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한다는 것: 젠더 연구, 등록금

만약 우리가 연구나 활동을 제대로 한다면, “현실/실제”는 지금보다 더욱더 불안정하고 복잡하며 무질서한 모습으로 나타나리라. by 플랙스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해 오늘에야 다 읽은 논문의 마지막 구절이다(원문을 조금 수정했다). 어렵지 않은 논문이지만, 모든 문단을 요약하느라 읽는데 시간이 걸렸다. 평소 다른 논문을 읽을 땐, 흥미로운 문장만 번역하고 모든 문단을 요약하진 않는다. 이번 논문은 그저 행여나 나중에 발제를 한다면 수월할까 싶어 요약했는데… 이 논문을 발제할 일은 없을 듯하다(앞으로도 이렇게 읽는 일은 없을 듯 싶고…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 1980년대 논문이라, 이후에 나온 논문에서 더 중요한 성찰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논문이 상당히 좋은데 젠더를 이분법으로 수렴할 수 없으며, 젠더를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 버틀러를 필두로 등장한 젠더 논의가 이분법 비판의 촉발이 아니란 얘기다. 버틀러가 너무 떠서 그렇지 버틀러 이전에 젠더 이분법을 비판한 논자는 상당히 많다. 젠더 이론을 공부하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이런 역사를 추적하는 작업은 중요하다.
(이 논문은 한 선생님에게 추천 받았다. 아직은 공개할 수 있는 참고문헌이 아니라 자세한 내용은 생략. 좋은 논문을 알려준 그 선생님에겐 고마움을!)
이 논문을 읽으면서 가와바타 히로토의 [리스크 테이커]란 소설을 같이 읽고 있다. 이 책은 이제 1/3 정도 읽었다. 금융소설? 기업소설? 금융가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 일본소설이다. 대충 재밌다.
초반에 몸을 때리는 구절이 나왔다. 주인공 중 한 명은 인디에서 록커로 살아가길 바란다. 그는 평생 록커로 살고자 하고, 원하지 않는 음악을 하지 않길 바라기에 금전의 어려움이 없길 바란다. 그래서 MBA를 취득하고 돈을 벌기로 한다. 그러며 하는 말이 평생 록커로 살 거라 몇 년 정도 금융업에서 돈을 벌어도 괜찮다고… 이 부분에서 최근의 고민이 떠올랐다.
진학을 결정하고 등록금을 걱정하면서, 지난 3년 동안 등록금도 안 모으고 뭐하고 살았나 싶을 때가 있다. 지난 3년의 시간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난 분명 내가 바라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평생 공부만 할 거고, 퀴어활동판에서 떠나지 않을 예정이니 3년 정도 연봉 많이 주는 곳에 취직해서 등록금을 모았어도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도 든다. 대학원 등록금을 고민하니 이제야 이런 아쉬움이 생긴다. 무슨 거창한 일을 하겠다고 등록금도 못 모았나 싶다. 얼마나 대단한 공부를 하겠다고 등록금도 없이 입학부터 빚잔치를 하려고 결정했나 싶다. 재밌다고 한 일이 내 등록금을 확보해주는 것도 아닌데… 흐흐. 회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의 자잘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고 보면 (일부)돈 많은 1세대 페미니스트가 젊은(?) 세대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지지는 등록금 지원이 아닐까 싶기도.. 으하하. (물론 이 이야기는 50~60대 페미니스트와 20~30대 페미니스트의 정치적/정서적 간극과 관련한 얘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혼자 한 상상입니다만..;;) 혹은 대한민국의 1~3%에 해당하는 부자가 대학원생 2~3명의 등록금을 후원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는 사회라면 꽤나 훈훈할 텐데… 아.. 별의 별 상상을 다 하는구나. 푸핫.
(근데 이런 시스템이 갖추어진 사회라면 애당초 지금의 한국 같지 않겠다는.. 뭐, 그런..;; )

잡담: 필기구,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

01
두어 달 전 필기구를 잔뜩 샀다. 일 년은 걱정 없이 쓰겠다고 중얼거렸다. 근데 필기구를 추가로 더 사야 한다. 그동안 펜을 열심히 굴렸다는 점이 기쁘다. 헤헤.
그나저나 펜을 추가로 더 사야하는데 왜 이렇게 설레는 건지.. 으하하. 물론 살 예정 품목은 하이텍 0.3mm 리필용 심이 전부지만 펜을 사러 가야한다는 것만으로 좋다니.. 나도 참… 근데 새로운 펜을 구경하는 일은 정말이지 언제나 신난다. 흐흐. 근데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ㅠㅠ 리필용 심과 일회용 펜의 가격이 비등하다. 심지어 리필용 심의 용량이 훠얼씬 적은데도!! -_-;;
02
요즘 업무보조 알바를 하고 있다. 무척 단순한 일이고 종일 근무가 아니라 나쁘지 않다. 가장 좋은 점은 근무 시간에만 신경 쓰면 된다는 것.
작년 5월 초까지 헌책방에서 알바를 했다. 그 당시, 활동 및 전공과 무관한 알바로 생계비를 마련하며 활동을 유지하는 생활 방식을 고민했다. 그땐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생계비도 마련할 수 있으면 좋겠단 바람을 품었다. 하지만 활동이라는 게 그렇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이 활동은 아니다. 때론 내가 크게 관심이 없는 일도 해야 한다. 아울러 회의 시간이나 특정 시간대에만 고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일상이 활동에 얽매일 때가 많다. 일이 있건 없건 일요일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저녁이나 밤에도 일이 생길 수 있고. 이렇게 신경을 쓰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그것이 내가 너무 좋아하거나 관심이 많은 일이라면. 하지만 나의 주요 관심이 아닌 일을 꾸준히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선 얘기가 달라지더라.
돌아보면 헌책방 알바는 참 편했다. 알바하러 간 그 시간에만 신경을 쓰면 되니까. 알바가 끝나면 알바 일거리로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까. 바로 이것이 나를 매혹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혹은 내가 관심이 많은 분야의 일만 하면서 먹고 살기는 어렵다. 트랜스젠더 이슈, 젠더와 의료기술 이슈로만 글을 쓰거나 특강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가능성은 적다. 알바나 생계비 마련을 위한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지장을 주지 않는 그런 일이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기 시작했다. 알바는 알바, 나의 관심은 관심이라는 분명한 구분을 바라기 시작했다. 알바나 생계비 마련을 위한 일이 내 삶 전체를 흔들면서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되는 일이 없길 바랐다.
헌책방 알바가 그렇고, 그 이후 한 알바도 그렇고, 지금 하고 있는 알바도 그렇다. 알바하러 가서 그 일만 하면 끝이다. 퇴근하고 나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퇴근 이후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적어도 알바 업무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런 고민과 욕망은 내가 어떤 활동을 하고 싶은 걸까와 관련 있다. 주로 단체에 적을 두며 운동하는 활동가로 사는 것,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고민을 하고 있다. 한땐 단체 활동가로 사는 삶을 바랐다. 동경한 건지도 모르지만. 근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강의를 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더라. 나의 공부가 젠더 이슈나 트랜스젠더 이슈 관련 운동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다. 하지만 기여는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흐.
아무려나 요즘, 생계비 마련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과 분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고민을 하고 있다. 일 년에 글 두 편 쓰고, 그 글로 일 년치 생계비를 마련할 수 있다면 최고지만. 크크. ;;;
+
분양한 책이 슬슬 나가고 있습니다. 근데 받으신 책엔 특별한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고양이 털… ;;;

공부

오랜 만에 선생님을 만났다. 갱년기를 겪고 있는 선생님이 걱정이지만, 역시나 선생님을 만나고 나면 소소한 일상만 주고 받아도, 공부하고 싶은 욕망이 솟아오른다. 정말 그렇다.

요즘 알바를 구하며 가장 속상한 부분은, 공부를 하고 싶은데 알바를 구하고 생계유지를 위해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거다. 그래서 너무 속상했다. 공부하려고, 아가들 먹여 살리려고 돈을 벌어야 하는데 돈을 벌고 있노라면 공부를 할 시간이 안 난다. 절대 시간의 부족. 그래서 너무 속상했다. 최근 알바 하나를 구할 뻔 했는데, 결국 거절한 이유는 상당히 다양하다. MB의 본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공간이고, 활동 시간이 너무 많이 뺏기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그 일을 해서 저축을 적당히 하면 향후 2~3년간 생계비 걱정 없이 활동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다면 하겠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포기했다.

그런데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생계비가 걸린 문제니까.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 상의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다들 생계가 걸려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고 위로했지만, 다들 비슷한 고민이었으리라. 활동만 신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공부만 신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다들 이런 고민을 하고 있겠지.

아무려나 이런 요즘 상황에서, 읽고 싶은 논문이 잔뜩 있고 특정 주제로 읽고 싶은 논문도 여럿 있는데 이게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일까를 고민하는 하루였습니다.

뭐, 이런 고민이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요…

암튼 오랜 만에 선생님을 만난 건 정말 즐거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