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결혼은 바이/트랜스젠더를 사유하는가

몇 년 전부터 소위 LGBT/퀴어 공동체에서 동성결혼은 꽤나 중요한 이슈인 듯하다. 관련 강의도 있었고 여러 행사가 있었다. 동성결혼을 둘러싼 논의는 분명 중요한 움직임이다. 결혼이란 형식을 이성애가 독점하는 것에 문제제기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 현상이다. 물론 이것은 결혼의 위상 자체는 흔들지 않으며, 나는 결혼 제도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믿지만, 이런 논의의 중요성까지 무시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나는 늘 궁금하다(어떤 사람에겐 진부한 궁금함이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동성결혼 논의에 트랜스젠더는 존재하는가, 바이는 존재하는가? 다른 말로 지금 진행하고 있는 동성결혼은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정체화하는 두 사람의 결합만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동성 간의 결합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것이 궁금한 이유는 많은 경우, 동성애자의 결혼 권리만 말한다는 혐의 때문이다. 동성결혼을 긍정하는 사람이 바이의 결혼엔 부정적 자세를 취하고 때론 바이를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법과 제도의 테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성결혼은 무시하고 은폐하는 경우도 많다. 적잖은 트랜스젠더가 호적상의 성별을 바꾸지 않고, 동성결혼을 선택해서 살아가고 있다. 때론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동성결혼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런 상황은 동성결혼이 충분히 사유하고 있는가? 아니, 내가 느끼기에 동성결혼 논의는 철저하게 동성애규범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것은 오직 동성애-비트랜스젠더의 세계이자 논의다. 현재의 전반적 논의 수준에서 동성결혼은 동성애-비트랜스젠더만의 이슈다. 동성결혼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논의 방식이 이 이슈를 동성애-비트랜스젠더만의 배타적 이슈로 만들고 있다.
혹시나 트랜스젠더의 동성결혼은 특권적 실천이라서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만약 비이성애-트랜스젠더가 법적으로 가능한 결혼을 한다고 하자. 이것은 아마도 호적 상의 성별을 정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일 가능성이 크다. 자, 통상 트랜스젠더의 호적 상 성별정정은 가장 어려운 일이며 현재의 사법제도에서 가장 부당한 일로 평가된다. 비이성애-트랜스젠더는 이런 제도에서 (다양한 이유로) 호적 상 성별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니 통상의 평가에 따르면 이것은 제도가 가한 폭력이며, 그 트랜스젠더는 이 폭력의 피해자다. 그리고 그는 동성 파트너와 법의 테두리에서 결혼을 했다. 이것은 특권의 실천인가, 피해인가? 사회적 ‘소수자’ 혹은 비규범적 존재의 삶을 이해함에 있어 ‘특권’ 운운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이건 타인을 이해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저 자기연민, ‘불쌍함의 경쟁’일 뿐이다. 호적 상 성별정정을 하지 않은 비이성애-트랜스젠더의 합법적 동성결혼은 피해와 특권이란 인식틀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양식이다.
혹시나 호적 상 성별정정을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의 동성결혼은 그저 이성애 결혼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만약 내가 내 애인과 결혼을 결정했다고 하자(가능성은 0에 수렴합니다). 그렇다면 이 결혼을 호적 상 성별정정을 하지 않은 레즈비언 mtf 트랜스젠더와 바이-비트랜스젠더의 이성애적 결혼이며 이성애 제도가 보장하는 권력과 권리을 탐하는 행위라고 비난할 것인가, 아니면 법적으로 가능한 동성결혼을 행한 것으로 축하할 것인가? 당신이라면 이 사건에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트랜스젠더가 일상에서 겪는 이런 ‘진부한’ 이슈조차도 지금까지의 동성결혼 논의에선 사유하지 않았다. 이제까지의 동성결혼이라는 상상력엔 오직 동성애-비트랜스젠더만 존재할 뿐, 바이/트랜스젠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 소위 ‘이 바닥’에서 얘기하는 동성결혼이건 결혼이건 관련 어떤 이슈에도 바이와 트랜스젠더는 없다. 자, 그럼 흔히 얘기하는 LGBT란 도대체 무엇인가?

가족 역할 모델의 악순환

아빠처럼 살지 않을 거야,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종종 아빠처럼, 엄마처럼 산다. 자신이 살지 않겠다고 얘기하는 바로 그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렇게 살려고 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해서다. “~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말, 그리고 이런 다짐에서 상상할 수 있는 역할 모델은 원치 하는 삶 뿐이다.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의 양식만을 유일한 삶의 양식으로 되새기는 일과 같다.

부모처럼 살지 않을 거야, 나는 어느 연예인 부부처럼 살거야…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 중 일부도 종종 원치 않는 삶의 방식을 되풀이한다. 살고 싶은 방식을 성취하지 못 해서가 아니다. 성취했음에도 그것은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 부/모의 그것과 유사하다. 살지 않겠다고 얘기하는 삶의 양식과 살고 싶다고 얘기하는 삶의 양식이 별반 다르지 않은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둘 다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에 맞춘 형식이라거나…
그래서 그냥 아예 다른 식의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결혼은 하지만 부/모처럼 살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아예 결혼 제도 자체를 문제삼는다거나..


그러니까 이 글은 동성결혼을 둘러싼 어떤 반응에 관한 글이다.

김조광수-김승환 동성결혼 행사에 붙여

관련기사
결혼식 하객을 모집합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왜 결혼을 하려 하느냐고. 사랑하니까요. 더 필요한 게 있나요?” http://goo.gl/Cy7Tix
김조광수-김승환 “누군가는 가야할 길…우리가 먼저 가는 것” http://goo.gl/3EvC9B
김조광수·김승환 “왜 결혼하냐고? 사랑하니까” http://goo.gl/tDaRPl
로맨스와 클리셰는 다른데 클리셰를 나열하면서 로맨스라고 주장하면 곤란하다. 로맨스도 없고 로망도 없고 진부함과 관습만 있다. 진부함, 관습, 그리하여 규범적 실천만 나열하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래, 그것 역시 사랑일 수 있다. 아니, 그것 역시 사랑이다. 사랑이란 규범의 반복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 사랑이 사회적 변화를 위한 행동이라면 곤란하다. 가장 규범적인 행동만 반복하면서 그 행동이 사회적 변화를 위한 것이라면, 무슨 변화를 위한 것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벨 훅스는 자신의 책에서 여성운동이 남성과 동등해지는 운동이라고 얘기할 경우, 도대체 어떤 남성과 동등해지려는 것인가를 질문했다. 중산층-비장애-백인-여성은 하층-비장애-흑인-남성과 동등해지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비슷한 계층 혹은 자신보다 좀 더 나은 남성과 동등하려 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벨 훅스는 중하층 계급의 여성, 비백인 여성은 남성과 동등해지는 게 결코 좋은 게 아님을 처음부터 알았다고 지적한다. 노동계급-흑인-남성은 상당한 피억업자기도 하다. 남성과 동등해진다고 여성의 “권익”이 “신장”되지 않는다. 누군가와 동등해지고 누군가와 같은 권리를 갖는다고 해서 상황이 개선되는 게 아니란 뜻이다. 이럴 때 동성결혼이 동성애자의 평등권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어떤 계급의 이성애결혼 양식과 동등해지려는 것일까?
운동을 통해 평등한 상황을 얘기할 때, 역할 모델은 누구인가? 즉 누구와의 평등/동등을 얘기하는 걸까? 만약 이성애자가 하니까 비이성애자도 누리겠다고 얘기한다면 그건 기존 질서의 문제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억압 제도를 강화하는 행동일 뿐이다. 나는 LGBT 운동이건 퀴어 운동이건 뭐건, 이런 식의 동화주의를 지향하는 방식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오인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행동이 동화주의가 아님에도 동화주의로 독해되는 경우와 대놓고 동화주의를 지향함은 다르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의 ‘당연한’ 결혼 이슈가 정말로 이성애규범적/동성애규범적 행동의 전형이라고 읽고 있다. 김조-김 커플의 행사가 둘만의 ‘사적’ 행사가 아니라 명백한 공적 사건이라면, 꼭 동성결혼이라는 형식이어야 할까? 이번 행사가 다양한 가족 구성권을 위한 쇼라면, 동성결혼이 최선인지 정말 묻고 싶다. 나는 동성결혼 형식은 아니어야 한다고 믿는다. 동성결혼 형식이라면, 꼭 지금과 같은 내용이어야 하는지도 묻고 싶다. 이성결혼만을 규범화하는 현재 사회 제도를 문제 삼겠다고 할 때, 동성결혼을 주장해야 하는지 결혼제도 자체를 문제 삼을지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을 구성하고 효과를 야기한다.
김조-김 결혼쇼에서 가장 불쾌한 지점은 이미 존재하는 다양한 ‘동성’결혼 혹은 비이성애결혼을 무시하는데 있다. 기혼이반, 결혼하는 바이, 결혼하는 트랜스젠더, 트랜스젠더-비트랜스젠더 동성 관계의 공적 결혼, 신문기사에 남아 있는 비트랜스-비트랜스 동성 관계의 결혼은 현존하는 결혼이 이성애-비트랜스젠더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럼에도 현재의 행사는 역사와 복잡한 양상을 모두 무시하고 있다. 이 찰나, 김조-김 커플 혹은 그 지지 집단이 얘기하는 동성결혼에 포섭되는 존재는 누군지 묻고 싶다. 이 행사가 상상하는 ‘동성결혼’에 속하는 이들이 누군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김조-김 커플이 얘기하는 동성결혼의 구별짓기엔 이성애-동성애(혹은 게이남성)만 있다는 인상이다. 기혼이반, 트랜스-비트랜스 동성결혼 등은 아예 구별짓기의 틀 바깥으로 추방된다. 현재 이슈 구도에서 기혼이반 등은 논의의 대상조차 못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결혼을 얘기하고 싶다면 좀 더 다양한 맥락에서 다르게 행사를 진행할 수 없었을까? 난 이 지점이 가장 불쾌하다.
아우, 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