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곁에서

결국 우리는 다 죽는다. 태어나는 순간 죽을 운명으로 살아간다. 허무하단 얘기가 아니다. 인생 덧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존재에겐 시간이 흐른다는 뜻이다. 우린 언제나 시간을 살아가고 시간을 겪으며 존재한다는 뜻이다. 아무려나 결국 죽는다지만 우리에게 혹은 적어도 내게 죽음은 그리 가깝지 않다. 이제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하며 인생을 살지는 않는다. 내일 아침엔 잠에서 영원히 깨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며 잠들지 않는다. 내일 깨어날 것을 기대하고 이런 기대로 약속을 잡는다. 정말 내일 아침에도 일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지만 깨어날 거란 기대로 살아간다. 그러니 적어도 내겐 나의 죽음이 다소 먼, 막연한 느낌이다.

어머니가 달라졌다. 수술 결과에 따라 생의 갈림길에서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다는 직접적 가능성에 직면하며 어머니가 변했다. 그전까지 어머니는, 언젠가 죽겠지만 당장은 아니라고 생각하신 듯하다. 큰 수술을 앞둔 지금의 어머니는 삶을 조금씩 정리하고 있다. 이를 테면 몇 년 뒤에 사용하려고 여기저기에 쟁여둔 생필품을 모두 털어내고 있다. 언니에게, 내게 그 모든 것을 털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수술의 예후가 괜찮다고 해도 또 다른 병이 있으니 어머니로선 삶에 어떤 미련을 조금씩 털어야겠다는 고민을 하시는 듯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정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는 말씀도 하셨다. 이곳에서 오래오래 살겠다는 기대로 어렵게 구했는데 1년도 안 되어 정리할 마음이 든 듯하다. 당장 무슨 일이 생겨도 놀랍지 않은 상황에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물론 또 다시, 어머니가 죽기 전에 내가 결혼했으면 하는 바람도 더 강해졌다. 결국 나는 불효를 하겠지만 어머니는 삶의 규범성, 죽음의 규범성을 완수하고 싶은 바람을 더 강하게 품기 시작했다. 서로 이룰 수 없는 욕망과 기대가 엄청 부딪힐 테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커다란 상처를 주고 받겠지. 어머니는 이제,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얼른 결혼하라고 할 테고(이미 시작했다) 나는 그 말을 외면하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결국 어머니를 괴롭히는 결과를 야기하겠지. 존재 자체로 불효녀/불효자인 나는 어머니에게 계속 상처를 줄 테고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어머니가 느낄 서러움을 강화하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은 또 내가 겪어야 할 일인 것을. 어쩌겠는가, 이것이 내가 속해야 한다고 강제된 가족의 문법인 것을.

촉박한 일정이 주는 긴장

이번 달 20일 즈음 마감하기로 한 원고 일정이 바뀌었다. 부득이한 상황으로, 그 원고를 이번 주 목요일에 마감하기로 했다. 내게 의사를 묻는 메일에 잠시 고민은 했다. 길지 않은 글이라도 5~7일 정도 여유를 두고 글을 쓰는 편이라 내일부터 쓴다고 해도 빠듯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마감 원고가 하나가 아니다. 금요일 학과 콜로키움에 발표할 원고는 수요일 마감이다. 다음주 수요일까지 두 편의 원고(그 중 하나는 분량이 꽤나 많다)를 마감해야 한다. 기존 원고 일정 만으로도 뭔가를 추가할 상황이 아니다. 그럼에도 원고 일정을 조정할 수 있겠느냐는 정중한 메일에 그러겠다고 답했다. 답장은 약간 길게 적었지만 속으론 ‘그냥 쓰지,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일정이 촉박하니 갑자기 긴장감이 살아나고 몸이 살아난다. 이런 긴장감이 좋다. 마감이 분명하게 있어서 촉박한 느낌이 들 때의 긴장감은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 중 하나다. 아울러 이런 긴장감은 그동안 여유롭던 내 몸을 깨운다. 마감이 있어야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마감이 있어야 아이디어가 마구마구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마감이 있고 일정이 촉박하면 또 그 상황에 맞게 몸이 움직인다. 이렇게 움직이는 몸이 좋다. 이 긴장감이 어떤 생기를 줘서 좋다.
이제 마감을 향해 열심히 달리자. 신난다. 방학하고 한동안 느슨하게 움직였는데 다시 신난다.

삶을 긍정하는 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삶도 바뀌고 세상도 달리 보일 것이란 말이 있다. 꽤나 흔한 말이다. 누군가가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힘들어할 때 조언으로 쉽게 하는 말이다. 그래서 난 이런 말을 무척 싫어했다. 긍정적으로 살라니, 이 무슨 태평한 소리냐. 이 괴이쩍은 세상에서 어떻게 긍정적으로 살 수 있단 말이냐. 끊임없이 싸우고 분노하기에도 바쁜 세상, 어떻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시 고민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란 말은 이 아름다운 세상, 좋게 좋게 살라는 뜻이 아니다. 긍정적 사고는 나를 규정하는 세상의 해석체계에 대항할 힘을 갖는다는 뜻이다. 긍정적 사고는, 벨 훅스의 사랑처럼,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힘을 갖고서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인식하는 힘이다. 더 중요하게는, 나를 부정적으로 대하는 이 세상의 해석에 대항하며 나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석하고 내가 원하는 삶을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다. 그리하여 긍정적 사고는 사랑과 함께 급진적 사유체계며 혁명을 위한 초석이다.
삶을 긍정하는 힘은 지금 세상을 그냥 좋게 좋게 인식함이 아니다. 나를 부정하는 세상의 인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이 아니다. 나를 부정적으로 대하는 세상의 해석에 대항할 수 있도록 나를 긍정하는 일이며,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해석할 수 있도록 긍정하는 힘이다. 그러니 죽지 말고 삶을 긍정하며 어떻게든 살면 좋겠다. 이 급진적이고 전복적인 삶을 긍정하며 살자. 일단 살자. 살면서 저항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