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다르게 상상하는 힘

수업 시간에 쓴 쪽글로 대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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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0.일. 쪽글02
미래를 다르게 상상하는 힘
-루인
사회적 타자 혹은 비규범적 존재로 구성되는 집단은 지배적 재현 체계에서 언제나 특정 이미지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시간이 흘러도 크게 변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타자나 비규범적 존재를 향한 인상과 성격을 조직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간이 흘러도 특정 이미지에 고착된다는 것, 이미지가 별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삶 자체가 그 이미지로 이해된다는 것은 사회적 타자나 비규범적 존재와 시간성의 관계를 질문하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시간성이 존재를 사회적 타자나 비규범적 존재를 구성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짐작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질문하기를, 사회적 타자나 비규범적 존재는 자신의 시간성을 갖거나 시간성이 존재하는가? 사회적 타자나 비규범적 존재는 어떤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규범과 시간성, 그리고 타자의 ‘발명’ 혹은 재현의 관계를 탐문하도록 한다.
요하네스 파비안(Johannes Fabian)은 시간/성 개념의 변화가 타자를 어떻게 출현시켰는지를 탐문한다. 파비안에 따르면 신에게 의미 있던 시간이 세속화되면서 시간은 측정할 수 있는 것, 중립적인 것으로 변했고 한 사회의 의미 체게 바깥에 존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13). 시간이 사회적 의미 체계에서 벗어남은 특정 지역에 따라 시간이 다른 의미를 가짐이 아니라 지역이나 시대에 무관하게 동질한 값을 지님을 뜻한다. 이것은 시간성의 보편화를 뜻하는 동시에 모든 지역의 시간을 등가의 가치로 평가함을 뜻하기도 한다(16-17). 시간이 모든 지역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면 그리하여 가치 중립의 측정 도구가 된다면 ‘우리’는 시간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평가할 수 있고 시간은 다른 사람/문화를 평가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된다. 다른 말로 ‘우리’는 이렇게 발달한 문명에서 살고 있는데 ‘너네’는 왜 그렇게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느냐는 평가가 식민주의-제국주의 인식론을 함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시간/성을 성찰하지 않을 때 너무도 쉽게 할 수 있는 언설인 동시에 시간성이 타자를 ‘발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시간성 개념이 타자를 ‘출현’시킨다는 파비안의 논의는 지금 시점에서도 유의미하다. 지금도 사회적 타자 혹은 비규범적 존재는 시간성 개념에서 타자성이 ‘발명’되고 규정되고 (재)강화되기 때문이다. 모두가 동질적 시간성, 단 하나의 시간 가치를 산다고/살아야 한다고 기대할 때, 그 기준에 맞춰 살지 않는 존재는 다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적어도 두 개의 시간, 이 사회가 특정 나이와 젠더에 요구하는 지배 규범적 시간과 트랜스젠더에게 요구하는 시간을 모두 살아야 하는 트랜스젠더는 동시에 두 개의 시간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규범적 시간을 어느 정도 맞추려면 트랜스젠더의 시간을 살기가 어렵고, 트랜스젠더의 시간을 살고자 하면 규범적 시간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두 개의 시간이 모순이기에 결코 병행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비규범적 존재가 아닌 존재라면 지배 규범적 시간을 완벽하게 체화하며 살기 때문도 아니다. 누구도 지배 규범적 시간을 완벽하게 체화하며 살 수 없고 그렇게 살지 않는다. 두 개의 시간성이 다른 위계적 가치를 지니면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배 규범적 존재가 비규범적 존재를 평가하거나 판단할 때에 있어서는 지배 규범적 존재는 지배 규범적 시간성을 살아간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트랜스젠더의 시간성 개념에서 트랜스젠더는 비트랜스젠더의 시간 발달 기준에도, 트랜스젠더의 ‘지배적 재현 이미지’에 부합해야 하는 시간 발달 기준에도 모두 부족한 존재다. 시간을 자연화하고 동질의 가치로 여기는 인식론에서 트랜스젠더는 언제나 타자일 수밖에 없고 열악한 존재일 수밖에 없고 불행한 존재일 수밖에 없고, 시간 자체가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등가의 시간 가치로 모두를 판단하는 인식론은 미래를 상상하고 전망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빈칸 아담스 등(Vincanne Adams et al.)과 카렌-슈 타우식 등(Karen-Sue Taussig et al.)이 지적하고 있듯, 전망이나 기대, 잠재성이나 가능성과 같이 미래의 시간을 상상하는 언설은 모두 현재의 가치 체계에 따른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아담스 등은 기대/전망(anticipation)이 미래를 현재의 데이터로 예측할 수 있는 것, 그리하여 현재 대비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한다. 그것은 또한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담는 것이자 불안을 최소화하고 희망을 최대화하려는 기획이기도 하다. 타우식 등은 잠재성(potentiality)이란 용어가 시대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변화함을 지적하며 잠재성에 내재한 미래 시간이 현재의 가치 판단에 따른 것임을 지적한다. 두 논의의 지적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미래라는 시간을 상상할 때 언제나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갖는다는 점이다. 또한 기대/예상이나 잠재성이란 용어로 미래를 상상할 때 이것은 언제나 정치적 행동이란 지적이다(Taussig et al., S6). 이 두 지적은 비규범적 존재나 사회적 타자가 제기하는 많은 정치적 논의가 시간성을 둘러싼 논쟁,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을 둘러싼 논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조치를 둘러싼 일군의 긍적적/정당화 언설은 그것이 트랜스젠더의 삶을 행복하게 할 것이란 전망이며, 부정적 반응은 일찍 죽을 수 있다는 (정확한 근거를 찾기 어려운)예상이다. 아울러 인터섹스 유아에게 외성기 ‘교정’ 수술을 강제하는 의사는 이 수술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아이가 행복한 이성애자가 될 수 없을 것이란 언설로 부모를 설득한다. 각각의 발언은 모두 트랜스젠더나 인터섹스의 미래를 ‘걱정’하는 ‘선한’ 마음의 표현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각 발언은 트랜스젠더나 인터섹스의 행복한 미래의 형식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모두 현재의 가치를 밑절미 삼아 미래를 규정한다. 트랜스젠더가 원해서 의료적 조치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삶을 행복하게 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인터섹스가 수술을 해야만 ‘행복한 이성애자가 된다’는 언설은 미래의 가치가 아니라 철저하게 이성애-이원 젠더 규범을 지배 규범 삼는 현재 상황에 근거한(혹은 의사 개인의 가치 판단에 따른) 판단이다. 그렇기에 미래를 예상하거나 어떤 잠재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철저하게 현재의 사회적 가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비규범적 존재나 사회적 타자를 판단하는 인식이 미래 예상이나 잠재성의 내용을 규정한다.
시간성이 ‘타자’를 생산하고 현재 삶을 가치 판단하고 미래를 상상하도록 하는 중요한 논쟁 지대라면, 우리는 시간성을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다시 사유해야 한다. 그리고 미래를 다르게 상상할 수 있는 힘, 그리하여 지금 현재를 다르게 해석하고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야 한다. 다른 시간성을 상상한다고 지금 현재 지배적 힘을 갖는 시간성이 무화되지는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시간성을 상상한다는 건, 지배 규범적 시간성이 유일한 가치가 아니라고 상대화하는 작업이며 이것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만들어갈 중요한 토대 중 하나기 때문이다.

공유하는 시간을 개별적으로 살아가기, 개별적 시간을 공유하며 살아가기: 트랜스젠더의 시간

바람과 보리가 신나게 놀고 저는 이제 기말 기간.
수업 쪽글입니다. 시간성 관련 수업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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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3.일. 쪽글01
공유하는 시간을 개별적으로 살아가기, 개별적 시간을 공유하며 살아가기: 트랜스젠더의 시간
-루인.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지,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는지는 현재를 이해하는 관점의 차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 두 가지가 전혀 별개의 사건 혹은 경험이란 뜻은 아니다. 지금 내 삶은 과거, 내 몸에 침전된 역사를 통해 미래로 향하고, 또 내가 살고 싶은 미래 전망이 내 과거와 현재를 새롭게 구성한다. 즉, 이것은 거의 동시적 경험이다. 이를 테면 누군가가 내게 제공하는 정당한 서비스가 아직도 편하지 않고 몸둘바를 모르는 내가 상상하는 미래의 모습은 ‘거창’하지 않다. 이것은 나의 계급 경험, 내가 주로 만난 사람과의 경험을 반영한다. 내 과거, 내 몸에 침전되고 체화된 경험이 지금 내가 살아가며 세상을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다. 그리하여 내 미래는 현재화를 거쳐 과거화된다(내 미래의 일부는 내 과거에 있다). 그리고 내 미래, 트랜스젠더 연구활동가로 살아가고 싶은 나의 바람은 지금 내 삶을 조율한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함이 아니다. 즐겁고 경쾌한 지금과 더 신나고 유쾌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내 과거도 미래와의 관계로 재해석하곤 한다. 나는 주류 미디어가 트랜스젠더를 재현하는 방식으로 살아오지 않았다. 내 과거는 내가 지향하는 가치, 내가 사랑하는 정치학을 통해 재구성되고 선별적으로 구성되며 그리하여 특정 의미를 갖는다. 다른 말로 내 과거는 현재화를 통해 미래화된다(내 과거의 일부는 내 미래에 있다). 그러니까 내겐 과거에서 흐르는 시간과 미래에서 흐르는 시간이 공존한다. 나는 이것을 늘 동시적 사건으로 겪는다.
나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지금’이라는 추상적이고 구체적 찰나에 함께 겪지만, 내가 살아가는 시간은 나 혼자만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내가 살아가는 시간은 또한 타인도 살아가는 시간이다. 나는 과거를 나만의 방식으로 회고하지만 내가 회고하는 과거는 그 시기를 겪은 동년배와 특정 정서 및 사건을 공유하며 회고하기도 한다. 이를 테면 2002년 월드컵의 길거리 응원전을 직간접으로 겪은 이들, 1990년대 초반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할 당시 십대였던 이들은 각자 그들만의 정서를 공유한다. 특정 시기를 특정한 정서로 공유하면서 ‘우리’는 시간성을 공유한다. 하지만 그 시간을 겪고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개인마다 다르다. 개인에게 의미가 다름에도 특정 시간/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자신의 시간을 사회적 시간 관념/지식과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만의 시간, 사회의 다른 구성원과 공유하는 시간, 그리고 특정 집단이나 범주에 투사하는 시간의 관계는 삶 그리고 시간 경험을 복잡하게 만든다. 트랜스젠더의 삶과 시간은 이런 복잡함의 한 측면을 재현한다. 이 사회가 상상하는 수준에서 트랜스젠더는 mtf라면 충분히 여성스럽고, ftm이라면 충분히 남성스럽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는 이미 (mtf라면)여성이거나 (ftm이라면)남성이다. 혹은 mtf라면 과거부터 여성스러운 모습을 꾸준히 그리고 충분히 재현해야 했고, ftm이라면 과거부터 남성스러운 모습을 꾸준히 그리고 충분히 재현해야 한다. 트랜스젠더에게 ‘클로젯’의 시간은 허용되지 않는 편이다. 그리하여 트랜스젠더가 지배 규범적 지식체계, 지배적 상상력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설명하기 위해선 규범적 상상력과 협상할 수 있는 몸을 재현해야 한다. 그런데 사회에서 상상하는 트랜스젠더는 이미 트랜스젠더(혹은 비트랜스젠더로 통할 외모를 갖춘 존재)다. 까끌한 수염 흔적이 있으면서 자신을 mtf 트랜스젠더라고 설명하는 것은, 적어도 이 사회의 상상력에선 통용되지 않는 행위/지식이다. 다른 말로 트랜스젠더로 존재하기 위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지금 내가 트랜스젠더라고 설득하기 위해 과거를 ‘지배 규범적 상상력’에 맞춰 재구성할 수는 있다. 이럴 때의 시간은 허여된다. 하지만 지금부터 ‘트랜스젠더’로 살아가기 위한 시간은 별로 허여되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로 등장한다는 것은 어느 날 “쨘!”하고 변한 모습으로 나타남이지 매일 조금씩 변하는 모습으로 나타남은 아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가 의료적 조치를 선택했다면, 그래서 호르몬 투여를 시작한다고 해서 몸이 “쨘!”하고 변하지는 않는다. 몸은 천천히 변하고 원하는 몸으로 살아가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내가 원하는 몸으로 살아가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필요로 한다. 이미 여기서 트랜스젠더에게 시간은 ‘불가능한 기획’이 된다.
자신이 원하는 몸으로 살아가기 위해 삶을 기획한다고 해서 그가 몸이 변하는 시간에만 집중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트랜스젠더는 또한 이 사회의 시간성 기획, 동년배에게 요구하는 지배 규범적 시간도 살아야 한다. 27살의 트랜스젠더가 자신이 원하는 몸으로 얼추 변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성공’이며 ‘충분’하냐면 그렇지 않다. 그는 이 사회의 나이 체제에서 요구하는 27살의 삶도 살아야 한다. 사실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기획이지만, 혹은 불가능하진 않다고 해도 양립하기가 쉽지 않은 기획이지만 그럼에도 이 기획에 부합해야 한다. 지배 규범적 생애주기(시간성)의 기획에 맞추지 못 했을 때의 사회적 평가는 냉정하다.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현대 사회의 상상력에서 트랜스젠더가 몸 변형을 끝냈다고 해서 괜찮은 것은 아니다. 취직할 준비, 먹고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트랜스젠더의 특정 경험은 무시되거나 삭제된다. 의료적 조치를 하느라 다른 준비를 못 했다는 것, 혹은 통상의 사회적 관념에 부합하지 못 했다는 것은 ‘납득할 만한 사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모든 개인을 투명한 주체로 가정하며 단일한 기준으로 판단하는 우리 사회의 지식체계에서 트랜스젠더는 의료적 조치를 하느라 다른 준비를 소홀히 했어도, 다른 준비를 하느라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았어도 잘못 산 것이 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청소년은 의료적 조치를 거부당한다, 성인 트랜스젠더도 청소년에겐 공부를 권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을 상상하는 방식은 삶을 평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나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지만 또한 타인과 공유하는 시간을 살아가고, 이 사회가 내게 요구하는 또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지배 규범은 존재 각각에게, 특히나 규범적 존재와 비규범적 존재에게 다른 시간/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또한 존재의 규범성과 비규범성은 어떤 의미에서 각각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로 나눠질 수도 있다. 그리고 비규범적 존재의 시간은 어떻게 해서든 이미 ‘실패’한 시간이며 ‘실패’를 예정한 시간이다. 그런데 규범적이라고 분류되는 존재도 이 사회의 시간 기획에서 ‘성공’을 장담하기 힘들며 언제나 ‘실패’를 염두에 두어야 하고, ‘실패’를 두려워한다. ‘실패’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시간적 삶의 기본값이다. 그 어떤 시간적 삶도 규범적 기획에서 ‘실패’를 가정할 수밖에 없다면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시간의 ‘실패’를 어느 정도는 공유하며 살아간다면, 도대체 무엇이 ‘실패’고 누가 규범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시간/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규범과 비규범을 다시 사유할 길을 제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알레르기 비염, 혹은 시간성과 기온의 관계

이런저런 고민이 많은 날입니다. 그리고 비염이 터지는 계절이고요.
그냥 가볍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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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1.일. 쪽글-03
알레르기 비염, 혹은 시간성과 기온의 관계
-루인
비록 지금은 한국이 사계절의 기온 변화와 자연 풍경 변화가 뚜렷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뚜렷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상당히 오랜 시간 한국은 사계절이 분명한 나라였(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초등학생일 땐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그런 지식을 밑절미 삼아 계절 변화를 인식했고 지금은 기온이 ‘이상’하다고 예전과 다르다고 판단한다. 계절의 변화, 봄에서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으로 움직이는 시간은 일년이라는 시간 단위를 인식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기도 하다. 12월 31일과 1월 1일 사이의 타종행사가 달력 시간의 단위를 맺고 새로 시작함의 지표라면 계절의 순환은 어쩐지 몸에 익은 삶의 1년 주기에 가깝다. 하지만 내가 1년이라는 단위, 혹은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뀐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나는 내 몸의 반응으로 이것을 인식한다.
알레르기 비염을 만성병으로 분류할 것인지, 그저 알레르기 증상으로 분류할 것인지는 내게 애매한 영역이다. 만성병과 관련한 글을 읽을 때면 종종 내가 겪는 알레르기 비염을 떠올리곤 하지만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다른 말로 비염을 만성병의 시간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어떤 병을 겪은 ‘생존’의 시간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알레르기 비염이 이 사회가 요구하는 생산적(시간적) 인간되기를 ‘방해’하는 요소란 점이다. 알레르기 비염이 터진다면, 이미 터진 상황에선 약도 소용없고 사실상 할 수 있는 건 드러누워 있는 것 뿐이다. 비염으로 인해 잠을 잘 수 없지만 비염으로 인한 피로와 에너지 소모로 잠에 드는 것이 유일한 임시방편이다. 하지만 비염은 정해진 시간에 나를 찾지 않는다. 비염은 예측할 수 없는 시간에 불쑥 찾아온다. 오랜 만에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한 날 아침 찾아올 수도 있고, 할일이 엄청 많고 판단해야 할 일이 많은 날 나를 찾아올 수도 있다. 그래서 늘 신경써야 하고 코의 미묘한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물론 비염이 터질 것만 같은 예감이 반드시 적중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터지지만 안 터질 때도 있다. 비염이 터지지 않을 거란 기대 역시 언제나 배신을 동반하다. 이것이 문제다. 비염이 터지면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비염이 터져도 생계형 알바를 쉴 수 없고 학교 수업에 빠질 수 없다(만약 빠져야 한다면 봄과 여름 동안 나는 집에만 있어야 한다). 내 경험에서 비염은 “힘들겠다”란 반응을 접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인 증상이다. 많은 경우 “감기예요?” “비염이에요” “아…” 이것이 전부다. 그리하여 비염으로 알바를 쉬겠다고? 애당초 근로 조건에 공휴일을 제외하면 쉬는 날이 없는데 ‘고작’ 알레르기 비염으로 쉬겠다고? 하지만 알레르기 비염은 이른바 시간 대비 생산성을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알바하는 곳에서 나는 정말 최소한의 일만 하고 수업엔 참가하는데 의의를 둔다. 그리하여 알레르기 비염은 시간규범적(temporal-normative) 존재 되기를 ‘방해’한다. 이른바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 없도록 만들진 않지만 그것이 요구하는 시간 생산성엔 부족한 존재로 만든다.
비염이 시간규범적 존재로 사는 삶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시간성 개념을 갖는 것만은 아니다. 비염은 크게 두 가지, 통년성 알레르기 비염(Perennial allergic rhinitis)과 계절성 알레르기 비염(Seasonal allergic rhinitis)으로 나뉜다. 비염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많은 글이 비염을 알레르겐과 치료를 중심으로 설명하지만, 비염은 그 자체로 이미 시간적 증상이다. 어떤 경우건 둘 다 평생을 함께 하거나 몇 십 년을 함께 할 동반자다. 계절과 무관하게 수시로 발생하느냐 계절의 변화에 따라 발생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적어도 내게 있어 비염이란 시간은 단순히 통년성으로 오지도 않고 계절성으로 오지도 않는다. 통년성, 어떤 알레르겐을 통해 언제든 발생할 수 있어서 환경을 가리는 방식으로 비염을 겪지는 않는다. 물론 낯선 곳에 가거나 먼지가 유난하거나 냄새가 강한 곳에 가면 그 즉시 혹은 이튼날 거의 반드시 비염을 겪는다. 계절성, 봄이나 환절기에 꽃가루와 같은 요인으로 비염을 겪지도 않는다. 물론 나는 봄이나 여름, 특히 이 즈음의 환절기에 비염을 심하게 겪는다. 내가 봄이나 여름을 싫어하고 가을이나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을이나 겨울에 비염을 겪을 가능성이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현저하게 낮지, 없지는 않다. 한겨울에도 비염이 터지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얼추 20년 가까이 비염을 앓으며 깨달은 바, 내가 비염을 겪는 시기는 대체로 분명하다. 날이 따뜻할 때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특정 기온, 아침 최저 기온이 12도 이상이라거나 낮 최고 기온이 19도 이상이면 비염이 터진다는 식이 아니다. 어제와 오늘의 기온차에 더 민감하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며 기온이 0도면 비염이 터질 가능성이 낮다. 하지만 어제까지 일주일 가량 영하 15도였다가 오늘 영하 5도 정도여서 날이 ‘따뜻’하다면 비염이 터진다. 영상 10도는 되어야 따뜻해서 비염 발생 요인이 작동하는 게 아니다. 기온차가 크고 날이 상대적으로 ‘따뜻’할 때 비염이 터진다. 나의 비염 알레르겐은 상대적으로 따뜻한 기온이다. 다른 말로 내게 비염이라는 시간은 기온과 함께 한다. 그리하여 나는 계절 변화를 비염이 터지는 빈도로 겪는다. 비염이 터지기 시작하면 ‘아, 이제 봄이구나’를 확인한다. 하지만 이 시간은 또한 기온 변화의 시간성이다. 내게 시간성은 기온 변화의 형태로 인지된다. 이것은 계절에 따른 기온 변화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기온을 어떻게 느끼고 반응하느냐와 관련 있는 시간성이다. 그리하여 내게 시간성은 또한 기온의 변화가 몸의 상태를 바꾸는 방식으로 체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