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개의 문이 한 번에 열리는 시간: 나방, 고종석, 교장, 글쓰는 공간, 시간

01
어느 선생님께서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대로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죠. 술자리를 비롯하여 일상에서 성폭력을 빈번하게 행하면서도 진보연 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 행동하는대로 혹은 몸 가는대로 생각하기엔 너무 고통스러워서 생각대로 행동하고 싶은 건지도 모릅니다. 몸 가는대로 생각하고, 그렇게 마음을 놓아보내면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에 차마 몸 가는대로 할 수 없는 거죠. 하지만 또 알고 있죠. 결국 몸 가는대로 간다는 걸. 결국 삶이란 불을 너무 사랑하여 불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 같은 것일까요? 제 몸이 까맣게 타버린다는 걸 알면서도 날아드는 그런 ….

02
고종석 씨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문장에 반했습니다. 하지만 내용엔 불편한 구절이 적잖아요. 뭐, 어차피 문장을 읽으려고 책을 샀지, 내용을 읽으려고 산 건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잠들기 위해 누워선 몇 쪽을 읽는데 문장이 너무 좋아 잠드는 게 아쉬울 때가 많아요. 그래서 하루에 세 꼭지 정도만 읽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물론 부작용도 있습니다. 그의 문장을 읽고 나면 저의 문장이 너무 비루하여 어떻게 수습할 수 없는 감정에 빠진다는 거죠. ;ㅅ;

03
얼마 전 어느 고등학교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내세워 이슈가 되었죠. 교장은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주려고 했다나 어쨌다나. 요즘 전 그 교장이 특이할 것 없는, 매우 흔한 모습이라고 중얼거립니다. 학생 성적이 학교 평균에 안 좋은 영향을 주니 전학 가라는 교장, 두발이 교칙에 맞지 않다고 학생에게 욕을 하는 교장, 학교 발전 기금이란 명목의 돈을 안 냈다고 학생을 괴롭히는 교장  …. 따지고 보면 제가 경험한 교장들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내세운 교장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물론 모든 교장이 그렇진 않습니다. 일제교사 대신 체험학습을 신청한 학생들을 허가해줬다고 처벌을 받았지만 계속해서 체험학습을 허가하겠다는 교장도 있으니까요. 교장은 모두 나쁘다는 식의 일반론을 펼치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언론을 타는 부정적인 교장이 특이한 경우가 아니란 말을 하고 싶은 거겠죠. 제 글에서 결론이 생뚱맞은 것 역시 특이할 것 없다는 거 아시죠? ;;;

04
가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상하죠? 여타의 인쇄매체나 출판물보다 이곳, [Run To 루인]이란 블로그가 제게 더 큰 책임감을 요구합니다. 당연한 말이긴 하죠. 제가 직접 꾸려가는 곳이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곳에선 하기 힘든 말, 상당히 조심하는 말을 다른 매체에 기고하는 글에선 거리낌 없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매체 대부분은 이곳을 찾는 분의 수보다 더 많은 이들이 구독하는 매체인데도 그렇습니다. 이곳이 제겐 애증인 공간일 수도 있다는 의미일까요? 아, 애증의 공간은 맞아요. 하지만 이곳에선 종종 구체적인 표현을 할 수 없어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제가 글을 쓰는 공간이 이곳만이 아니란 점이죠. 네, 제가 글을 쓸 곳이 이곳 뿐이었다면 제 삶의 일부는 흔적을 남기지 못 하고, 제 몸 깊은 곳에 침잠하고 용해하여 형태를 못 가졌을 지도 모릅니다. 특정 시간에 기록해야만 의미가 있는 형태를 못 가져 예기치 않은 순간에 엉뚱한 모습으로 튀어나왔겠죠. 다행입니다. 이곳이 제가 흔적을 남길 유일한 공간이 아니어서.

아무려나 제 몸은, 제 몸의 일부는 여러 공간으로 흩어지고 하나로 통합할 수 없는 상태로 부유합니다. 거울에 비친 제 몸엔 꿰맨 자리와 땜질한 자리가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미쳐 꿰매지 못 한, 땜질하지 못 한 제 흔적들이, 제 몸의 일부들이 언제나 제 방에 둥실둥실, 저 허공 어딘가에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이 풍경. 아름다운 풍경.

05
하나의 일이 끝나고 있는 시간입니다. 전 결국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팔자도, 쉴 수 있는 팔자도 아니란 걸 깨닫고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제가 인복이 많다는 걸,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애쓰면 결국 저와 같은 혹은 비슷한 일을 하고 싶거나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 시간입니다.

글을 쓰고 싶다: 문장, 내용, 부끄러움

한글로 옮긴 벨 훅스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쉽지 않은 책이라고 느꼈다. 옮긴이는 쉬운 책이라 부담없이 번역했다고 역자후기에 썼는데 한국어로 읽는 나는 어려웠다. 아직 내가 많이 부족해서 그런가보다 했다. 하지만 나중에 영문으로 읽었을 때 단어만 안다면 영문법 초급과정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언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쉬운 문장은 어려운 문장, 복잡한 문장으로 꼬였다. 그땐 이런 현상을 비난하기 바빴다.

돌이켜보면 참 부끄러운 일이다. 언어를 바꾸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을 몰랐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물론 어떻게든 쉽고 가독성 있는 글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기에 끊임없는 비판은 필요하지만 “번역이 엉망이다”와 같은 표현은 비판이 아니라 비난에 가깝다. 그래도 가끔은 언어를 옮기는 과정에서 쉬운 글이 어려운 글로 바뀌는 현상이 무척 신기하다. 물론 내가 옮겼다면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난수표가 되었겠지만. 그러니 그런 비난은 사실 내게로 향해야 했다. 나의 부족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타인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어젠 책방에서 김원우 소설을 훑어보는데 ‘아, 이건 시구나’라고 중얼거렸다. 내가 주로 읽는 글은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긴 책, 영어로 쓴 책이나 논문, 한국어로 쓴 논문이나 책. 영어는 일단 무시하고, 두 종류의 한국어 책 중에서 한국 학자들이나 이론가들이 쓴 한글 논문을 읽을 때면 난감할 때가 많다. 가끔은 영어보다 가독성이 떨어진다. 한국에서 학술적인 글을 쓴다는 사람 중에서 글을 잘 쓰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비문은 기본이고 간단한 문법을 틀린 글도 상당하다. 책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간단한 교정도 하지 않는 걸까 싶을 때도 많다. 번역 소설은 괜찮은 편이지만 번역투가 많아 난감하다. 그래서 이럴 때면 문장은 무시하고 건성으로 내용만 읽는 경우도 많다. 이런 상황이라, 김원우 소설을 읽으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시적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한동안 문장이 좋은 한국소설을 찾았는데, 이 작가를 만나려고 그랬나보다. 안타까운 건 현재로선 읽을 시간이 없다는 거. ㅠ_ㅠ

다른 사람의 글을 읽다보면, 중요한 건 내용인데 문장에 욕심 내는 나를 깨닫는다. 내용이 좋으면 문장이 별로라도 읽기 마련인데, 나는 내용도 별로고 문장도 별로면서, 문장에만 욕심을 낸다. 겉멋이고 사상누각이다. 그리하여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는 바보같은 상황에 처한다. 그렇다고 포기한다는 건 아니다. 그럴리가. 난 이제 글쓰기를 배우고 있고, 공부를 하고 있는 건데, 벌써 포기할 리가 있다없다. 10년을 하고도 안 된다면 그때 포기하면 된다. 그때 포기해도 충분하다. 그저 현재가 안타까울 뿐이다. 현재의 초라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인정하기 무서워 외면하는 거다. 자아비판은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는 방법이다. 지독한 자기애다. 나의 자아비판은, 나의 반성은 사실 나를 다독이고 위로하는 방식이다. 자아비판과 같은 언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비판을 피하려는 꼼수다.

나도 언젠간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