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수술/의료적 조치, 그리고 저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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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 이론가 중 유난히 애호하는 두 명이 있다. 레즈비언 mtf 트랜스젠더며 역사학자고 영화감독이기도 한 수잔 스트라이커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론가다. 나는 그의 글을 여러 편 읽으며 매번 감탄했고 종종 울었다. 논문을 읽으며 울 수도 있음을 스트라이커를 통해 배웠다. ftm 트랜스젠더며 철학 전공인 제이콥 헤일의 1990년대 글은 내가 사유하는데 많은 토대를 제공했다(2000년대 들어선 글을 거의 안 쓰고 있다 -_-). 특히 범주 논쟁에 있어 그의 글은 탁월하고 때때로 중요한 기준점이다. 이 둘은 친구기도 한데, 각자의 글에서 우정을 표현하며 서로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트랜스젠더 이슈에서 둘의 의견이 항상 일치함은 아니다. 의료적 조치를 결정하는 이슈에서 특히 그러하다. 스트라이커는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조치를 최종 결정할 사람은 트랜스젠더 자신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랜스젠더가 요구한다면 의사는 그 요구에 따라 의료적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헤일은, 그의 1990년대 중후반 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바와 달리 2000년대 후반에 쓴 글에서, 최종 결정은 의사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랜스젠더와 의사는 충분히 상담해야 한다고 전제한 다음, 트랜스젠더의 의견이 존중 받아야 하지만 최종 결정은 의사가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의사가 왜 개인의 젠더를 결정할 권한을 지니는가?’를 질문한다는 점에서 스트라이커의 의견에 가깝다. 의료적 조치 시행을 의사나 행정기관이 결정해선 안 된다. 의료적 조치를 요구하는 트랜스젠더 본인이 결정하고 요청하고, 이 요청은 정당한 요구여야 한다.
[변방의 이름 없는 블로거 루인 모드로]
며칠 전 강의에서 김비 님은 논쟁적 의견을 제시했다. 청소년과 기혼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조치, 특히 수술은 관계를 생각해서 참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자신의 의견이 얼마나 논쟁적인지 알고 있으며 그래서 이 이슈로 논의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 의견에 ‘동의’한다. 청소년과 기혼 트랜스젠더는 의료적 조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의료적 조치가 능사인가란 고민에서 ‘동의’한다. 이렇게 적으면, 전혀 다른 두 입장을 비슷한 수준으로 만드는 것 같지만 어떤 염려의 지점에서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닌 듯하여 연속선 상에 둘 수도 있으리라.
나의 고민은, 엄밀하게 청소년 및 기혼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트랜스젠더 일반’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트랜스젠더 일반에 해당한다. 트랜스젠더 운동이 더 활발해지고 사회적 분위가 변해, 나이 어린 mtf 트랜스젠더가 여성스러운 행동 양식을 실천하고 자신을 여성이라고 주장하며 강하게 수술을 요구하면 의사가 “좋아, 당신은 수술을 요구하는 트랜스젠더니까 의료적 조치를 해야지”라는 식으로 진단과 수술 처방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만족할 일일까? 지금은 예상 못할 어떤 또 다른 규범을 재생산하지는 않을까? 혹은 어떤 수준의 고통, 어떤 수준의 진정성을 경쟁하고 전시하도록 하지는 않을까? 이를 테면 가급적 어린 나이에 의료적 조치를 요구한다면 이것은 진정한 트랜스젠더의 표상이고, 나이 쉰에 의료적 조치를 요구한다면 ‘너무 늦게 깨달았다’며 의심하는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지는 않을까? 수술이 트랜스젠더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확정되지는 않을까? 나의 이런 염려는 너무 조급하거나 쓸데 없는것일까?
물론 의료적 조치를 해야 한다면 가급적 빨리,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전에 하는 것이 가장 좋다.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전에 의료적 조치를 해야 그 효과가 가장 잘 나타나고 삶을 영위하기에 조금은 더 수월하단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삶의 편안함이란 측면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그러니 의료적 조치를 원한다면 원하는 시점에서 할 수 있어야 한다. 의료적 조치 요구를 이행하는데 있어, 성인이어야 한다거나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요건은 없어야 한다. 7-8살이어도 본인이 원한다면 의료적 조치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너무 어린 나이에 외부성기재구성수술 등 의료적 조치를 한다면 이것이 큰 수술이기에(어쨌거나 간단한 수술은 아니기에) 아이에게 해로울 수도 있다며 반대할 수 있다. 특히 의료 관계자가 수술의 위험을 얘기하며 더 강하게 반대할 수도 있다. 나는 “그렇다면 인터섹스의 경우엔 왜 그토록 어린 나이에, 때때로 18개월 미만일 때 외부성기재구성수술 등 의료적 조치를 시행하느냐?”고 되묻고 싶다. 현재 논하는 의료적 조치의 한계는 나이가 아니라 이원 젠더 규범이다. 아동 운운, 청소년 운운하며 반대하는 발언에서 핵심은 나이가 아니라 지배 규범의 재생산이다. 어린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태어날 때 지정 받은 규범적 젠더를 일평생 유지해야 한다는 이원 젠더 규범이 의료적 조치를 금하는 핵심 근거다. 그러니 나이가 한계일 수 없고 나이로 한계를 정할 수 없다.
(너무 어린 나이에 의료적 조치를 받은 후 나이 들어 후회하면 어떡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런 오지랖은 접어 두시라고 답하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드는 질문은, 의료적 조치가 정말 유일한 선택이자 조언이어야 할까? 나는 트랜스젠더의 요구에 따라 외부성기재구성수술 등 의료적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의사는 상담가 역할이지 판사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과 믿음이 다른 상상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 한 가지로 수렴해버리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그렇게 될 우려가 있어서 수술 이슈엔 늘 양가적 감정을 갖는다. 6살 아이의 의료적 조치 요구를 적극 지원하고 지지하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이나 이것이 또 다른 어떤 규범을 재생산할 우려는 없는지 끊임없이 탐문해야 하는데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우려 혹은 걱정은, 지금 바로 이런 식의 고민이 트랜스젠더 이슈와 의료적 조치를 등치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에도 있다. 의료적 조치는 트랜스젠더의 삶에서 일시적 사건, 통과지점이지 종착점이 아님에도 많은 경우 트랜스젠더의 유일하고 최종 목표로 논의된다. 이것은 트랜스젠더의 삶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들고 상상할 수 없는 범주로 내몬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하리수 씨를 트랜스젠더의 유일한 모델로 만든다. 의료적 조치를 수월하게 하는 것이 능사인가란 고민은, 그 저어함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감정이리라.
수술 혹은 의료적 조치가 능사가 아니라고 저어하는 내 몸과 의료적 조치는 트랜스젠더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 몸은 ‘모순’이 아니다. 그럼에도 뭔가 개운하지 않은 뭔가가 있다. 뭘까?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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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E 님과 관련 얘기를 하다가, 상당히 어설프게 얘기한 것 같기도 하고 글로 정리할 필요도 있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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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예약발행하였습니다.

[메모] 인터섹스, 치료 혹은 수술, 윤리

역시나 며칠 전 강의에서 사용하려고 메모한 내용. 비문, 오탈자 등이 난무합니다.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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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인터섹스의 몸을 둘러싼 수술 과정에 의료는 어떻게 개입하는가. 이 질문은 의학이 인간의 몸에 따라 어떤 윤리와 선입견으로 접근하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작업이기도 함. 의학이 사람을 살리는 작업이라곤 하지만 그 ‘살림’이라는 실천이 사회적 규범에 따른 규범화 작업이고 이에 따라 죽임 혹은 배제에 가까운, 죽임을 동반하는 ‘살림’이기도 함.
지난 강의에서 얘기했듯 인터섹스 수술은 외부성기 형태를 규범적 여성의 외성기, 규범적 남성의 외성기 형태에 맞추는 과정. 그리고 이 과정은 ‘모호’하다고 여기는 성기 혹은 섹스를 “모호하지 않게” 만드는 과정. 하지만 ‘모호’하다는 판단과 ‘모호하지 않게’ 만드는 작업은 인터섹스 본인의 의중이 아니라 의사가 느끼는 혼란, 모호하다는 선입견이 빚은 조치. 하지만 의사는, 아이의 인터섹스 성기 재구성 수술에 따른 젠더 변경이 친척의 혼란을 초래하고, 이런 혼란은 아이에게 악영향을 줄 거라고 가정하며 친척과 헤어지는 것이 인터섹스 아동을 위한 처방이라고 주장.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수술 사실을 비밀에 붙일 것을 주장함. 아이에게 사실 대로 말하면 아이는 이 사실을 감당할 수 없을 테고 이로 인해 상당한 충격과 우울증 등 부정적 효과만 낳을 것이라고 얘기함. 아울러 의사는 종종 인터섹스의 부모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수술을 하는데, 이는 부모 역시 태아의 인터섹스란 조건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 그래서 종종 부모에게 어떤 얘기도 하지 않고 의사 임의로 수술을 시행함.
의사가 부모에게 직접 얘기할 때도, 의사는 아이의 성기관, 외부성기가 아직 다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났다는 식으로 주장하며 부모를 설득함. 소위 여성형 외부성기와 남성형 외부성기만이 규범적 형태라고 주장하고, 이런 형태만이 제대로 발달한 인간 형상이라고 주장함. 따라서 미발달 상태, 혹은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난 인터섹스는, 아마 이런 식의 수사는 많이 익숙할 텐데요, 외성기 수술을 통해 제대로 된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함.
그렇다면 인터섹스의 조건이 인터섹스 본인에게 건강상 부정적 효과를 줄 것인가? 의사는 인터섹스 태아가 태어나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아이의 건강에 해롭고 이른 나이에 죽을 수도 있으며 불행한 삶을 살 것이라고 주장함. 그러며 수술과 이후의 적절한 의료 처방이 최선이라고 얘기함. 이런 주장에 부모는 설득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태어나서 며칠, 혹은 몇 달 이내에 수술을 함. 그럼 이 수술은 정말 인터섹스의 건강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여기서 인터섹스 성인의 주장은 좀 다른데 ㄱ. 수술 후 어떤 성감도 느낄 수 없다고 증언, ㄴ. 인터섹스란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 것이 제 삶을 더 불행하게 만든다고 얘기함. 후자의 경우, 수술은 인터섹스의 프릭 혹은 기형 상태를 해소하기보다는 인터섹스 자신을 더욱더 기형으로 느끼게 함. 인터섹스는 타인 혹은 의사에게 동정 받으면서도 제 역사를 들을 수 없게 되면서 불행하다는 느낌을 가지며, 의사는 이를 통해 인터섹스를 심각한 기형으로 판단하고 인터섹스는 기형이어야 한다고 결정함. 의사가 인터섹스와 때때로 부모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기만은 인터섹스 본인에게 혼란과 부끄러움 만을 부추길 뿐. 실제 많은 인터섹스가 자신의 과거를 알 수 없는 상황, 의사의 쉬쉬하는 태도가 제 삶을 더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얘기함. 아울러 쉬쉬하는 태도에 많은 인터섹스가 비판하길, 환자가 암일 때도 당사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의사 임의로 수술을 하느냐고 질문.
아울러 인터섹스의 ‘뭔가 좀 다른’ 외부성기 형태는 그것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는 있다고 해도 그 자체로는 겉모습이 단지 달라 보이는 것 뿐. 인터섹스의 조건은 당사자의 삶을 위협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저 인터섹스가 속한 문화를 위협할 뿐이다.
의사가 수술을 시행한 후, 그럼 인터섹스의 건강은 정말 좋아졌을까? 수술을 하지 않으면 정말 일찍 죽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 의학 연구가 충분히 있는 것일까? 장기 팔로우업 연구를 확인한 결과에 따르면 그런 건 없다는 것이 현실. 의사는 장기팔로우업 연구를 시도하곤 하지만 대부분 몇 년 이내에 다 놓치기 마련. 그래서 수술을 겪은 인터섹스 혹은 수술을 겪지 않은 인터섹스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이는 인터섹스에게 처방하는 표준처방이 실제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 표준처방이라는 것은 있지만 그것의 실질 효과에 대한 장기 연구는 없는 것이 현실.
이런 현실과 관련해서 아나스는 괴물윤리란 개념을 도입함. 예를 들어, 샴쌍둥이 태어나면 의사는 분리수술을 주장함. 분리해서 규범적 인간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 이 과정에서 한 아이는 죽을 수도 있지만 이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의학의 입장. 아나스는 이런 태도가, 샴쌍둥이는 너무 괴물스럽고 끔찍하니 그들을 규범화하기 위한 어떤 수술도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여기는 괴물윤리라고 비판함. 다른 수술 과정에선 진지하게 고려될 윤리 규정이 인터섹스나 샴쌍둥이에겐 무시됨.
이런 괴물윤리는 장애이슈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작용할 듯. 의사의 조언과 처방이 해당 당사자의 몸에 정말 적합한지, 의료적으로 증명되었는지는 논쟁적. 기존의 많은 의료적 처방은 비장애인의 몸을 토대로 삼아 이루어져 있음. 그것을 장애인에게 일방적으로 적용하거나 장애에 선입견을 가지고 적용함. 이는 저보다는 여러 분이 더 잘 알고 있고, 황지성 선생님 논문에도 잘 나와 있음. 이를 테면 장애여성이 임신하고 출산할 수 있는가의 개인적 조건과 상관 없이 장애여성은 출산해선 안 된다는 규범/선입견이 낙태와 불임시술을 의료적으로 적절한 처방이라고 주장함.

묻고 답하기: 트랜스젠더는 꼭 수술까지 해야 할까요?

가끔 이메일로 트랜스젠더와 관련해서 인터뷰를 요청 받거나, 간단한 질문을 받곤 합니다. 그때마다 답장을 보내곤 하는데요. 그러다보니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는 경우가 생기더라고요. 아울러 이메일을 보낸 분만 읽기엔 아쉽기도 하고요. 제가 쓴 내용이 좋아서가 아니라(!!) 글을 쓰는 동안 들인 품이 아깝달까요. 하하 ;; 그래서 앞으로는 관련 내용을 정리해서 이곳에 올릴까 합니다. 올리는 주기는 없습니다. 이메일이 오면 그때마다 정리해서 올릴 수도 있고 귀찮으면 한두 번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

이 글 혹은 이 시리즈의 독자는 이제 처음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 이슈나 퀴어 이슈에 관심을 가진 이들입니다. 그러니 내용은 최대한 단순하게 정리했습니다. 내용이 단순하니 문제가 되는 부분이 상당하지만 어쩌겠어요. 😛 이 시리즈(?)에 실릴 글의 상당 부분은 다른 단체에서 발간한 자료집에도 비슷한 내용이 많으니 꼭 함께 읽으시길 바랍니다. 🙂

기본 용어는 KSCRC사전을 참고하세요. 🙂 출판물로는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에 실린 용어정리가 있고, 다른 여러 단체에서 발간한 다양한 자료집도 있습니다.

모든 관련 기록물은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www.queerarchive.org)을 참고하세요. 🙂



질문:
내가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이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고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는 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성전환 수술까지 해야 하는 걸까요?


답변:
일단 트랜스젠더/비트랜스젠더라는 젠더정체성과 동성애/양성애/이성애라는 식으로 구분하는 성적지향/성정체성 개념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이 둘을 구분하지 않을 경우,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수술을 이성애자되기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아서요. 성적지향은 내가 누구를, 어떤 젠더를 좋아하는가를 핵심으로 해요. 이를테면, 나는 나를 여자로 인식하고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상대방이 여성이면 레즈비언/여성동성애자, 좋아하는 상대방이 남성이면 이성애자, 여성과 남성 어느 한쪽만 배타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닌 경우엔 양성애자로 구분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런 식의 간단한 구분이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기선 그냥 넘어 갈게요. 하하. ;; )

반면 젠더정체성은 나 자신의 성별(젠더), 즉 흔히 말하는 여성이나 남성 중 어느 쪽으로 생각하는가와 관련 있는 거죠. (물론 젠더가 여성이나 남성만 있는 건 아니지만, 일단은 둘만 가정하고 설명하겠습니다.) 나를 여성 젠더로 인식한다면 나의 젠더정체성은 여성일테고, 남성 젠더로 인식한다면 남성이겠죠. 그래서 성적지향이 상대와 나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개념이라면, 젠더정체성은 나 자신의 성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관련 있는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쉬울 듯합니다.

성적지향과 젠더정체성의 관계는, 성적지향이 자신의 젠더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나의 성별, 상대방의 성별을 확정한 다음에야 통상적인 성적지향을 얘기할 수 있죠. 여성으로서 여성을 좋아한다는 말은, 즉 나의 젠더정체성이 여성이고 상대의 젠더정체성이 여성이라고 확정한 다음 우리 둘의 젠더정체성은 동일하다고 가정할 때, 동성이란 개념이 가능한거죠. 이렇듯 성적지향은 젠더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랄까요.

거칠게 설명했는데, 대충 이렇게 이해하면 성적지향과 젠더정체성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다소 다른 개념입니다. 즉 내가 남자 혹은 여자란 것과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 건 다른 이슈인 셈입니다. 성적지향과 젠더정체성을 구분한다면, 성전환 수술은 젠더정체성 이슈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수술이 ‘이성애자 되기’는 아니란 거죠. 🙂 언젠가 기회가 되면(과연?) 정리하겠지만, 트랜스젠더의 성전환수술을 이성애자되기로 이해한다면, 레즈비언인 트랜스여성, 게이인 트랜스남성, 바이인 트랜스젠더를 설명하기 힘들고요.

(논의를 더 진행하면 이런 구분 자체도 문제가 되긴 하지만 여기선 생략할게요. 더 자세한 논의는 … 부끄럽지만 루인 “범주명명과 경계지대”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를 참고하세요. ;;; )


그 다음의 논쟁점은 흔히 얘기하기를 “나는 내가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다”는 식의 표현입니다. 그럼요. 저 역시, 어떤 의미에서, 제가 어떤 젠더인지 크게 개의치 않아요. 하하. 🙂 문제의 핵심은 그럼에도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나를 구분하고 그 구분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나는 남성이 아닌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를 남성으로 구분하고 남자답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식으로요. 아울러 남성처럼 생긴 사람이 자신을 여성으로 설명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이상하게 바라볼 가능성이 크고, 남성처럼 생긴 사람이 여성일 거라고 여기고 여성으로 대하는 주변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암튼 갈등의 많은 지점은 여기서 발생하기도 합니다. 물론 스스로 바라는 몸의 형태가 있긴 하지만 이런 형태는 한 사회의 지배규범과 크게 다르진 않겠죠. 인기 연예인의 몸이 규범적인 몸이 될 때, 많은 이들이 그 연예인을 닮고 싶어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듯. 혹은 실질적인 노력은 하지 않아도 그런 규범으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듯. 수술 자체의 논의는 좀 다르게 가져가야 할 부분이 있긴 하지만, 우선은 이 정도로 설명할까요? (슬쩍 얼버무리고 도망치는 분위기!!) 관련해서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충 정리하겠습니다. 논쟁적이지만 음미할 만한 구절이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내[트랜스젠더]가 젠더시스템을 위반한다고 말하는데 내가 젠더시스템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이분법이 나를 위반합니다.”
-리키 앤 윌킨스(Riki Ann Wilchi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