 단정적 발언은 다소 위험하다.
몇 년 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성교육 프로그램을 만든 적 있다(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ㅅ; ).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 초안을 작성하고 공부방에 찾아가 시연도 했다. 그때 만난 초등학생 집단이 꽤나 재밌었다. 한 초등학생 ㄱ은 공공연하게 같은 공부방의 친구에게 좋아한다고 말했고 나중에 결혼하자는 말도 했다. 물론 이런 발언만으로 ㄱ을 레즈비언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ㄱ이 레즈이언이다, 아니다가 쟁점도 아니다. 동성 친구에게 나중에 결혼하자고 말했음에도 ㄱ은 그 집단에서 왕따를 당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ㄱ은 그 집단에서 이른바 짱이었다. 나이도 가장 많았지만 가장 힘있는 구성원이었다.
또 다른 구성원 ㄴ은 좀 달랐다. 그때 나는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ㄴ은 나중에 여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는 모른다. ㄴ이 정확하게 “여자가 되고 싶다”고 했는지 그저 그와 비슷한 어떤 뉘앙스의 말을 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아무려나 ㄴ은 그 집단에서 가장 힘이 없고 나이도 어렸다. 또래의 다른 친구가 있었지만 그들은 ㄴ과 친하게 지내지 않으려 했다.
ㄱ만 있었다면 나는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덜 부담스러웠을 거다. 이 집단에도 퀴어가 있다고. 물론 나는 ㄱ을 의도하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ㄱ의 상황을 알고 있어도 부담은 덜 했을 것 같다. 나의 단정적 발언이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미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 사람들이 ㄱ을 레즈비언으로 인식하고 ㄱ의 행동을 해석할 때와 ㄱ을 레즈비언으로 인식하지 않고 ㄱ의 행동을 해석할 때의 효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담이 조금 덜하겠지? 하지만 ㄴ만 있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선 “있다”와 “있을 수 있다”의 뉘앙스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 이런 말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 말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고민해야 한다. “있다”란 말이 ㄴ에게 어떤 식으로건 힘을 줄 수도 있지만 집단의 다른 이들에게 ㄴ을 왕따할 빌미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토요일 어느 청소년 단체 활동가를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그 자리에서 이와 관련한 얘기를 나눴다. 십대에게 어떤 식으로 얘기를 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을 받았고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지만 그것이 가진 위험성도 함께 얘기했다. 같이 얘기를 나누며 그나마 가능한 대안으로 동성애자 인구 비율 같은 통계를 언급하는 것, 타고난다는 말 같은 걸 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다는 말이 오갔다. 정답은 없다. 평소 매우 비판하던 방식의 접근법이 어떤 상황에선 가장 효과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난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물론 정답은 없다. 그날 감을 믿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