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연 제66차 콜로키움. [라벤더 위협과 바이섹슈얼 선택]

많은 분이 참가하시면 좋겠습니다! 히히히.
여이연 제66차 콜로키움. [라벤더 위협과 바이섹슈얼 선택]
발표: 이브리
장소: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발표자 소개: 바이섹슈얼, 퀴어, 페미니즘 관련 글을 읽고 번역하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연구원 중 하나이며 「퀴어아카이브 퀴어락」 운영위원입니다.
발표 내용:
1969년은 전미여성협회의 초대 회장 베티 프리단이 ‘라벤더 위협 Lavender Menace’ 라는 유명한 문구가 들어간 연설을 한 해로 알려져 있습니다. “라벤더 위협”이란 게이/레즈비언/비이성애자를 상징하던 라벤더 색을 빗대어 비이성애를 위협으로 인식한 표현입니다. 프리단을 비롯한 몇몇 페미니스트는 여성협회의 레즈비언과 그들이 제기하는 의제를 여성운동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여기거나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폄하하고, 심지어 협회 내 레즈비언 활동가의 존재까지 부인하며 레즈비언 운동과 거리를 두는 의지를 천명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레즈비언 활동가들은 시위를 하고, 선언문을 발표하며 활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바야흐로 레즈비언 페미니즘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1년이 지난 1990년, 미국 메사추세츠 노샘프턴의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자긍심 행진(pride parade)에서 1989년에는 표기했던 바이 섹슈얼을 제외하고 “레즈비언 & 게이 퍼레이드”로 재개명을 선포했습니다. 이를 둘러싸고 커뮤니티에서는 열띤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이 논쟁은 단순한 행진의 이름만을 둔 의견 나눔이 아니라 커뮤니티에 바이섹슈 얼을 포용해야 하는가에 관한 분쟁이었습니다. 바이섹슈얼을 둘러싼 유사한 논쟁과 분쟁이 비슷한 시기에 영국/미국의 여성이반 커뮤니티에서 발생했으며, BDSM 및 레 즈비언 에로티카와 마찬가지로 이 당시의 레즈비언 커뮤 니티에서 ‘바이섹슈얼’은 분쟁의 불씨를 소환하는 키워드 였습니다.
최근 커뮤니티 안팎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 바이 섹슈얼로 정체화하는 인구가 증가 중이라는 사실은 종종 동성결혼권리를 성취해 낸 서구의 ‘동성애자 운동의 종말’을 보여주는 증상으로 독해되곤 합니다. 바이섹슈얼 정체성은 운동과 정치에 대한 위협으로 재현되고 있는 셈입니다. 현재 한국의 성적소수자 커뮤니티에서도, 그 열기는 덜할지 모르지만 비슷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듯 합니다. 관련된 운동과 연구의 지형까지 포함해서 바이섹슈얼은 대략 두 가지 모습으로 재현됩니다. 하나는 곧 커뮤니티를 떠날 비윤리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존재, 기꺼이 결혼으로 이성애 정상성을 구현하며 그것을 열망하기까지 하는 존재, 필연적으로 성적소수자의 권리투쟁에의 헌신과 열의가 동성애자보다 못한 믿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경계를 횡단하는 존재, 이성애규범 뿐 아니라 동성애규범성까지 깨버리는 문제적이고 전복적인 존재로서의 바이섹슈얼 이미지가 있습니다. 이 두 이미지는 서로를 지탱하는 동전의 양면이며, 그 뿌리가 되는 인식론은 서로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필요한 맥락에서 편히 쓸 수 있을 정도로 연구자의 구미에 맞게 바이섹슈얼을 재단한 다음 소환할 뿐입니다. 그렇게 소환된 바이섹슈얼리티가 무언가에 대한 욕망인지, 실천인지, 정체성인지 아니면 그 모두인지,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누구의 욕망이고 어떤 실천이며 무엇 과의 동일시인지, 가장 중요하게는 이러저러한 개념으로 바이섹슈얼을 규정하고자 하는 연구자 자신의 의도와 욕망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은 아직 충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이번 콜로키움에서, 평소에는 별 필요 없지만 게이와 레즈비언이라는 이름으로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그 무엇(?)이 등장할 때에 한해서 편리하게 불러냈다가 다시 비가시의 영역으로 추방할 수 있는 양순한 바이섹슈얼이 아니라, 게이/레즈비언 정치와 불화하고 충돌함으로써 퀴어 인식론에 자신을 기 입하고자 하는 바이섹슈얼 이론 중 일부를 같이 검토하고 토론해보는 시간을 나누고자 합니다.

웹진 [바이모임] 제2호 발행을 위해 기고를 모집한다고 합니다.

웹진 [바이모임]의 두 번째 호를 발행하기 위해 기고를 받는다고 합니다.
‘기존’의 섹슈얼리티 논의에 문제의식이 있거나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다면, 웹진 [바이모임]에 투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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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및 자세한 투고 요령 읽기: http://bimoim.tistory.com/18
안녕하세요, 창간호를 읽어 주시고 블로그에 들려 주시는 여러분. 정말 반갑고 감사합니다.
웹진 [바이모임]은 올 하반기에 제2호로 여러분을 다시 찾아갑니다.
다음 웹진 주제는 [연애]입니다.
바이섹슈얼인 당신의 연애 이야기, 바이섹슈얼이면서 동시에 무성애자, 트랜스젠더, 기혼자, 폴리아모리스트, BDSM 퍼포머, 비혼주의자, 비연애주의자일 수도 있는 당신의 연애 이야기, 그리고 이 모든 것이거나 이중 무엇도 아니면서 친구이거나 부모이거나 자식이거나 학생이거나 직원이거나 애인이거나 배우자이며 또 다른 수많은 역할과 개성을 가진 사람이기도 할 당신의 연애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나에게 연애란 무엇이고 내 정체성과 연애는 서로 어떻게 얽히는지, 또 연애 상대의 정체성과 나의 정체성이 어떤 식으로 교차했는지 듣고 싶습니다. 했던 연애와 하지 않았던 연애, 후회되는 연애와 행복한 연애, 연애를 하고 싶은 이유와 하기 싫은 이유 모두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웹진에서 나누고 싶은 분들의 기고, 그리고 웹진 제1호(창간호) [커밍아웃]에 대한 의견도 함께 모집하고 있습니다. 기고하실 때는 아래의 기고 방침을 반드시! 확인해 주세요. (*기고 방침은 이 포스트에 pdf로 첨부하여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동성결혼은 바이/트랜스젠더를 사유하는가

몇 년 전부터 소위 LGBT/퀴어 공동체에서 동성결혼은 꽤나 중요한 이슈인 듯하다. 관련 강의도 있었고 여러 행사가 있었다. 동성결혼을 둘러싼 논의는 분명 중요한 움직임이다. 결혼이란 형식을 이성애가 독점하는 것에 문제제기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 현상이다. 물론 이것은 결혼의 위상 자체는 흔들지 않으며, 나는 결혼 제도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믿지만, 이런 논의의 중요성까지 무시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나는 늘 궁금하다(어떤 사람에겐 진부한 궁금함이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동성결혼 논의에 트랜스젠더는 존재하는가, 바이는 존재하는가? 다른 말로 지금 진행하고 있는 동성결혼은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정체화하는 두 사람의 결합만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동성 간의 결합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것이 궁금한 이유는 많은 경우, 동성애자의 결혼 권리만 말한다는 혐의 때문이다. 동성결혼을 긍정하는 사람이 바이의 결혼엔 부정적 자세를 취하고 때론 바이를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법과 제도의 테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성결혼은 무시하고 은폐하는 경우도 많다. 적잖은 트랜스젠더가 호적상의 성별을 바꾸지 않고, 동성결혼을 선택해서 살아가고 있다. 때론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동성결혼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런 상황은 동성결혼이 충분히 사유하고 있는가? 아니, 내가 느끼기에 동성결혼 논의는 철저하게 동성애규범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것은 오직 동성애-비트랜스젠더의 세계이자 논의다. 현재의 전반적 논의 수준에서 동성결혼은 동성애-비트랜스젠더만의 이슈다. 동성결혼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논의 방식이 이 이슈를 동성애-비트랜스젠더만의 배타적 이슈로 만들고 있다.
혹시나 트랜스젠더의 동성결혼은 특권적 실천이라서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만약 비이성애-트랜스젠더가 법적으로 가능한 결혼을 한다고 하자. 이것은 아마도 호적 상의 성별을 정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일 가능성이 크다. 자, 통상 트랜스젠더의 호적 상 성별정정은 가장 어려운 일이며 현재의 사법제도에서 가장 부당한 일로 평가된다. 비이성애-트랜스젠더는 이런 제도에서 (다양한 이유로) 호적 상 성별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니 통상의 평가에 따르면 이것은 제도가 가한 폭력이며, 그 트랜스젠더는 이 폭력의 피해자다. 그리고 그는 동성 파트너와 법의 테두리에서 결혼을 했다. 이것은 특권의 실천인가, 피해인가? 사회적 ‘소수자’ 혹은 비규범적 존재의 삶을 이해함에 있어 ‘특권’ 운운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이건 타인을 이해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저 자기연민, ‘불쌍함의 경쟁’일 뿐이다. 호적 상 성별정정을 하지 않은 비이성애-트랜스젠더의 합법적 동성결혼은 피해와 특권이란 인식틀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양식이다.
혹시나 호적 상 성별정정을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의 동성결혼은 그저 이성애 결혼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만약 내가 내 애인과 결혼을 결정했다고 하자(가능성은 0에 수렴합니다). 그렇다면 이 결혼을 호적 상 성별정정을 하지 않은 레즈비언 mtf 트랜스젠더와 바이-비트랜스젠더의 이성애적 결혼이며 이성애 제도가 보장하는 권력과 권리을 탐하는 행위라고 비난할 것인가, 아니면 법적으로 가능한 동성결혼을 행한 것으로 축하할 것인가? 당신이라면 이 사건에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트랜스젠더가 일상에서 겪는 이런 ‘진부한’ 이슈조차도 지금까지의 동성결혼 논의에선 사유하지 않았다. 이제까지의 동성결혼이라는 상상력엔 오직 동성애-비트랜스젠더만 존재할 뿐, 바이/트랜스젠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 소위 ‘이 바닥’에서 얘기하는 동성결혼이건 결혼이건 관련 어떤 이슈에도 바이와 트랜스젠더는 없다. 자, 그럼 흔히 얘기하는 LGBT란 도대체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