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하는 아버지

가족에게 아버지-남성은 존재하는가? 한국 맥락에서 이 질문에 대답은 부정적이다. 아버지-남성은 언제나 향수의 대상, 말없는 권위의 화신, 묵묵하게 혹은 무뚝뚝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존재다. 다정한 아버지-남성은 특별한 사례로 등장하거나 본받을 사례로 등장할 뿐이다. 다른 말로 가족에게 아버지-남성은 거의 언제나 부재한다. 대화를 나눠봤다기보다는 묵묵부답이었고 친밀함을 형성했다기보다는 집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느낌만 있다. 이런 향수는 어머니-아버지의 젠더 역할은 여전히 견고하게 유지토록 하는 한 방법이다. 아버지의 권위와 권력은 부재하는 찰나에 발생한다. 물론 아버지 본인은 소외감을 느낀다고 하지만 이 소외감과 존재하는 듯 부재하는 상태가 아버지의 권력 실천 방식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부재한다면, 그러니까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는 늘 부재한다면 다음 질문을 할 수 있다. 가족등록부에 아버지가 살아있지만 사실상 부재하는 집과 가족등록부에도 아버지가 부재하는 집을 굳이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차피 둘 다 부재하는데 그럼에도 굳이 아버지의 존재감을 환기시키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존재감 환기가 아버지의 권위/권력을 유지하는 주요 방법이란 점도 있지만, 존재감을 환기한다고 해서 정서적 부재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나중이 쓸 원고의 메모입니다.*

명절, 시간, 부재

ㄱ. 뭔가 말을 쓰면 좋겠는데 딱히 할 얘기가 없다.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닌데 말로 풀 상태가 아니다.

ㄴ. 참 묘하지. 추석 잘 보내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뭔가 껄끄럽다. 그럼에도 추석 잘 보내라는 말을 했다. 특정 누군가에게 해선 안 되는 말이란 느낌이기보다, 그냥 이 말 자체가 묘하게 불편하다.
ㄷ. 고인은 당연히 부재한다. …그런가? 고인은 정말 부재하나? 부재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부재할까? 만약 부재에 형태가 있다면 그것은 존재 증명 아닌가? 그렇다면 확인할 수 있는 부재는 존재함이지 부재라고 부를 수 없지 않을까? 부재를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부재가 아니라 존재고, 부재를 확인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인식 외부로 추방/배제되었다는 점에서 부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부재란 것은 불가능한 것 아닐까?
ㄹ. 가을이 오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도 바뀌고 세월도 흐르고 있다. 지난 봄엔 봄이 오는 줄 몰랐다. 봄꽃이 피기 전 부산에 갔는데, 서울에 돌아오니 봄꽃이 지고 있었다. 가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ㅁ. 어떤 두려움이 있다. 내년 봄엔 아무 일도 없길 바랄 뿐이다.
ㅂ. 동무가 있어, 벗이 있어 삶을 잘 지탱하고 있다.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그리고 고맙다.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