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인권오름] [나와 당신의 거리] 너무 먼 것처럼 느낄 뿐이다

눈치 챈 분도 있을 듯합니다. 요즘 제가 쓰는 글에서 어떻게든 엮으려고 애쓰는 지점은 퀴어와 장애 이슈입니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작년부터 둘의 연관 관계를 모색하며 짧게라도 글에서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의 가장 큰 영향은 2009년 가을부터 시작한 장애-퀴어 세미나고요. 굳이 기원을 찾아가면 트랜스젠더 이슈와 장애 이슈의 고차점을 고민하도록 한 화장실 이슈네요.
문제는 저 자신이 아직 충분히 정리한 상황이 아니란 점입니다. 저도 단편적 아이디어와 고민으로 둘을 엮어내고 있죠. 그래서 내용이 너무 서툴고, 저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글에서 계속 언급하려고 하는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 안에서 충분히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한두 줄이라도 꾸준히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고민을 정리하는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죠. 제 오랜 습관 중 하나는 고민을 속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펜과 손가락으로 한다는 것. 그래서 글을 쓰지 않을 때면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펜과 손가락이 움직이지 앟으면, 고민도 한두 문장의 단편으로 그칩니다. 크크. ;;;
암튼. 며칠 전 인권오름에 글을 하나 실었습니다. 욕심이 과해 망했지요. 엉엉. 마감 문제만 아니었으면 그냥 포기했을 법한 글입니다.
아, 그리고 이 글은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최초 기고버전. 청탁을 받고 원고 마감일까지 보낸 첫 번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전체 기획 내용을 담아서 수정해달라는 요청에 따른 수정 버전입니다. 기획 연제의 큰 주제는 “나와 당신의 거리”입니다. 전 글에서 직접 거리나 공간을 언급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거리나 공간을 느낄 수 있길 바랐죠. 하지만 이런 글은 내공이 장난이 아닌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작업!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망했죠. 크크. ㅠㅠ 그래서 거리 얘기를 분명하게 담았습니다. 아쉬운 점은 장애 이슈와 퀴어 이슈의 교차점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현재 상황에서 저의 한계입니다. 언젠간 좋아지겠죠, 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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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지난 4월 7일, 비가 내렸다. 라디오에선 난리였다. 우산을 꼭 챙겨야 한다고 했다. 교육청은 교장에게 휴교령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이유는 많은 이들이 짐작하는 한 가지, 방사능때문이다. 지난 3월 일본에서 지진이 나고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서 다들 방사능 ‘전문가’가 되었다. 방사능 위험을 얘기하고, 체르노빌 원전폭발 사고를 환기하며 불안을 가중했다.

사고 초기 가까운 거리의 일본 거주민을 걱정하던 반응은 사라졌다. 방사능의 위험만 부각되었다. 사람은 사라지고 위험만 남았다. 그 위험은 질병공포, 장애공포에서 출발했고, 질병공포와 장애공포를 촉발했다. 나의 기억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여파는 언제나 병과 장애인을 전시하는 방법으로 설명되었다. 암 발병률이 몇 % 증가한다고, 신생아 중 장애인이 몇 %라고 말하며 원전의 위험을 알렸다. 일본 원전 사고 이후, 어떤 신문에선 “기형아 낳을까 무서워요 … 둘째 포기”란 제목을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포털 메인에 실린 어느 기사는 일본을 “민폐국”으로 불렀다. 물리적 거리는 그대로인데, 공포와 위험은 그 거리를 좁혔다. 물론 사람 간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내’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땐 다 괜찮았다. ‘내’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자 불안과 혐오가 터져 나왔다. 장애를 ‘비정상’과 고통으로 치환하며 규범적이고 ‘건강’한 몸에 강박적인 반응이 보편적 정서로 유통되었다. 이런 반응에 나는 나의 몸을 떠올렸다. 트랜스젠더의 몸,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의 몸, 에이즈 감염인의 몸을 향한 사회적 혐오가 떠올랐다. 사회가 ‘다르다’고 가정하는 몸을 향한 혐오와 차별이 떠올랐다.


02
몇 달 전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된 내 아들 AIDS 걸리면 SBS가 책임져라!”는 광고가 일간지에 실려 화제였다.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 ‘오염’되고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질병공포는 방사능 공포와 다르지 않다. 물론 하나는 ‘현실’이고 다른 것은 ‘망상’이라고 누군가는 구분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망상’일까? 어떤 사람에겐 방사능 위험이 현실이겠지만, 내겐 광고가 구체적 현실이다.

광고를 게재했던 집단과 관련 있을 누군가는 한동안 동성애를 “반대”하는 1인시위를 했다. 동성애를 “허용”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주장했다. 사람을 찬반으로 논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의 세상에서 퀴어는 사람이 아니란 뜻일까? 나는 우연히 1인 시위를 하는 사람 앞을 지나간 적 있다. 판넬에 적혀 있는 문구를 읽으며, 약간의 분노와 실소와 어이없음과 연민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실, 분노보다는 그저 그가 불쌍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가 느끼는 근거 없는 불안, 그 불안을 퀴어에게 덤터기 씌울 수 밖에 없는 그의 취약함에 그가 조금 불쌍했다.

그 사람 앞을 지나가며 나는 연민과는 또 다른 어떤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와 나는 전혀 모르는 사이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고, 또 너무 멀었다. 내가 트랜스젠더 활동가란 사실을 안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욕을 했을까? 아님 그저 얼어붙었을까? 내게 안전하지도 않지만 위험하지도 않은 그 거리를 걸으며 나 혼자 조금 심란했다. 그가 인간의 범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지나가는 그 자리, 나만 혼자 미묘한 기류를 느꼈다. 1인시위자에게 무관심한 사람과 1인시위자가 신경쓰이는 나와 1인 시위자는 서로 다른 공간을, 현실을 겪고 있었다.


03
방사능 위험 운운하는 언설을 통해 유포하는 장애혐오, 질병혐오는 장애인을 인간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광고 구절과 1인 시위 내용은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양성애자, 에이즈 감염인을 인간 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그 현실에서 장애인이나 퀴어가 존재하지 않느냐면 그렇지 않다. 배제한 존재를 환기하며 늘 그 존재와 함께한다. 방사능 공포가 유발하는 혐오는 장애인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는다. 광고를 게재한 이들은 퀴어와 에이즈 감염인을 강박처럼 떠올리며 불안에 떤다. 타인을 배제하는 이는 자신의 규범성, 자신은 ‘정상’이라는 항변을 입증하는 근거로서 배제할 대상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배제는 그 대상이 세상에 두루 존재하도록 하며, 세상을 이루는 토대로 만든다. 불안과 배제는, 결국 이 세상을 이루는 토대가 소위 말하는 ‘정상’/규범이 아니라 배제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른 말로, 이 세상은 소위 규범적/’정상적’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것이 아니다.

내가 1인 시위자 앞을 지나간 것처럼, 내가 간과하고 있는 이들이 어디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간과해서 그저 없는 것처럼, 나와 너무 먼 것처럼 느낄 뿐이다.

_M#]

최초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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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몸 같은 건 없다.
루인(트랜스젠더 연구활동가, runtoruin@gmail.com)

  지난 4월 7일, 비가 내렸다. 라디오에선 난리였다. 우산을 꼭 챙겨야 한다고 했다. 교육청은 교장에게 휴교령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이유는 많은 이들이 짐작하는 한 가지, 방사능때문이다. 지난 3월 일본에서 지진이 나고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서 다들 방사능 ‘전문가’가 되었다. 방사능 위험을 얘기하고, 체르노빌 원전폭발 사고를 환기하며 불안을 가중했다. 어느 신문에선 일본을 “민폐국”으로 불렀다.

  사고 초기 가까운 거리의 일본 거주민을 걱정하던 반응은 사라졌다. 방사능의 위험만 부각되었다. 사람은 사라지고 위험만 남았다. 그 위험은 질병공포, 장애공포에서 출발했고, 질병공포와 장애공포를 촉발했다. 나의 기억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여파는 언제나 병과 장애인을 전시하는 방법으로 설명되었다. 암 발병율이 몇 % 증가한다고, 신생아 중 장애인이 몇 %라고 말하며 원전의 위험을 알렸다. 일본 원전 사고 이후, 어떤 신문에선 “기형아 낳을까 무서워요 … 둘째 포기”란 제목을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문득 오래 전 유행한 노래가 떠올랐다.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네 / 할아버지가 히로시마에 살고 계셨다네 / 내 왼손가락은 태어날 때부터 한 덩어리로 붙어있었죠 / 언제나 주머니 속에 숨어 있는 나의 왼손”(<새끼 손가락> 김승진 노래)

  ‘내’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땐 다 괜찮았다. ‘내’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자 불안과 혐오가 터져 나왔다. 장애를 ‘비정상’과 고통으로 치환하며 규범적이고 ‘건강’한 몸에 강박적인 반응이 보편적 정서로 유통되었다. 이런 반응에 나는 나의 몸을 떠올렸다. 트랜스젠더의 몸,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의 몸, 에이즈 감염인의 몸을 향한 사회적 혐오가 떠올랐다.

  몇 달 전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된 내 아들 AIDS 걸리면 SBS가 책임져라!”는 광고가 일간지에 실려 화제였다.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 ‘오염’되고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질병공포는 방사능 공포와 다르지 않다. 물론 하나는 ‘현실’이고 다른 것은 ‘망상’이라고 누군가는 구분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망상’일까? 어떤 사람에겐 방사능 위험이 현실이겠지만, 내겐 광고가 더 구체적 현실이다. 현실이란 각자의 입장에서 구성되니, 현실과 망상이란 구분은 불가능하다.

  방사능 위험 운운하는 언설을 통해 유포하는 장애혐오, 질병혐오는 장애인을 인간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광고 구절은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양성애자, 에이즈 감염인을 인간 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그 현실이 배제한 사람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배제한 존재를 환기하며 늘 그 존재와 조우한다. 방사능 공포가 유발하는 혐오는 장애인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는다. 광고를 게재한 이들은 퀴어와 에이즈 감염인을 강박처럼 떠올리며 불안에 떤다. 타인을 배제하는 이는 자신의 규범성, 자신은 ‘정상’이라는 항변을 입증하는 근거로서 배제할 대상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배제는 그 대상이 세상에 두루 존재하도록 하며, 세상을 이루는 토대로 만든다. 불안과 배제는, 결국 이 세상을 이루는 토대가 소위 말하는 ‘정상’/규범이 아니라 배제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른 말로, 이 세상은 소위 규범적/’정상적’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배제하는 대상을 ‘투명인간’으로 만든다. 규범의 불안한 토대를 타인에게 덤터기 씌운다. 이것이 지배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비규범적 존재가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퀴어는 언제나 일상 생활에서 제 삶을 살아가지만, 이것이 문제될 것 없다. 퀴어의 몸은 뭔가 다르고, 규범적 이성애자의 몸만이 ‘건강’하고 ‘행복’하다는 강박이 퀴어의 삶을 고단하게 만든다. 우발적 사고만이 불안을 조성하지 않는다. 사고의 결과,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또 다른 ‘건강’ 강박이 낙인을 만들고, 몸의 위계를 만든다. 문제는 퀴어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니고 또 다른 누군가도 아니다. 기준을 알 수 없고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어떤 ‘건강’ 강박, ‘규범’ 강박이 문제다. 퀴어만 아니라면, 장애인만 아니라면 ‘건강’하고 ‘행복’할 것이라는 근거없고 실체 없는 믿음이 문제다. 비장애인만, 규범적 이성애자만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 건강과 행복에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문제다.

  다시, 비가 내린다. 이번엔 어떤 비가 내릴까? 타인을 배제하는 공포가 반영된 비가 내릴까? 하지만 ‘건강’한 몸 같은 것, ‘정상’적인 몸 같은 것, 그런 건 없다.

_M#]

[인권오름] 먹는다는 것은 외모를 해석하는 것, 젠더를 실천하는 것: 채식, 외모, 그리고 트랜스/젠더

인권오름 원고 세 번째~

오랜 시간 제 블로그에 오신 분이라면 익숙한 얘기예요. 흐. 인권오름 원고를 쓰겠다고 했을 때부터 저 혼자 의도한 것이기도 하고요. 다만 흩어져 있던 얘기를 좀 더 읽기 쉽게 다듬긴 했어요. ;;; 어떤 의미에선 완전 새 원고지만, 소재나 주장은 워낙 익숙하고 진부해서, 예전 원고 재활용한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요.. 아하하. ㅠ_ㅠ 사실 제가 쓰는 모든 원고가 제겐 워낙 진부한 내용이라 늘 걱정합니다. ‘아, 이 정도 논의는 이미 세상에 널리고 또 널렸는데… 이미 다 아는 얘기를 또 하는 건데 꼭 해야 할까?’라고. 흑흑흑.

암튼… 삽화가 참 발랄하게 들었가지만… 흠… 뭔가 상당히 복잡한 기분이 드네요.. 나쁘진 않지만 썩 유쾌한 기분도 아니랄까요..  -_-;; 흐흐.

“먹는다는 것은 외모를 해석하는 것, 젠더를 실천하는 것: 채식, 외모, 그리고 트랜스/젠더”
인권오름에서 읽기: http://goo.gl/56g2
웹페이지 버전으로 읽기: http://goo.gl/V9oO

그냥 여기서 읽기.. 흐.

***

[#M_그냥 여기서 읽기|닫기| *지난 번 글( http://goo.gl/fSPH )에 이어서 읽으면 편해요. 🙂

#삽화, 하나
단골로 가는 가게. 그곳에서 주로 먹는 메뉴를 주문할 때면 늘 마요네즈를 빼달라고 했다. 채식을 하며, 계란을 비롯한 유제품도 먹지 않기에 음식을 주문할 때마다 별도의 요청이 많다. 그 가게는 나름 단골이었고 직원은 내가 마요네즈를 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골이었기에 친하다고 느낀 걸까? 음식을 포장하면서 직원이 내게 물었다. “남자 분이 다이어트 하는 것도 아니고 마요네즈는 왜 빼세요?”

#삽화, 둘
가끔 들러 밥을 먹는 식당. 나물 반찬이 잘 나오는 가게지만 계란 반찬이 꼭 딸려 나온다. 먹지 않는 반찬을 받는 건 낭비기에, 매번 거절한다. 역시 몇 번 갔더니 내가 익숙하다고 판단한 걸까? 주인은 “계란도 없고, 반찬이 없어 어떻게 한 대..”라고 걱정했다. 식탁엔 나물 반찬만도 상당했다. 빠진 것은 육식의 한 형태인 계란 뿐이었다. 계란이 빠진 나의 식탁은 반찬이 없는 것일까? 주인은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더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계란을 잘 먹던데…”

음식을 섭취하는 일은 단순히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는 행위가 아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문화를 실천하는 일이다. 나의 경험에서 채식은 이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실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간섭한다. 혹자는 한국이 나물 반찬이 많기에 그나마 채식을 하기 편할 거라고 말한다. 물론 나물 반찬이 많긴 하다. 나물 반찬에 젓갈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과는 별도로, 나물 반찬이 많다고 해서 채식이 편한 건 아니다. 타인의 행동이 ‘나’와 다르면 간섭하고 훈수 둘 수 있고 때때로 교정해야 한다는 오지랖이 일상인 사회라, 채식을 비롯한 ‘다른’ 행동은 늘 피곤함과 고단함을 동반한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만약 내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으로 보이는 외모였다면 어땠을까? 첫 번째 삽화의 점원은 내가 다이어트한다고 단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의 실천은 채식이 아니라 다이어트로 치환된다. 다이어트가 여성에게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다이어트의 정치학은 부각되어도 채식의 정치학은 희석된다(이 두 정치학이 경합한다는 건 아니다). 두 번째 삽화의 주인이라면, 다이어트하냐고 물었을까? 적어도 “요즘 젊은이들은 계란을 잘 먹던데…”와 같은 말은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비슷하게, 음식을 배식하는 식당에서 여성의 밥과 남성의 밥의 양이 다를 때가 많다. 음식 섭취와 채식은 외모를 통해 해석하는 젠더에 따라 달라진다. 즉, 채식을 한다는 것,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젠더 규범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고민한다. 트랜스젠더이며, 남성은 아니지만 남성으로 곧잘 통하는 나의 외모로 나는 늘 고민한다. 내가 만약 호르몬 투여를 상당 기간 진행해서, 여성으로 통하는 외모였거나 여성인지 남성인지 헷갈리는 외모였다면? 그랬다면 점원이나 가게 주인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세상엔 여성과 남성만 존재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트랜스젠더란 존재가 있긴 하지만, 일상에서 만날 순 없다고 여긴다. 트랜스젠더는 여전히 관계 맺기의 기본 토대가 아니다. 아울러 트랜스젠더라면 호르몬 투여를 하고 수술도 하여, 여성이나 남성으로 통하는데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 즉, 의료적 조치를 ‘아직’ 안 했거나, 의료적 조치를 선택하지 않는 트랜스젠더를 상상하지 않는다. 만약 세상에 여성과 남성만 존재한다고 여기는 사회가 아니라서 상대의 외모로 젠더를 판단하지 않는 사회라면? 그런 세상에서 나의 행동은 어떤 다른 문화양식과 젠더 규범으로 해석될까? “남자 분이 다이어트 하는 것도 아니고 … “와 같은 말은 어떻게 변할까? 채식과 음식을 먹는 일은 젠더 규범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리고 상대의 음식 습관을 관찰하는 일은 상대의 외모를 관찰하는 일이다. 젠더 판단은 거의 언제나 관찰하는 이의 경험(상상력의 한계)에 바탕을 두고 상대의 외모로 결정된다. 결국 외모에 맞춰 개개인의 젠더를 단정하고, 이렇게 단정한 젠더에 맞춰 식습관을 달리 대한다는 점에서, 채식이나 음을 먹는 일은 내게 트랜스젠더 이슈기도 하다. 트랜스젠더 이슈는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상대를 겉모습으로 피상적인 판단을 하며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단정하는 그 찰나는, 그 단정이 옳건 그르건, 트랜스젠더 이슈를 조우하는 찰나기도 하다.

그나저나 난 밥 먹다 말고 무슨 생각이 이리도 많담…_M#]

***

웹 페이지 버전과 인권오름 버전은 딱 한 줄이 다릅니다. 상단에 건 링크가 빠졌는데, 인권오름에선 필자의 원고를 하단에 모아주니
필요가 없네요. 흐. ;;; 근데 이게 자동으로 모아주는 게 아니라 편집자가 수작업하는 거 같아요…
본문도 조금 다를까요?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는… 아하하. ;; 아무려나 판본이 다양하다는 건 재밌는 일이지요. 😛

[인권오름] 세계를 다르게 경험하기: 채식, 건강, 그리고 해석

지난 번에도 소개했듯, 인권오름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새 글이 떴어요. 후.

인권오름 편집본: http://goo.gl/fSPH
발송용 웹페이지본: http://goo.gl/fFsp

사실 이 글이 “인권”오름에 적합한지 고민했지만, 그냥 보냈습니다.;;

초고는 9월 초에 작성했습니다. 병원에 갔다 온 다음날인가 그 다음날에 적었으니까요. 지금은 재검을 받으러 갈 날을 가늠하고 있고요. 추석연휴와 편집자의 휴가로 미뤄지다보니 지금에야 공개되었달까요.

하지만 글의 주제는 아프다는 것 자체가 아니기에 상관없습니다. 그럼 주제가 뭘까요?

ㄱ. 경험이란 세계를 해석하는 핵심이자 투명하다? 지난 주말에 글을 이메일로 보내고 나서야 경험본질주의로 읽힐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글 말미에 부연설명을 할까 했습니다. 귀찮아서 관뒀지만요. 흐.

ㄴ. 채식을 바탕으로 얘기하며, 다른 경험은 다른 정치학을 형성하지만 지배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정치학은 정치학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표면적으론 그렇습니다.

ㄷ. 자기 주장이 분명한 듯해도, 루인은 갈등한다? 넵! 아무리 명징한 언어를 가진 듯하고,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어도 끊임없이 갈등한다는 게 글의 주제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크크. 😛

자시 세계가 분명한 듯해도 갈등하고, 자기 언어가 명징한 듯해도 여전히 불안한 감정이 제 주요 관심입니다. 쾌락 속에 불안이 머물고, 불안 속에 쾌락이 머무니까요.

[#M_여기서 원문 읽기|링크 가기|

인권오름 2010.09.

세계를 다르게 경험하기: 채식, 건강, 그리고 해석

by 루인

 

아기가 결석 진단을 받았다. 이제 다섯 달 조금 더 지난 아이가 결석이라 의사도 당황했다. 매우 특이한 경우라며, 연신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며 다른 사료와 캔은 절대 주지 말고 처방사료만 주라고 했다. 다른 사료를 줬다간 결석으로 방광이 터져 죽을
수도 있다면서.

 

처방사료는 아무래도 육식일 듯하여, 환기시키는 겸 채식사료를 준다고 했다. 엄마고양이의 중성화 수술로 그 병원에 갔을 때 의사에게
말했고, 아기가 아파 병원에 갔을 때 나를 보자 곧바로 엄마고양이의 이름을 대며 안부를 물었기에, 기억하는 줄 알았다. 의사는
채식사료란 말에,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며 성묘는 괜찮아도 어린 아기일 경우, 채식사료로 결석이 생겼을 수도 있다고
했다. 예전에도 채식사료를 먹는 아이가 결석으로 왔다면서. 정확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결석이 있는 모든
고양이가 채식을 하는 것은 아니며, 채식을 하는 모든 고양이에게 결석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상관관계가 있다고 가정해도 괜찮은
걸까?

 

집사인 나는 90년대 초중반 즈음부터 채식을 하고 있다. 세상에 채식주의라는 게 있는 줄도 모르던 시절, 지금은 밝히기 수줍은
이유로 채식을 시작했다. 그래서 여덟 아이를 임신 중인 동네고양이를 입양했을 때, 당연하단 듯 채식사료를 선택했다. 갈등이 없었던
건 아니다. 고양이는 육식동물이라 채식사료를 주면 안 된다는 글이나 말과 채식사료가 더 좋다는 말이나 글 사이에서 고민이
상당했다. 생전 처음 고양이와 사는데, 흔하지 않은 선택을 한다는 점도 걱정을 부추겼다. 그럼에도 채식사료를 선택하고 고집하는
건, 분명 나의 이기심이다.

 

그럼 고양이의 ‘선택’은? 인연인지 우연인지, 엄마고양이를 임시 보호했던 집 역시 채식을 한다. 엄마고양이는 그 집을 직접
선택했고, 채식사료를 아그작와그작 먹으며 머물렀다. 내게 온 이후, 엄마고양이는 내게서 벗어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가지 않고 내 곁에 머물렀다. “야옹”과 “냐아아옹”이라는 언어로만 소통하는 관계에서, 나는 그런 행동을 내가 제공하는
환경에서 살겠다는 고양이의 선택으로 해석했다. 해석이란 언제나 자의적이지만, 자의적이기에 함께 할 수 있는 법이니까.

 

사람들은 내게, 채식을 하고 나서 몸과 건강이 많이 좋아졌냐고 묻곤 한다. 이런 질문은, 솔직히 곤혹스럽다.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적어도 2000년대 들어, 병원에 한 번도 안 갔으니 건강한 걸까? 알러지성 비염과 신경성 편두통을 빼면 특별히 아픈 곳이
없으니 건강한 걸까? 잘 모르겠다.

 

단지 잘 몰라서 곤혹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채식과 건강의 상관관계 혹은 음식과 건강의 상관관계가 논쟁적이기 때문이다. 난 이 둘이
밀접하게 관련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채식을 하면 몸이 좋아진다는 말을, 안 좋아진다는 말 만큼이나 믿지 않는다. 한국에서
웰빙 열풍이 불기 전까지만 해도, 채식은 건강을 해치는 방법이었다. 적어도 내가 살아온 환경에선 그런 인식이 만연했다. 웰빙
열풍이 불자 채식은 건강하게 사는 방법으로 바뀌었다. 나의 행동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행동을 해석하는 틀만 바뀌었다. 나의
채식은 건강에 안 좋은 식습관에서 건강을 위한 식습관으로 변했다. 그래서 난 채식이 몸에 더 좋다는 말도, 그렇지 않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해석하는 틀과 지배적인 흐름이 변한다면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그럼 나와 사는 고양이들은? 적어도 엄마고양이는 매우 건강하다. 길에서 일 년 정도 살았지만, 피검사를 했을 때 깨끗했고, 나와
살기 시작하며 모질이 확실히 좋아졌다. 이것이 채식사료의 효과인지 집이라는 영역에서 밥과 물 걱정 없이 살 수 있기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느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아울러 채식사료를 먹는 다른 집 고양이들 역시, 어디 아픈 곳 없이 건강하다고
한다. 채식을 해서 건강한 건지, 집에서 살아서 건강한 건지 알 수 없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아기고양이가 아프다. 결석이 생겼고 약과 처방사료를 먹어야 하고, 한 달 뒤 재검을 받아야 한다. 의사는 결석의 주요
원인으로 채식사료를 꼽았다. 고양이건 개건 육식동물로 분류되는 동반종이 채식을 하는 경우가 흔한 건 아니기에 채식은 분명 두드러진
변수다. 그래서 채식은 의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요인 중 하나다. 난 의사의 추정을 신뢰하지 않는다. 처방사료만
먹여야 한다는 처방을 불신하는 건 아니다. 의료화와 의료권력을 비판하지만, 내 목숨이 아니라서 의사의 처방을 쉽게 무시할 수도
없다. 내가 불신하는 건 처방이 아니라 채식과 결석, 채식과 건강의 관계에 대한 의사의 진단과 해석이다. 의사는 육식을 밑절미
삼아 세상을 해석하고 나는 채식을 밑절미 삼아 세상을 해석한다. 나와 의사의 다른 입장, 음식에 바탕을 둔 다른 경험은 몸과
몸으로 살아가는 세계를 달리 해석하도록 한다. 그래서 채식이건 육식이건 음식을 먹는 행위는 세계를 해석하는 행위, 즉,
세계관이다. 육식을 당연하게 여기고 고양이는 당연히 육식을 해야 한다고 믿는 사회라서, 채식을 세계관으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고민한다. 내 목숨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을 책임져야 하는 생명의 목숨을 걸고 선택한 결정이라, 갈등도 심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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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하는 곳에서 제가 앉는 곳 주변 사람이 모두 감기에 걸렸는데.. 그래서인지 알 수 없지만, 요즘 감기에 걸렸습니다. ;ㅅ;
이 시기에 감기에 걸린 일이 거의 없어 당황했다는..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