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하는 아버지

가족에게 아버지-남성은 존재하는가? 한국 맥락에서 이 질문에 대답은 부정적이다. 아버지-남성은 언제나 향수의 대상, 말없는 권위의 화신, 묵묵하게 혹은 무뚝뚝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존재다. 다정한 아버지-남성은 특별한 사례로 등장하거나 본받을 사례로 등장할 뿐이다. 다른 말로 가족에게 아버지-남성은 거의 언제나 부재한다. 대화를 나눠봤다기보다는 묵묵부답이었고 친밀함을 형성했다기보다는 집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느낌만 있다. 이런 향수는 어머니-아버지의 젠더 역할은 여전히 견고하게 유지토록 하는 한 방법이다. 아버지의 권위와 권력은 부재하는 찰나에 발생한다. 물론 아버지 본인은 소외감을 느낀다고 하지만 이 소외감과 존재하는 듯 부재하는 상태가 아버지의 권력 실천 방식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부재한다면, 그러니까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는 늘 부재한다면 다음 질문을 할 수 있다. 가족등록부에 아버지가 살아있지만 사실상 부재하는 집과 가족등록부에도 아버지가 부재하는 집을 굳이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차피 둘 다 부재하는데 그럼에도 굳이 아버지의 존재감을 환기시키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존재감 환기가 아버지의 권위/권력을 유지하는 주요 방법이란 점도 있지만, 존재감을 환기한다고 해서 정서적 부재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나중이 쓸 원고의 메모입니다.*

[강연홍보] 페미니스트 젠더 이론과 정치학에 대한 재고: 여자/트랜스(female/trans) 남성성 논쟁을 중심으로

제가 팬질하고 있는(!) 지혜 선생님께서 여자/트랜스 남성성으로 발표를 하신다고 하여 이렇게 홍보합니다!
많은 분들이 참여하고 토론하셨으면 좋겠어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발표 요약문에 나와 있고요.
페미니즘 논의에서 남성성, 특히 여자 남성성과 트랜스 남성성이 어떻게 논의되었는지를 정치하게 다루고 있어요. 트랜스젠더 이론, 페미니즘 이론, 레즈비언 이론, 퀴어 이론의 교차점을 고민하는 분이 듣는다면 더욱 흥미롭겠지만 관련 논의 중 어느 하나라도 관심 있다면 강추합니다! 후후.
제목: 페미니스트 젠더 이론과 정치학에 대한 재고: 여자/트랜스(female/trans) 남성성 논쟁을 중심으로
발표자: 지혜
일시: 2012년 10월 12일 금요일 오후 2시
장소: 연세대학교 논지당 세미나실
===발표 요약===
             페미니스트 젠더 이론과 정치학에 대한 재고: 여자/트랜스(female/trans) 남성성 논쟁을 중심으로
                                                                   지혜(문화학 협동과정 강사)
페미니즘의 젠더 사회구성론은 젠더가 선천적인 특질이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임을 규명했지만, 섹스(fe/maleness)를 ‘생물학’의 영역으로, 젠더를 ‘사회화’의 영역으로 이분함으로써 섹스가 젠더를 확정한다는 논리에 정초한다. 여자/트랜스(female/trans) 남성성 이슈는 페미니스트 젠더 사회구성론의 한계와 딜레마를 숙고함으로써 페미니스트 섹스/젠더 이론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수 있는 핵심 의제라고 할 수 있다. 여자/트랜스 남성성은 ‘여성임’(femaleness)과 페미니스트 정체(치)성과의 관계 설정, ‘여성’의 공통 기반으로서 젠더 동일성, ‘남자임’(maleness)―남성성―남성 지배에 대한 일원론적 이해를 균열시키면서 페미니스트 이론의 이원 젠더 패러다임에 비판적인 질문들을 제기한다. 본 연구는 1970년대 미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즘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여자/트랜스 남성성과 페미니즘 사이의 긴장과 갈등의 역사를 비평적으로 개괄함으로써, 페미니스트 섹스/젠더 이론의 교착 지점들을 문제화한다. 한편, 페미니즘과 여자/트랜스 남성성의 주요 의제들―남성 동일시(male-identification), 내면화된 여성혐오, 남성 특권의 추구, 반(anti) 페미니즘 혐의 등―을 고찰하는 것은 공인된 ‘주류’역사에 대한 재조명과 가려진 역사의 재발굴을 수반한다. 따라서 연구자는 여자/트랜스 남성성 이슈를 페미니즘과 다른 젠더 담론들 사이의 제휴나 페미니즘‘들’의 내부적 차이가 어떻게 축약되고 삭제되어왔는지를 탐문하는 역사 텍스트로 접근한다.  
본 연구는 여자/트랜스 남성성 논쟁에 내재하는 젠더, 인종, 계급, 세대 정치학의 상호교차에 주목하면서 페미니즘과 대립이 발생하는 지점들을 면밀하게 분석한다. 먼저 1970년대 레즈비언-페미니즘의 부치(butch)혐오를 살펴보고, 페미니스트 이상(ideal)으로 표방되었던 양성성(androgyny) 추구의 계급적, 인종적 기반을 조사한다. 이어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다양성을 고려하면서, 남성성과 남성 동일시 비판에 연루되는 젠더 본질주의의 양상들을 논증한다. 마지막으로, 트랜스남성에 대한 남성 특권 논쟁을 중심으로 트랜스혐오 페미니스트들의 문제적 가정들을 지적한다. 궁극적으로, 부치/ftm(female to male)트랜스 페미니즘의 실존과 의미를 가시화함으로써 페미니즘과 여자/트랜스 남성성의 관계에 대한 지배담론을 재구성하고 페미니스트 젠더 정치학의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영화 <고백>, 소설 <모방범> 그리고 남성성

영화 <고백>을 봤습니다. 다 본 후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 문득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모방범>과 닮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소설 구조, 범죄 형식, 범인의 스타일 등 <모방범> 영향을 많이 받았단 느낌입니다. 둘 중 어느 작품이 더 좋으냐라는 단순한 질문을 하신다면, 비등합니다. 하나는 소설이고, 하나는 영화니 비교가 안 되고요. 하지만 캐릭터 설정에선 <모방범>이 더 좋아요. 캐릭터 설정에서 미미 여사는 등장인물의 다양한 면을 설명합니다. 등장인물이 생동감 있죠. 영화 <고백>의 등장인물에겐 반전이 중심입니다. 그것도 인물의 반전이 아니라 사건의 반전이요. 인물의 성격은 다소 단조로워요. 그래서 미미 여사의 등장인물은 등장인물이 소설을 끌어가는 느낌이라면, <고백>의 등장인물은 장기판의 말과 같은 느낌입니다.뭐, 그래도 <고백>이란 영화 자체의 매력이 상당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어떤 코드가 여럿 있고요.
<모방범>과 <고백>을 읽으며 가해자의 성격이 흥미로웠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두 소설에서 나타나는 일본 남성의 남성성과 어머니란 존재를 고민했습니다. <모방범>의 두 가해자 중 한 명은 자신의 어머니를 혐오합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이 아니라 죽은 누나만을 찾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혐오는 어머니에게 인정 받고 싶은 욕망의 변주입니다. 뻔한 이야기죠. 또 다른 가해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인정 받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고, 또 여러 여성을 죽입니다. <고백>의 가해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해자는 자신을 떠난 어머니에게 주목 받고 싶어서, 인정 받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살아 있는 동물을 죽이고선 이를 전시하는 식이죠. 혹은 이런 저런 발명품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며 어머니-여성에게 인정 받고 싶어합니다. 자신이 천재라고 믿는 가해자가 하나 같이 자신의 어머니-여성에게 인정 받기 위해 애걸복걸하는 모습이죠. 여성혐오와 여성에게 인정 받고 싶고 칭찬 받고 싶어하는 욕망은 결국 같은 얼굴입니다. 이 얼굴은 참으로 찌질하고요. 이것이 어쩌면 지금 일본에서 나타나고 있는 남성성의 한 양상인 걸까 하는 고민을 잠시 했습니다.
물론 이런 찌질함은 일본만의 특징은 아니겠지요. 한국에선 더 익숙한 모습입니다. 이를테면 병역의무에 목숨거는 모습이죠. 군대 경험을 자랑스럽게 혹은 성역으로 얘기하는 모습을 접할 때마다, ‘얼마나 내세울 것이 없으면…’이란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어요. 다른 말로, 한국 사회에서 남성 간의 계급 차이를 무마하는데 군대는 참으로 강력한 도구입니다. 계급으로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할 수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하고 적법한 방법은 군대 뿐이란 거겠죠. (+변방의 독립 블로그는 이런 글을 써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케케. -_-;; )
각설하고, 소설 <모방범>과 영화 <고백>은 여러 모로 흥미로워요. 물론 <모방범>을 두 번 읽을 일은 없을 겁니다. 1,600쪽에 달하는 책을 다시 읽을 엄두가 안 난달까요. 크크. ;;; 하지만 한 번은 읽어도 좋아요. 정말 재밌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