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와 연인』 중에서

조국은 남자의 발명품이다. 조국(祖國)은 말 그대로 ‘할아버지의 나라’이지 할머니의 것이 아니다. 광개토대황의 조국이든 윤도현의 조국이든, 혹은 유관순의 조국이든 그것은 죄다 남자의 것이다. (… 중략 … ) 그것은 효도가 부모들의 발명품이고 우정이 약소자(弱小者)의 발명품이며 연애가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사실과 다를 바 없다. (21)

대의(大義)가 푯대라면 그 푯대 아래 ‘동지’가 모인다. 그들은 거사(擧事)에 함께 투신하고 혁명에 신명을 바친다. 그 과정에서 취향은 무시되어도 좋고, 사랑조차 종종 걸림돌일 뿐이며, ‘의사소통적 합리성’도 부차적이다. 더불어 벤야민의 비평론이 가릋듯이, 객관성(Saclishkeit)마저도 당파적 실천을 위해서 희생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배신만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다.
그러나 친구에게는 대의도 이데올로기도, 관념의 일관성만으로 묶어둘 끈도 없다. 전두환들이나 김영삼들이, 최민수들이나 강호동들이 웃는 표정만으로 족하다. 이론이 부재한 자리를 정서적 일체감이 들물처럼 채우는 사적(私的) 우연성, 그것이 친구다. 공유된 이념이 없으니, 원칙상 배신도 존재할 수 없는 두루뭉수리한 관계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배타적 관계의 형식은 대의와 이념의 부재가 남긴 정서의 진공 속에서 생긴다. 대의는 공간적 관념의 정합성이 없는 대신, 친구는 ‘시간’을 먹고 산다. 이와 대조적으로 동지는 무시간적 관계랄 수 있는데, ‘같은 뜻[同志]’은 원리상 시간을 초월해서 동아리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햇차가 좋고 묵은 술이 좋다고 하듯이, 친구는 시간의 명암과 굴곡을 거치며 얻은 탁하고 묵은 관계다. 그것은 시간이 보존해온 향수이며, 그 향수를 공유하는 몸의 기억이 만든 관계다. 그래서 친구의 관계가 정실에 치우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동무는 동지도 친구도 아니다. 굳이 조어로 그 취지의 한 극단을 잡아내자면, 동무는 동무(同無)다! 오히려 서로간의 차이가 만드는 서늘함의 긴장으로 이드거니 함께 걷는다. 공유된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면서 히틀러나 스탈린의 수염 같이 가지런히 정돈된 길을 행진하는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길없는 길’을 걷고 어울려 다른 길을 조형하면서, 잠시만 한눈을 팔면 머 -얼 -리 몸을 끄 -을 -며 달아나 그림자조차 감추어버리는 관계다. 그것은 일찍이 니체와 짐멜만이 거의 유일하게, 그러나 다소 흐릿하게 파악한 ‘신뢰’의 관계다. 우선적으로 ‘기분’과 ‘감정이입’의 차원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것은 친구가 아니며, ‘뜻(이념)’ 중심주의적 결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지도 아니다. (31-33)
김영민 『동무와 연인』 서울: 한겨레출판, 2008.

요즘 한글로 쓴 책이나 글을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어 잠들기 전 이 책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문장 좋은 글을 읽고 싶었는데, 이런 바람에 부합하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괜찮은 구절이 많다. 위에 인용한 구절도 그 중 일부다. 특히 같은 뜻이란 시간을 초월한다는 구절,  동무는 동무(同無)는 곱씹을 만하다.

가족이란 고민

이번 학기엔 수업을 한 과목만 듣는다. 어찌어찌하여 선택한 과목은 가족과 관련한 수업인데, 수업에 들어가기 전 이 수업을 통해 무엇을 고민할까를 고민했다. 보통 수업 첫 날 선생님들이, 이 과목을 듣게 된 이유를 물어보기에 그에 적절한 답변을 모색하는 거기도 했지만, 그런 과정과는 별도로 어쨌든 이 과목을 듣기로 했다면 이 과목에서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배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고민은 필요 없었다. 주제어는 “트랜스젠더/퀴어와 가족”으로 어렵지 않게 잡았다. 그러면서 트랜스젠더들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인지, 가족구성권이란 어떤 의미인지를 고민해야지 했다. 이런 고민을 기말 논문으로 풀어내면 좋겠다는 안일함도 있었다.

지난 토요일(9월 1일) “우리, 여기에, 함께”의 기획으로 개최한 포럼인, “한국에서 성적소수자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에 다녀왔다. 다녀온 후 고민이 한층 많아졌다는 점에서, 확실히 잘 간 것 같다. 포럼에서 사람들의 얘기와 고민을 들으면서, 확실히 주제에 대한 고민이 짧았다는 걸 새삼 깨달았으니까. 그래서 아쉬운 건, 어제인 일요일에도 다른 행사가 있었는데 결국 못 간 거. 가고 싶었지만 발등에 불인 걸 어쩌랴.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후 즈음의 시기에 사람들과 만나서 루인의 관심 주제를 얘기할 때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루인에겐 확실한 주제가 있다고. 그런 말과는 별도로 스스로도 확실한 주제가 있다고 자만한 시절이 있다. 웃기게도 그때 얘기했던 주제는 기껏해야 “트랜스젠더/퀴어와 관련해서 쓰려고요” 정도였다. 지금에야 이런 말이 코미디에 가까운 발언인 걸 알지만(국문과에 입학하면서 “소설과 관련해서 쓰려고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그땐 정말 이 정도면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런 믿음이 한 달을 못 갔다는 거랄까. ㅜ_ㅜ

가족과 관련해서 글을 쓰겠다고 했을 때의 고민 역시, 이와 같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트랜스젠더/퀴어와 가족의 어떤 지점을 고민하려는 건지 더 깊이 있게 고민하지 않았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이렇게 막연하게 주제를 잡고 있었던 건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다는 깨달음. 제도적인 가족구성권, 부모를 비롯한 가족에게 자신을 얘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상황들, 얘기를 한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얘기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얘기하는 과정은 어떤지, 얘기를 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의 과정은 어떤지, 이런 얘기를 들은 가족들의 반응과 이런 얘기를 가족들은 어떻게 경험하는지, 한국사회에서 친족어들은 성별이분법에 따라 구분할 수 있는데 트랜스젠더라고 커밍아웃을 한 후 가족과 친족들 사이에서 이런 호칭은 어떤 식으로 바뀌고 있는지(지금까지 불렀던 방식으로 부르는지, 다르게 부르는지, 계속 헷갈리는지, 의도적으로 섞어 사용하는지 등등) 등등. 또한 아들로서의 경험을 얘기한다는 것이 곧 자신을 “남성”으로 설명하는 건 아니고, 딸로서의 경험을 얘기한다는 것이 곧 자신을 “여성”으로 설명하는 것도 아닐 때, “남성”/”여성”으로만 구분하는 가족관계에서 자신을 “여성”/”남성”이란 식으로 구분하지 않는 트랜스들은 어떻게 협상하고 있는지, 혹은 “남성”/”여성”이란 식으로 자신을 얘기하는 트랜스라고 해서, “딸”(ftm의 경우)/”아들”(mtf의 경우)로 자신을 설명하기도 하고 “딸”(ftm의 경우)/”아들”(mtf의 경우)로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서의 경험들을 마냥 부정하는 건 아니란 점에서 젠더화된 가족/친족 관계에서 트랜스젠더들은 어떻게 협상하는지, 등등.

기말레폿 수준에서 모색하기엔 하나 같이 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은 얘기들이다. 하지만 좀 더 하고 싶은 얘기로 쓰겠지(좀 더 하고 싶은 얘기란 후자의 두 가지).

아무튼, 토요일에 참가한 포럼은 일정 간격으로 계속해서 개최하는 행사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