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4: 바라는 삶, 왕따와 성폭력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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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바라는 생활 방식 중 하나는 그냥 도서관에 콕 박혀 원하는 자료를 찾고, 그 자료를 읽는 일. 이를테면 아침에 도서관에 가서 읽고 싶은 자료도 찾고 글도 좀 쓰고, 오후엔 찾은 자료를 읽고 저녁엔 카페에서 느긋하게 빈둥거리며 책을 읽거나 영화관에 가고. 그러다 가끔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물론 개인약속이 없는 나로선 사람 만날 일도 거의 없겠지만. 🙂

만약 몇 년 동안 생계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 이렇게 살고 싶다. 매우 행복할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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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이 쓴 날들이다. 나름, 불면의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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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라디오에서 “중학생 동영상”이라는 뉴스를 들었다( http://bit.ly/bZtoLm ). 어떤 프로그램에선 왕따라고 얘기했다. 어떤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장난이라고, 다만 짓궂은 장난이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해석하기에 따라 성폭력일 수도 있다. 이 사건엔 젠더 간의 권력이 매우 명확하게 작용하고 있는데, 사건을 전한 진행자들은 이를 간과했다. 왕따라는 말이 그 동안 은폐한 폭력을 드러낸 면이 있긴 하지만, 개인들 간에 존재하는 권력 차이를 은폐하는 경향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성폭력, 젠더 폭력, 인종차별과 같은 말을 순화하기 위해 왕따란 말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간관은 재벌가의 8살 아이가 일용직 노동자 집안의 8살 아이보다 영어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피아노도 잘 친다면, 그건 경제적인/계급적인 차이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 차이 때문이라고 보는 것. 왕따란 용어의 사용이 딱 이러하다.

인용: 『흑인 페미니즘 사상』 + 이종태 기자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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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하고 자유주의적인 백인들이 좋은 의도로 “캐런, 너도 알겠지만, 왜 이렇게들 야단법석을 떠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너는 나한테 좋은 친구고 나는 네가 흑인이라고 생가해 본 적이 없어”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나에게 어떤 반응을 기대하는 것일까? 이런 말에는 “나는 네가 백인이라고 생각해” 혹은 “나는 흑인인종을 전혀 생각하지 않아” 식의 흑인무시가 은근히 담겨있다. (Russell)


패트리샤 힐 콜린스(Patricia Hill Collins)의 책, 『흑인 페미니즘 사상』(박미선, 주해연 옮김)을 읽었다. 위 인용구는 그 책의 일부다. 이 구절을 읽으며 꽤나 속이 후련했다. 모든 사람이 이런 건 아니겠지만, 신경쓰고 싶지 않음을 캐런의 친구들처럼 말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내가 반성할 부분이기도 하다. 나 역시 내가 직접 언급하지 않는 이슈에선 위와 같은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제목에 “흑인”과 “페미니즘”을 명시하고 있다. 그래서 얼핏 이 책이 흑인여성만의 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즘 중 흑인에게만 초점을 맞춘 내용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내가 읽은 이 책은 내가 꽤나 싫어하는 말로 “소수자 정치”를 실천하고 있는 이들, ‘다른’ 정치를 모색하는 이들 모두에게 흥미로운 상상력을 제공한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트랜스젠더 정치학을 모색하는데 중요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또 다른 매력적인 구절을 꼽자면

억압의 또다른 패턴은 자신의 실천은 거의 바꾸지 않으면서 다양성의 필요성은 긍정하는 척 사탕발린 말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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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가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보통인 서구나 제3세계와 달리 한국에서 이를 밀고 나간 것은 김대중이라는 진보 정치인이었다. 자연스럽게 한국 신자유주의 개혁은 민주화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개혁의 핵심이 ‘기업을 주식시장에서 사고 파는 상품으로 전환하는 것’이라면, 한국에는 이런 개혁을 저해하는 세력이 있었다. 바로 소수 지분으로 전체 계열사를 전횡하는 재벌 가문이었다. 이런 재벌 가문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은 김대중식 신자유주의 개혁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런데 이는 민주화운동의 전통적 목표이기도 했고,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신자유주의 개혁과 민주화운동이 손을 잡았다.
-이종태. “신자유주의 혁명가 김대중의 성공 그리고 한계” 『시사인』 2009년 8/29. 제102호.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관련 기사들이 많이 나왔다. 어떤 기사는 회고했고, 어떤 기사는 아쉬움을 달랬다. 어떤 기사는 추모와 긍정적인 평가를 앞세웠다. 어떤 기사는 비난했다. 그리고 많은 기사들이 공과를 나열하는데 그쳤다. 이런 부분은 잘했지만 저런 부분은 아쉽다는 식이었다. 일간지야 그렇다 해도 주간지 기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위에 인용한 기사를 읽으며, 무릎을 쳤다. “그래, 주간지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지!”

DJ의 경제기사, 경제정책과 관련 있는 기사를 읽은 이들이라면 알고 있으리라. 1970년대부터 대통령 당선 전까지의 경제철학과 대통령 당선 이후의 경제철학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식의 내용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그리고 대통령 당선 전과 후의 경제정책이 모순이라고 언급하는데 그친다. 하지만 이종태 기자의 기사는 대통령 당선 전의 경제철학/정책과 당선 후의 경제정책을 모순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두 정책이 어디서 만나는지를 분명하게 지적한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의 인식이 신자유주의와 별다른 갈등없이 만날 수 있었던 건 위와 같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위의 기사는 1980년대 운동권 사람들의 주장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어쩌면 그 시절 운동을 했던 이들이야 말로 신자유주의자들은 아니었을까? 민주화 운동 혹은 운동권을 낭만적으로 그리지 않고, 맥락적으로 쓰려고 애쓰는 것, 이것이 주간지에서 기대하는 기사가 아닐는지. 여기서 좀 더 세밀하게 파고들면 그건 계간지에 실릴 글이고. 서거 이후 등장한 기사 중 가장 인상적인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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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서 엄청난 자료를 찾았다!! 나중에 천천히 자랑해야지. 우헤헤.

[영화] 행복을 찾아서: 그런데 무슨 “행복”?

[행복을 찾아서] 2007.03.10. 09:30, 아트레온 2관 3층 G-17

※곳곳에 스포일러가 있답니다. 🙂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The Pursuit of Happyness인데, 영화를 시작하며 뜨는 제목에 Happyness의 y의 글씨체가 다르다. 영화관에서 이 글씨체를 구별하며 재밌다고 느꼈다. 그런데… 영화를 읽다보면 나오지만 y가 아니라 i로 써야 맞는 표기법이다. Happyness가 아니라 Happiness. 루인의 영어 수준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잘못 쓴 줄 몰랐기 때문;;; 물론 영화 제목에서 i 대신 y를 사용하는 건, 의도적인 오기를 통해 행복의 의미를 재구성하려는 건 아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느낌은 그렇다. 문법에 맞는 행복Happiness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문법이 틀리더라도 때에 따라선 행복일 수 있는 그런 행복Happyness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Happyness는 크리스(윌 스미스 분)의 아들, 크리스토퍼가 머무는 놀이방의 벽에 그래피티로 적혀 있는 글자이다. 중국인(으로 추정하는 사람)이 운영하는 그 놀이방으로 크리스토퍼를 데려다 줄 때마다 크리스는 철자가 틀렸다고 불평한다.

이쯤 되면 틀린 철자를 통해 영화의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느꼈다. [행복을 찾아서]는 행복Happyness/Happiness을 추적pursuit하고 있지만 그 행복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는 영화이다. 무엇을 행복이라고 부를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그런 질문을 탐구하는 영화가 아니라 현재 혹은 이 영화의 배경인 1980년대 미국의 사회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을 고정된 것으로 가정하며 그것을 향하고 있다. 이러한 기획 속에 현재 사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다만 개인이 노력을 하느냐 노력을 하지 않느냐가 “행복”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조건이 된다. 그렇기에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순전히 개인의 문제다.

(이 영화 속의 배경이 반드시 1980년대의 미국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느꼈기에 “현재”라고 쓴다면) 현재 사회에서 빈부의 격차가 어떻게 조직되고 있는지,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심해지고 부의 세습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개인의 능력 문제로 설명하고 있는 사회적인 측면을 이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빈부의 구조를 그나마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잘 곳이 없어 쉼터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 앞으로 스포츠카를 타고 즐거워하는 백인들이 지나가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이러한 구조적인 측면이 아니라, 단지 쉼터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비참한가 혹은 주인공들은 지금 얼마나 힘든 상황에 있는가 이다.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나타나는 성조기는 행복이란 건, 미국 백인 중산층의 부에 따른 그것임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하고 크리스의 부단한 노력은, 결국 “노력하면 너희들도 할 수 있어”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또한, 이 영화에선,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인종주의가 개인의 능력 문제로 지워진다. 인턴들을 담당하는 사람은 유일한 흑인(으로 가정한다면)인 크리스에게만 각종 심부름을 시키며 부하 다루듯 하고, (인턴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남성이라고 간주하는 모습이고,) 앞서 적었듯 쉼터에서 하루 밤을 지내려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백인이 아니었다. 크리스는 놀이방을 운영하는 중국인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이 모든 지점들이 이 영화에선 개인의 노력과 능력의 문제이지 성별이분법과 인종주의가 작동해서는 아닌 것처럼 그려진다.

물론 이 영화는 현재 상황에서 크리스가 어떻게 협상하는가를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자본 혹은 돈은 행복Happyness/Happiness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바뀐다. 물론 살아가는데 있어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중요한 건 너무도 분명하고, 공부를 하기 위해서도 책을 읽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한 세상이란 점에서 돈이 행복이 조건일 수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돈 혹은 취업이 행복의 도달점일까?

대기업에 입사해서 고액 연봉을 받는 것이 최고의 추구점인 이 영화는, 한국의 오늘날과 상당히 겹친다. 무엇이 행복이냐고 묻기도 전에 행복해야 한다고만 말하는 사회에서, 크리스의 입사는 기쁘고 상당히 감동적이지만(영화 속 크리스의 상황에서 입사를 위한 노력은 어떤 의미에서 너무도 당연한 ‘선택’이었다) 영화가 끝나며 크리스의 이후의 상황을 설명하는 자막-엄청난 돈을 벌었고 회사를 설립했다는 내용은 입사를 축하하고픈 감흥을 깨버린다. 영화 마지막에 가서 결국 이렇게 행복의 추구는 돈이라는 노골적인 말은 이 영화의 의도를 의심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Happyness는 Happiness의 의도적인 오기를 통해 행복 그 자체를 질문하려 했던 건 아니라고 몸앓았다.

그나저나 린다(탠디 뉴튼 분)는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가 끝나며 나오는 자막 어디에도 린다와 관련한 내용은 없다. 린다의 입장에서 크리스는 유쾌할 수 없지만, 영화에서 린다의 존재는 크리스를 설명하는 사건으로 등장한다. 린다가 뉴욕으로 떠나는 장면을 읽으며 영화 말미에 다시 린다와 만나는 통속을 바랐지만 이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린다의 뉴욕행은 영화 밖으로의 퇴장을, 영화가 설명하는 크리스의 삶 밖으로의 퇴장을 의미한다. 크리스토퍼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린다의 감정은 모성애라는 어떤 성역할에 따른 본질로 여겨지지만(린다가 크리스토퍼를 키워야 하는 이유로, “엄마”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크리스토퍼를 챙기는 크리스의 감정은 책임감, 자기성실성 등으로 크리스를 포장한다(영화 초반에 크리스는 자신의 친부를 20대에 만났다며 자신의 아들에겐 결코 그런 아버지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말을 한다).

그래서 가볍게 영화를 읽으려던 의도는 그렇지 않은 몸으로 변해 있었다. 문득 떠오른 말, “저항은 권력을 징후한다.” 하지만 이 말의 측면에서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렇지 않음을 통해 권력을 징후하고 있다. 재밌는 역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