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은 소통이다

어쩐지 양치기 소녀 같은 발언이라 두루뭉실하게 얘기를 하자면, 몇 년 전 떠들던 작업을 이제 슬슬 진행하고 있다. 물론 지난 몇 년, 그냥 놀지는 않았다. 그때도 분명 무언가는 했다. 차이라면 지금은 좀 더 직접적으로 관련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특정 시간을 잡아서 그 작업을 하며, 어떻게 그 일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을까 싶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니, 제정신은 맞는데 그냥 앞뒤 구분을 못 했다. 뭐, 이렇게 사는 건 지금도 여전한 것 같지만. 냐옹.
글을 쓴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혹은 그래서 참 재밌는 일이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복받은 일이다. 그래서 참 어려운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곧 내가 배운 지식을 타인과 나눈다는 것이다. 이론이 곧 소통할 수 있는 언어여야 한다. 이론은 언어지 지식 자랑이 아니다. 하지만 이론은 지식 자랑이기 쉽다. 쉬운 소통의 수단이어야 하는데 지식 자랑이기 쉽다. 그래서 이론을 배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론 자체의 지식이나 앎이 어려워서만이 아니다. 그렇게 배운 것을 타인과 나눌 수 있도록 바꾸는 작업이 필요해서 어렵다. 그래서 퀴어이론 입문서, 철학 입문서 등을 집필한 저자는 모두 대단하다. 그리고 할 얘기를 양보하지 않으면서 쉽게 쓰는 저자는 더 대단하다.
아무려나 쉽게 특정 단어를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하는지, 얇팍한 지식으로 껄떡거리는 나의 태도는 참으로 한심하다.

트랜스젠더 이슈 관련: ‘인권의 맛을 돋운 소금들’, 국립국어원과 인권위의 “전환여성/전환남성”?

예기치 않게 트랜스젠더 이슈와 관련해서 쓸 내용이 두 가지 생겼습니다. 좋은 소식(하지만 조금 슬픈 소식)과 황당한 소식 중 어떤 소식을 먼저 전할까요?

01
갈매나무 님께서 댓글로 알려 주신 소식입니다( http://bit.ly/6wIgH6 ).
(소식, 고마워요!!)

12월 10일 국가인권위제자리찾기공동행동에서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앞에서 “2009 반인권의 옷을 벗기자”란 기자회견을 열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인권밉상’과 ‘인권울상’을 발표하는 한편, ‘인권의 맛을 돋운 소금들’이란 상도 발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금들 상에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도 있었다고 …. 음….
(자세한 기사는 http://bit.ly/8zRh8R )

지렁이가 2009년에 한 거라곤 인권위 사업 철회한 거 밖에 없는데요… ;;; 다른 때라면 이 기사에 매우 기뻤겠지만, 현재로선 난감한 기분입니다. 무턱대고 기뻐할 수 없는 상황. 그래도 선정해주신 분들껜 고마움을 전합니다.

아무려나 올해 안에 지렁이와 관련해서 뭔가 새로운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02
어느 선생님과 전화를 하다가 전해 들은 소식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국립국어원이 트랜스젠더를 “전환여성(남 → 여)”, “전환남성(여 → 남)”으로 용어를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하네요. 국립국어원과 인권위 홈페이지에선 해당 내용을 검색할 수 없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컴퓨터 환경 때문일까요? 국립국어원과 인권위 홈페이지가 웹표준을 지키지 않아서 생긴 문제일까요? 아무려나 검색사이트로 해당 내용을 찾으니 다음의 글만 찾을 수 있습니다. http://bit.ly/6BCVWB

아무려나 이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상념. 이런 어처구니 없고 황당한 경우가 있나! 도대체 뭐하자는 건가요? 이런 어이 없는 짓에도 성명서나 항의 메일을 보내야 할까요? 이런 용어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군가요? 한 존재를 명명하는 작업을 이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요? 자세한 내막을 몰라 더 길게는 쓰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매우 화가 나고, 황당한 일이라고 밖에 달리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채식의 오랜 습관: 언어바꾸기

“** 좋아하세요?”
“** 좋아하세요?”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제대로 말해야 할 텐데…. 걱정이었다. 항상 중요한 순간에 말이 꼬여 엉뚱한 말을 한다는 걸 알기에 몇 십 번을 연습했다.
“** 좋아하세요?”
매우 조심스러운 상황이라 말을 가려야 했다. 그러니 긴장에 또 긴장!
그 말을 해야 하는 순간까지 긴장하며 입에서 중얼중얼. ‘** 좋아하세요?’ 그리고 이제 권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상황은 대체로 무난하게 넘어갔다. 별 일 없었고.

玄牝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현 듯 깨달았다. “** 좋아하세요?”라고 물어야 하는데 “** 드세요?”라고 물었다는 것을. 아하하.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저 나의 채식 경험이 나의 말버릇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어 좀 웃겼다. 어떤 사람들에겐 특정 음식을 좋아하는 것과 먹는 것이 동일한 경험이겠지만, 내겐 그렇지 않다. 일례로 내 음식의 향수는 라면이지만, 난 라면을 먹지 않는다. 농담처럼 내가 채식을 관둔다면 라면 때문이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라면 특유의 인스턴트와 조미료 맛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좋아한들 무슨 소용이랴. 나는 라면을 먹지 않고, 내가 먹을 수 있는 라면이 없는데.

아무리 연습해도 소용없다. 좋아하는지 보다 먹는지가 내게 더 중요한 이슈다. 십 몇 년을 이 이슈에 부딪히며 살다보니 이젠 몸에 익었다. 그래서 긴장하는 순간, 말을 하기 전까지 연습한 말이 아니라 몸에 익은 말이 튀어나온다. 긴장하면 그냥 알아서 몸에 익은 말이 나온다. 채식은 나의 언어 습관도 바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