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꽃 지며 꽃바람 불 때 난봉꾼이 태어났다

작년 수업 시간에 쓴 쪽글입니다. 그냥 마무리해야 할 듯해서 마저 올립니다.
그나저나 요즘은 면식 수행의 길에 들어설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조만간에 자세하게..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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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0.화. 15:00-
봄 꽃 지며 꽃바람 불 때 난봉꾼이 태어났다
-루인
박철수. <학생부군신위> 1996.
임권택. <축제> 1996.
Itami Juzo伊丹十三. <장례식 The Funeral> 1984.
Takita Yōjirō滝田洋二郎. <굿’바이  おくりびと> 2009.
2012년 봄. 아버지의 장례식장. 조문실에 종일 유폐되어 있다가 잠시 밥을 먹을 때였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육류 중심의 장례식장 음식으로 먹을 것도 마땅찮았지만 뭐라도 먹긴 해야 했다. 점심을 먹기엔 너무 늦었고 저녁을 먹기엔 너무 이르지만 밥과 김을 챙겨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음식 준비와 손님 맞이를 위해 고용한 분의 말소리가 들렸다, 상주가 참 정성스럽네.. 저러다가 쓰러지겠네… 내게 하는 말이었다. 조문객을 받을 때마다 내야 했던 곡소리를 지칭한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장례식을 진행한지 이틀 만에 그 분과 나는 처음 만났고 그 동안 우리가 만날 기회는 나의 곡소리 뿐이었다. 곡소리만큼은 정말 성실하게 냈었다. 목이 쉰다고 곡소리도 쉬어 가며 하라는 얘길 들을 정도로 곡소리를 쉬지 않고 냈다.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의 한 장면처럼, 복식(腹式)으로 곡소리를 냈다. 곡소리만 들으면 나는 정중하고 또 예를 갖춘 상주였다. 더 정확하게는 곡소리만 예를 갖춘 상주였다. 조문실에서 나는 가장 예의 없고 문제인, 고인의 죽음을 불행하게 만든 존재였다. 하고 다니는 꼴은 규범적 젠더에 부합하지 않으며 특정 나이에 기대하는 어떤 것도 이루지 않았다. 그러니 일하는 분과 내가 이틀 만에 만난 건, 이원젠더 규범이 야기한 성역할의 효과기도 했지만 나를 조문실로 유폐하고자 했던 유족의 욕망과 친족법의 효과기도 했다.
박철수 감독의 영화 <학생부군신위>(1996)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1996)는, 비록 영화 보는 재미를 주진 않지만 장례식을 재현하는 작품이란 점에선 흥미롭다. 두 영화는 고인의 탄생(!)부터 입관, 발인, 그리고 하관까지 장례식의 기본 절차를 차례로 정리한다. 아울러 한국 사회의 장례식장에서라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의 일부를 담고 있다. 남성 역할인 사람은 조문실에 있거나 방에 앉아 훈수를 두거나 음식을 받아 술을 마시고 있다. 여성 역할인 사람은 모두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조문객이 앉을 자리를 정리한다. 조문객은 이런 날 취해야 한다며 술을 마시고 또 밤새 화투를 친다. 어떤 조문객은 술에 떡이 되어 볼썽사나운 풍경을 연출한다. 그리고 장례식장마다 꼭 한 명은 있는 ‘난봉꾼’ 역시 두 편의 영화에 등장한다. 장례식장은 이원 젠더 규범을 재생산하는 공간인 동시에 ‘난봉꾼’을 생산하는 공간이다. 두 영화가 흥미롭다면 바로 이 지점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축제>에서 난봉꾼 역할은 준섭(안성기)의 형이 외도로 데려온 딸 용순(오정해)가 담당한다. 데려온 딸이란 점은 다른 가족과 어울리기 힘든 이유가 되고(도대체 왜?) 용순의 화려한 화장은 장례식장에 어울리지 않게 튄다. 용순은 존재 자체로 불편하다. <학생부군신위>에서도 사실상 ‘데려온 아이’가 난봉꾼 역할을 한다.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고인을 애도하고 장례식장을 어지럽히고 차동차를 폭발시키는 등 다양한 사고를 일으킨다. 이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고인을 애도하지만, 관습적 애도 문법에 부합하지 않고 이것은 이들을 문제적 존재로 추방한다. 내가 겪은 몇 번의 장례식에도 난봉꾼이 있었다.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삼촌의 장례식장에서 난봉꾼 역할은 내가 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난봉꾼 역할은 내가 했다. 그러니까 내가 문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성애-이원 젠더 관습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촌의 장례식장엔 의도하지 않게 매니큐어를 하고 갔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선 머리카락이 너무 길고(그리 길지도 않았지만) 성취한 것 하나 없는 천덕꾸러기란 점이 문제였다. 그리하여 나는 장례식 질서를 깨는 존재였고 그 자리에 두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어디 갖다 버릴 수도 없는 존재였다. 장례식장에서 지켜야 할 규범적 (젠더)질서, 이 질서를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가 난봉꾼 생산의 주요 기준으로 작동한다. 그렇다고 누구나 난봉꾼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많은 장례식장에서, 술에 떡이 된 존재가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하지만 그는 그냥 내쫓기면 그만이다. 난봉꾼은 내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들일 수도 없는 존재, 즉 유족의 지위를 가지면서 고인을 애도할 권한을 주장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다른 말로 고인을 애도하는 규범적 절차에 따라 애도하는 행위는 난봉꾼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시간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슬픔이란 감정이 아니라 슬픔을 표현하는 형식, 절차다.
한국의 장례식 절차를 다룬 <학생부군신위>와 <축제>가 일본의 장례식 절차를 다룬 이타미 쥬조의 영화 <장례식>(1984)과 타키타 요지로의 영화 <굿’바이>(2009)를 만나면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이것은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과 얼굴이다.
한국의 장례식장에서 슬픔은 그 표현이 격할 수록 좋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울면서,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온다면 이것은 고인을 가장 절절하게 애도하는 행위로 이해된다. 그래서 유족이 슬픔을 격하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그토록 중시하는 예법을 위반한다고 해도, 유족이라면 이 위반은 용인된다. 아울러 <학생부군신위>와 <축제> 모두에서 나오지만 한국의 장례식장은 떠들썩할수록 좋고, 유족의 곡소리와 울음 소리가 클수록 장례식 분위기가 난다고 평가받는다. 곡소리가 나고 식장을 가득 채울 법한 울음 소리가 날 때, 그때야 비로소 장례식장이 장례식장으로 구성된다. 장례식장이 조용하다면 이건 차분한 게 아니라 쓸쓸한 것이며 고인을 외롭게 만드는 일이다. 한국의 장례식장은 말 그대로 축제의 자리며 유족과 조문객이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누는 만남의 장이다. 반면 영화에서 재현하는 일본의 장례식장 풍경은 차분하다. 슬픔을 표현하고 또 울지만 고인을 최대한 담담하게 보낸다. 특히 <굿’바이>에 등장하는 다양한 집안의 장례식은 고인을 애도하는 방식이 반드시 슬픔과 곡소리, 울음의 형식이어야 하는 건 아님을 알려준다. 한국의 장례식장에서 버럭 화를 내는 큰 소리가 난다면 이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지만, 일본의 장례식장에선 버럭 화를 내기도 한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이 감정 표현을 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고인을 애도하는 감정에 어떤 형식을 부여하느냐의 차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굿’바이>에 나온 몇몇 집안처럼 좀 더 경쾌하게 고인을 애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부럽다. 슬픔의 형식, 고인을 애도하는 형식을 규정하는 한국의 분위기가 난봉꾼을 생산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과 일본의 차이는 또한 고인의 얼굴에 있다. 한국의 가정집에서 장례식을 치를 경우, 고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제한된다. 고인은 줄곧 병풍 뒤에 머문다. 유족과 조문객은 병풍 뒤에 존재한다고 상상하는/믿는 고인을 애도한다. 병풍 뒤에 머문 고인은 얼굴을 가린 상태다(죽음은 이불이나 천으로 얼굴을 덮은 것으로 상징된다). 그리하여 유족이 아니라면 고인의 얼굴을 볼 기회가 없다. 이제 기업화된 장례식장에서 장례식을 치르면서 고인은 유족과 더 멀어졌다. 고인을 애도하는 조문실에 고인은 없다. 고인은 지하 냉동실에 잘 보관되어 있다. 유족 역시 식장에서 허락하는 시간, 정확하게는 장례 절차에 따라 고인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는 시간에만 얼굴을 볼 수 있다. 고인을 얼마나 잘 염습하는지 직접 확인할 방법도 없다.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이미 염습이 다 끝난 뒤다. 그리하여 장례식장의 유족과 조문객은 고인의 얼굴을 고인의 시신에서가 아니라 고인을 기억하는 조문객의 얼굴에서 혹은 고인과 닮은 유족의 얼굴에서 조우한다. 반면 일본의 장례식 절차는, 특히 가정집에서 장례식을 치르는 경우 유족과 조문객은 고인의 얼굴을 계속 확인할 수 있다.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인의 얼굴을 살아 생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정리하고 재현하고자 한다. 이것은 고인을 보내는 매우 중요한 절차기도 하다. 고인을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건 죽음을 좀 더 가까이서 직면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인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건 삶과 죽음이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삶과 함께 한다는 걸 깨닫는 경험일 수도 있다. 즉 죽음은 공포와 낯선 사건이 아니라 그냥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경험이 고인을 애도하는 형식을 좀 더 다양하게 만든 것이 아닐는지. 그리고 현대 한국 사회에서 죽음이 낯선 공포의 사건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건, 장례식장에서조차 조문실과 고인이 완전히 분리된 상황과 무관하지는 않을 듯하다. 애도하는 자리에 죽음은 상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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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서.. 네 편의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 장면은 <장례식>의 마지막 즈음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부산에 갔을 때는 아직 서울에 봄꽃이 피지 않았었다. 장례식과 삼우제를 지내고 서울로 돌아왔을 땐 봄꽃이 지고 있었다.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것만 같은 그 풍경이 내겐 인상적이었다.

규범적 슬픔, 젠더의 재생산: 장례식, 트랜스젠더, 그리고 감정의 정치

지난 8월, 여름엔 글을 쓰는 게 아니라고 말하던 당시에 투고한 원고가 출판되었습니다. 출판은 이미 두어 주 전에 되었지만 파일은 이제 나온 듯하여..

글 제목처럼 “규범적 슬픔, 젠더의 재생산: 장례식, 트랜스젠더, 그리고 감정의 정치”입니다. 장례식장에서 겪은 일을 트랜스젠더 맥락에서, 이성애-이원 젠더 규범을 재/생산하는 장례식을 감정의 정치로 독해한 글입니다. 좀 더 잘 쓰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이젠 어쩔 수 없지요..
사실 현재 출판 판본으로 “1. 감정/정치”라고 짧게 쓴 부분은 뒤늦게 급히 추가했습니다. 감정과 관련한 논의를 정치적 이슈로 여기지 않는 인식이 만연한 편이라, 이 글의 논의를 맥락화해야겠다고 판단했거든요. 하지만 없는 게 더 좋다고 믿어요. 나중에 단행본으로 재출간하는 기회가 생긴다면 이 부분은 삭제했으면 하고요.
암튼 뭔가 또 하나 시작했구나 싶습니다. 감정의 정치는 워낙 할 얘기가 많은 이슈라, 저도 이번 글을 ‘이 이슈로 앞으로 계속 고민하고 글을 쓰겠습니다’라고 다짐하는 기분으로 투고했고요.
관심 있으시면 언제나처럼 위의 “writing” 메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성애규범성, 불/편함과 슬픔, 그리고 장례식

2012년 10월 18일에 제출 쪽글입니다. 공개를 할까 말까를 좀 고민했습니다. 고민하다 귀찮아서 미뤘더니 벌써 두 달도 더 지났네요. 크. ;;;
공개를 망설인 이유는 이 글이 기말페이퍼 초안에 가까운 내용이라 그냥 기말페이퍼를 완성하면 그것을 공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관련 주제로 기말페이퍼를 쓰다보니 욕심이 생겨(혹은 기말페이퍼를 제대로 못 썼다는 속상함에) 출판을 해야겠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고 내년 중에 어떻게든 출판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초안은 좀 더 묵혀두기로 하고, 쪽글을 공개합니다.
주제는 일전에도 몇 번 공개한 적 있는, ‘트랜스제더/퀴어, 감정’입니다. 감정과 퀴어이론을 연결해서 쓴 글 중에선 가장 처음 쓴 글이기도 하고요. 물론 엄밀하게 따지만 지난 봄에 쓴 “장례식과 퀴어의 위치성”이 최초지만요. 뭐, 어떤 글이 최초냐는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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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애규범성, 불/편함과 슬픔, 그리고 장례식
-루인
이성애가 일련의 규범과 이상으로서 뿐만 아니라 몸과 세계를 형상하는 감정을 통해서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는지를 고려하는 것은 중요하다(Ahmed, 146).
“네가 번듯이 취직하고 결혼만 했어도, 그래서 외국여행이라도 보내드렸다면 네 아버지는 이런 사고를 겪지 않았고 돌아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느냐.”
병원에서 장례식장으로 자리를 옮긴 새벽 세 시, 친척 어른이 내게 처음 한 말이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던 그 시간, 그래서 슬픈지 슬퍼해야 하는지 어떤지 종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모든 감정, 특히 슬픔과 애도는 이성애 욕망, 이성애규범성, 이성애가족규범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거의 모든 조문객이 내게 공통으로 한 말, “이제는 결혼하자” “네가 결혼만 했어도…” “네 아버지가 손자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슬픔과 애도는 유족을 걱정하는 방식이고 고인을 기억하는 형식이지만, 또한 이것은 이성애가족구조를 환기하고 고인과 유족을 이성애제도의 적법한 구성원으로 소환한다.
감정은 투명한 것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다. 슬픔과 애도는 특히 지배 규범을 통해 재현된다. 사라 아메드(Sara Ahmed)가 데이비드 엥(David L. Eng)의 논의를 빌려, “9.11 이후 애도의 공적 각본은 이성애규범성의 기호로 가득했다”(157)고 말했듯, 슬픔과 이성애규범성은 얽혀있다. 슬픔은 이성애규범성을 통해 표현되고 이성애규범성은 슬픔과 애도를 매개하여 제 토대를 더욱 견고하게 한다. 고인은 이성애 서사에서 획득한 것과 획득하지 못 한 것, 유족은 이성애 서사에서 제공한 것과 제공하지 못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손자를 획득하지 못 한 고인과 번듯한 직장, 결혼, 손자 어느 것도 제공하지 않은 나는 이 평가 체계에서 실패자(였)다. 나와 고인의 실패는 슬픔과 애도를 증폭했다. 울음이 넘실거리는 찰나, 조문객의 애통함은 고인의 부재 때문인지 나의 실패, 고인의 ‘실패’ 때문인지 모호했다.
그 많은 언설에 내가 할 수 있는 반응은 침묵이었다. 대답을 다그치는 이들에겐 마지 못 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들의 언설에 ‘대항’할 수 없었다. 이성애규범이 자연질서인 장례식장에서 비이성애 실천, 비이성애 상상력은 존재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이성애가족규범의 윤리를 통해서만 슬퍼할 수 있고 또 슬퍼해야 했다. 비이성애적 감정은 고인을 애도하지 않음, 고인의 마지막 소원마저 거부하는 불효막심함, 그리하여 장례식 행사와 공간을 망치는 망나니짓에 불과했다. 그 전까지 이성애 가족 서사에 부합하지 않는 나의 행동과 삶의 양식은 그저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것에 불과했다. 장례식장에서 나의 삶은 이성애규범성을 위협할 수 있기에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는, 강하게 규제해야 할 행동이었다. 이성애 가족 구성원의 일부면서 퀴어고 트랜스젠더인 나는 애도에 참여할 수도 없고 애도에서 추방될 수도 없는 위치를 점했다.
사흘 간 장례식장에 머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애도 뿐이었다. 애도할 수 있는 적법한 위치에 있지 않음에도, 규범성의 실패자로 규정되었음에도 그랬다. 할 수 있는 것이 애도 밖에 없다는 말은 다른 역할에선 배제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규범적 가족 서사에서 요구하는 ‘아들’처럼 산 적 없는 내게 모든 조문객은 이제 ‘아들’(그리하여 ‘남성’)로 살 것을 요구했다. 사흘 내내 나는 그 얘기만 들었다. 하지만 모든 장례 절차에선 주변인이었다. 내게 ‘남성’이 될 것을 요구한 모든 사람, 특히 친척 어른 누구도 ‘남성’ 역할이라 부르는 어떤 의사결정에서 내게 의견을 묻지 않았다. 애도의 이권 다툼에서 혹은 슬픔의 공적 전시에서 결정권자는 ‘상주’인 내가 아니었다. 장례식장에 머물지만, 애도를 주도해야 하지만 그곳에 푹 파묻혀(“sinking”) 있을 수 없었고 모두가 내게 적절히 행동할 것을 요구하지만 원하지는 않는 듯했다.
그리하여 장례식장은 내가 애도할 수도 없고 애도하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 공간이었다. 장례식장과 나는 서로 부대꼈다. 부대낌은 내가 머무는 공간이 어떤 규범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생생하게 포착하도록 했다. 편하게 슬픔과 애도의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상주와 유족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슬픔과 애도라면 그것은 나의 역할이 아니었다. 슬픔과 애도를 규정받았지만 슬픔의 규칙과 애도의 규범성은 나를 배제했다. 내가 머무는 공간에서 나는 겉돌았다. 그리하여 나는 슬퍼할 수 없었다. 이 불편한 감정은 슬픔을 상쇄하거나 내가 느끼는 슬픔이 어떤 제도적/정치적 감정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도록 했다. 내가 슬퍼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라는 자리의 상실 때문인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조우한 사람의 상실 때문인가, 슬퍼하고 울어야만 제대로된 애도라고 믿는 윤리 때문인가. 아메드는 공적 공간의 이성애규범적 애도와 퀴어의 애도를 따로 설명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별개의 사건인 것은 아니다(아메드 역시 이를 별개라고 논하는 것은 아니다). 트랜스젠더인 내게 고인을 애도하는 일은 이성애규범적 애도와 퀴어의 애도가 충돌하고 경합하는 경험이다. 이 갈등에서 그리고 불편을 느껴야 하는 구조에서 또 다른 슬픔이 밀려왔다. 비규범적 젠더-섹슈얼리티를 실천하는 이에게 이성애규범적 장례식장은 이중의 슬픔을 생산한다.
아메드는 “퀴어 정치학을 위한 도전은 슬픔의 다른 방식을 찾고 다른 이의 슬픔에 반응하는 것”(159)이라고 했다. 맞다. 현재 사회에서 슬픔은 단 한 가지 방식 뿐이다. 다른 방식의 슬픔과 애도 실천은 ‘망나니짓’에 불과하다. 그러니 슬픔과 애도에 관한 ‘다른’ 정치학이 필요하다. 이때 다른 정치학은 퀴어의 이중 슬픔을 읽는 방식을 포함할 것이다. 규범성과 얽혀 있고 섞여 있지만 완전히 용해되지는 않은 그런 슬픔이 퀴어의 슬픔이고 이 슬픔의 정치학이 규범을 상대화하고 재구성하는 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