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스의 『흑인 페미니즘 사상』 서평

작년에 콜린스의 『흑인 페미니즘 사상』 서평을 『여/성이론』 21호(2009년 겨울)에 실었다. 이런 식으로 서평을 써도 괜찮은 걸까,라는 고민을 많이했다. 작년 10월 말에서 11월 초 이곳 [Run To 루인]에 쓴 글 중에, 관련 고민을 포스팅한 것도 몇 개 있고…

난 내가 쓴 글을 가급적 이곳에 공개하길 바라지만, 출판된 글이기도 하고, 관습적인 서평의 형식에도 안 맞아 공개를 꺼렸다. 근데… 문득 공개하고 싶은 바람이 생겨서… 으하하.

출판한 글이니 좀 긴 편입니다. 뭐, 제가 길이를 따져가며 글을 공개한 적은 없지만요.. 으하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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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스의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봉합사 삼아 트랜스페미니즘을 모색하기 위한 메모
-루인(트랜스젠더/퀴어 활동가, runtoruin@gmail.com)

01
클럽에서 일하며 장기간 호르몬을 투여하여 ‘여성’으로 통하는 mtf, 제이 씨가 병역면제가 안 되어 입대를 해야 한다는 얘길 들었다. 소식을 전해준 마리 씨 역시 다른 사람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입대 판정 이후 제이 씨와 연락이 잘 안 된다는 말과 함께. 나는 모르는 척, 제이 씨에게 안부문자를 보냈다. 제이 씨는 고향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클럽에서 일하다 보니 몸이 안 좋아 몇 달 고향에 머물며 요양할 계획이라고 했다. 제이 씨가 병역면제를 받을 수 있도록, 제이 씨, 마리 씨, 그리고 나 셋이서 함께 병원에 가기도 했으니(모든 실무는 마리 씨가 진행 했다) 입대여부를 확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입대 준비로 고향에 가는 걸까,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척, 푹 쉬고 서울 오면 꼭 만나자고만 했다.

핸드폰을 닫자 슬픔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고민이 쏟아졌다. 제이 씨의 경험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세상엔 여성과 남성 뿐이라는 젠더 이분법을 고집하는 사회에서, 제이 씨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추방당한 걸까? 아님, 남성에서 남성으로 구속된 걸까? 트랜스젠더에서 남성(젠더 이분법 규범)으로 박제당한 걸까? 국민국가의 성원권은 가질 수 없지만 의무는 이행해야 한다는 걸까? 혹은 처벌의 일종인 걸까? 이 시대의 젠더와 몸은 도대체 무엇일까? 무수한 낚시 바늘 모양이 내 몸에 박혔다.

아마 우리와 그들이란 경계, 범주명명과 구분이 흐려질 수 있다는 불안이 제이 씨를 추방한 원동력이었으리라. 이런 고민을 하며 나는 패트리샤 힐 콜린스의 책, 『흑인 페미니즘 사상』(박미선, 주해연 옮김. 서울: 여이연, 2009)을 읽었다.

[#M_계속 읽기|길어서 관두기| 00
옮긴이의 표현을 빌리면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지식, 의식, 힘기르기의 정치”라는 부제가 시사하는 대로 자신이 처한 상황과 욕망하는 바를 인식하고 그것을 몸에 체화시키고, 이를 통해 따로 또 함께 힘을 기르는 정치에 대한 것이다.”(517) 백인중심사회에서 흑인여성으로서, 스스로를 정의하고 자신이 정의한 관점으로 자신과 세계를 해석하고자 한 노력의 결실인 이 책은 흑인여성(사상가)의 언어로 미국 페미니즘 이론을 다시 쓴다. 그리하여 흑인여성 집단에게 지식과 언어가 존재함을 증명하고 지식과 언어가 흑인 여성의 힘기르기에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매력 중 하나는 젠더 범주를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의 범주와 얽히고 설킨 상태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다양한 범주가 복잡하게 얽혀 작용한다는 건 단순한 덧붙이기가 아니다. 흔히 ‘여성’ 간의 차이를 얘기할 때 젠더 경험은 동일하며 인종에 따라, 성적 지향에 따라 차이가 난다고 설명한다. 즉, 모든 여성은 젠더와 성차별을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하는데, 흑인여성은 인종차별을 하나 더 경험하고, 레즈비언 흑인여성은 추가로 호모포비아도 경험한다는 식이다. 이런 식의 논의는 각각의 범주를 투명한 것으로, 경합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반면 콜린스는 모든 범주가 복잡하게 얽힌 상태로 작용함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예를 들어, ‘과학적 모성’을 주장하는 미국사회에서 백인여성은 하루 종일 집에 머물며 ‘과학적’으로 아이를 돌볼 수도 있(었)겠지만, 가사노동과 생계부양을 모두 해야 한 흑인여성에게 ‘과학적 모성’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이런 맥락에서 1960년대 중산층 백인여성이 집에서 나와 일자리를 갖는 것이 ‘해방’이었다면, 흑인여성은 일자리를 포기하고 집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저항 행위였다. 즉, 모든 ‘여성’은 동일한 젠더를 경험하지 않는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다양한 범주가 얽혀 있는 ‘다른’ 젠더를 경험한다. 따라서 젠더 규범은 투명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특정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의 이익을 반영한다. 콜린스는 흑인여성의 언어와 경험을 통해, 바로 이러한 복잡함을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다. (복잡하게 설명한다는 것이 문장을 꼬아서 쉬운 걸 어렵게 쓴다는 것이 아니다. 콜린스는 가볍지 않은 내용을 ‘쉽게’ 쓴다.)


(앞의 01에 이어서 다시)01
내 몸은 이 책과 기이한 거리를 형성했다. 때로 책 속의 문장과 나의 말은 일치했고, 때로 나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방황했고, 때론 책과 내 몸의 물리적 거리보다 더 먼 곳에 있는 제이 씨를 떠올렸다. 거의 항상, 젠더를 이분법으로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이제는 ‘여성’으로 통하고 자신을 여성으로 설명하는 제이 씨 혹은 mtf/트랜스여성을 군대로 추방한 사건을 떠올리며 이 책을 읽었다.

02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읽는 동안, 나는 이태원에서 살아온 트랜스젠더 혹은 변태의 역사 쓰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선정적인 이슈로 다룬 신문기사와 르포집에만 남아 있을 뿐, 지배적인 역사와 학술논문에선 누락된 이들. 기지촌 이태원의 역사와 함께하며 성노동을 생계 삼아 살아온 mtf 혹은 어떤 변태들. 이들의 기록은 파편처럼 흩어져 쉽게 모을 수 없는 곳에 있었고, 지금과 다른 이름으로 살아 숨쉬고 있었다. 나는 이 기록들을 모아 꿰매고 땜질하며 ‘다른’ 역사를 상상했다. 그러며 콜린스의 말을 중얼거렸다. “누락은 억압의 한 패턴이다.”(29)

트랜스젠더 혹은 비규범적인 방식으로 젠더를 표현하는 이들을 보도하는 언론과 이를 접하는 대중은 ‘세상에 이런 일이!’란 식으로 반응한다. 이것은 비규범적인 존재들을 누락하기 위한 규범적인 반응이다. 지배규범의 안위를 위해 비규범적인 존재를 낯설고 생뚱맞은 존재로 만드는 것. 그리하여 매 순간 기이한 존재로 만드는 것. 백인중심사회가 자신들의 인종은 순수하단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아니 자신들은 ‘인종’이 아니라고 믿기 위해 흑인을 고의로 누락하거나 과잉성애화하는 것처럼. 하지만 낯설음의 반복, 과도한 놀람의 반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의적인 누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기실, 언제나 신경쓰고 있다는 고백은 아닐는지. 이 시대의 규범을 지탱하는 “노새”(93) 같은 존재를 모른 척하고 싶은데 자꾸 신경쓰여, 과도하게 놀라며 마치 전혀 몰랐다는 것처럼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백.

기지촌이나 성노동/성매매를 논하는 글 중 트랜스젠더를 언급하는 글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단어만 나열하는 정도다. 트랜스젠더 맥락에서 분석하진 않는다. 콜린스도 예외는 아니다. 이 책엔 “트랜스젠더”란 단어가 여러 번 나오지만 트랜스젠더 맥락에서 분석하진 않는다. 그저 LGBT를 나열할 때만 등장한다. 콜린스가 섹슈얼리티와 젠더를 사용할 때, 이 범주는 이성애-비트랜스여성과 레즈비언-비트랜스여성만을 의미한다. 이 책 뿐 아니라 여타의 기지촌 논의와 젠더이론에서도 트랜스젠더는 사실상 부재한다.

그럼에도 이 책은 내가 트랜스젠더 역사쓰기를 시도하는 내내 비빌 언덕이었다. 콜린스의 책은 비규범적인 존재들의 역사쓰기를 위한 인식론과 방법론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전범(典範)이다. 그런 콜린스도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아우르는 이 책을 기획하고 쓰며, 흑인여성을 단순화, 획일화할 가능성을 염려했다. 자신에게 이 작업의 자격이 있는가를 고민했다고 쓰고 있다. 비교할 바 아니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트랜스젠더 범주로 묶은 이들은 모두 오늘날 트랜스젠더의 경험과 특징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경험과 특징이 있는 이들이다. 하지만 단 몇 줄로만 남아있는 이들을 어떻게 감히, 오늘날의 범주인 트랜스젠더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비록 범주가 유사한 경험을 묶어내는 도구라고 해도 범주는 언제나 존재 자체를 규정할 위험을 안고 있다.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그들이 트랜스젠더였는지 아닌지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인종과 젠더를 간단하게 치환하거나 유비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콜린스의 고민과 시도를 내것으로 읽었고, 그의 말은 나의 말이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위험에도 내가 역사쓰기를 시도한다면 트랜스/젠더 이슈를 둘러싼 어떤 논쟁도 없는 현재 상황보단 나을 거라고 믿으며!

감히 비유하건데, 앨리스 워커가 조라 닐 허스턴의 무덤을 찾듯, 언어의 무덤에서 트랜스젠더의 유골을 찾았다. 내가 잘 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마다 콜린스의 책을 뒤적였다. 아무 페이지를 펼쳐도 나의 고민과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20년 전까지만 해도 학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지적 전통의 산물이다.”(오몰레이드, 콜린스에서 인용, 53) “흑인여성의 경험으로부터 글을 쓴다면 그것은 또한 보편적 경험으로부터 글을 쓰는 것입니다. … 보편적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를 부정하며 백인인척 할 필요는 없지요.”(산체스, 콜린스에서 재인용, 79)

03
“흑인가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흑인여성의 노동과 가족 패턴이 왜 전통적으로 이상적인 가족의 표면적 정상성으로부터 일탈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가족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지를 분석해야 한다.”(97)

지배규범에서 비규범적인 존재들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지만, 이것은 거의 언제나 규범을 견고하게 만든다. 콜린스도 지적하고 있듯, 이는 비규범적인 존재를 무력하고 언어 없는 존재로 재/생산한다. 하지만 차이의 증거로 분류되는 이들의 몸 없이 규범은 존립할 수 없다. 그래서 규범은 차이를 부정하기보단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근거로 전시하며 차이를 관용한다. 따라서 분석대상은 지배규범이 생산되고 구성되는 과정이어야 한다. 내가 다른 곳에 썼듯, 이 시대의 ‘문제’는 비규범적이라고 불리는 존재의 ‘특이함’이 아니라 규범적이라고 불리는 존재의 ‘평이함’이다.

위에서 인용한 콜린스의 말을 트랜스젠더 맥락으로 변형하고 덧대면 다음과 같다. ‘트랜스젠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트랜스젠더의 젠더 체화와 몸 경험이 왜 전통적인 젠더(이분법)에서 일탈하는가를 설명할 것이 아니라, 젠더와 몸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왔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명료하지만 간단하지 않다. 트랜스젠더를 다루는 많은 글은 여전히 트랜스젠더를 부가적으로 다루거나 뭔가 다른 존재로 가정하며 접근한다. “어릴 때 어떤 문제가 있어서 트랜스젠더가 되었나요?”와 같은 질문으로. 물론 이제는 이런 식의 질문 자체가 문제란 인식이 널리 퍼져 있어 이렇게 묻지는 않는다. 대신 침묵한다. 혹은 표면적으론 세련되었지만 트랜스젠더를 부인하는 방식으로 말한다. 콜린스가 인용한 러셀의 경험처럼(162-3), “난 네가 트랜스젠더건 아니건 신경 쓰지 않아.”

많은 경우, 트랜스젠더를 막연하게 하리수 씨 정도로만 상상하기에, 이들에게 의료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 트랜스젠더, 비이성애-트랜스, 모니터 밖에서 살고 있는 트랜스젠더는 여전히 낯설다. 모든 트랜스젠더가 의료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이들도 일상생활에서 사람을 만날 땐 비트랜스여성이거나 비트랜스남성일 거라고 가정한다. 그래서 피부표면만으로 (인종을 분류하듯) 상대가 비트랜스여성인지 비트랜스남성인지를 알 수 있다고 확신하며 젠더를 분류한다. 결국 트랜스젠더를 상상하기 어려운 건,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건, 트랜스젠더가 낯설어서라기 보다 자기 자신의 젠더 범주와 경험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젠더, 아마도 비트랜스젠더 범주를 공리로 삼기에 트랜스젠더는 언제나 모니터 속에 갇힌다. 하지만 공리란 자명한 사실이 아니라 ‘그렇다고 치자’란 암묵적 담합이란 점을 이해한다면, 정작 질문해야 할 지점은 공리의 구성과정 자체다.


04(원한다면 00에 이어서)
매우 ‘진부한’ 얘기지만, 만약 ‘백인’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즘 사상을 썼다면 그는 『백인 페미니즘 사상』이 아니라 『페미니즘 사상』이란 제목을 붙였으리라. 로즈마리 통이 그랬듯. 개인의 삶을 분류하기 위해 고안한 여러 범주들 중 특정 하나(이 경우, 젠더)를 기준으로 삼고 나머지 범주(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장애-비장애 등)를 부가적인 것으로 삼을 때, 그 페미니즘은 이미 보편이기에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보편’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집단이라면 별개의 수식어를 붙여 의미를 제한해야 한다. 조금도 진부하지 않게, 이런 구조에서 내가 트랜스젠더 역사를 쓰고 이론을 만들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는 ‘젠더 이론’이 아니라 ‘트랜스젠더 이론’이란 수식어를 필요로 한다. 비트랜스의 경험만 다루는 책은 비트랜스젠더 이론이란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럼 오늘날 한국에서 생산되고 있는 페미니즘과 젠더 이론은 제이 씨의 경험 맥락과 교차할 때, 어떤 수식어로 제한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 나온 많은 페미니즘과 젠더 이론은 소위 ‘한국인’이라고 불리는 어떤 범주의 사람들만 다뤘고 비트랜스만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비트랜스-한국인 페미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단적으로, 누가 ‘한국인’인가? 고조선 때부터 한반도에서 조상이 살았다면 한국인일까?(근데 어떻게 증명하지?) 이럴 경우, 고려말 귀화한 이자춘-이성계 일가는 한국인이 아니다. 그럼 조선 이후 한반도에서 줄곧 살아온 조상을 둔 사람들? 이런 식의 구분, 한국인 정의(定義)는 미국에서 흑인을 구분하기 위해 피 한 방울 원칙을 들먹이는 것과 같다. 그리고 누가 트랜스젠더인가? 최소한 의료적 조치를 한 사람만 트랜스젠더인가?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명명하면 의료적 조치와 상관없이 트랜스젠더인가? 어떤 이는 성전환수술을 하고 호적상의 성별을 바꾸지만 자신은 트랜스젠더가 아니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쉰 살에 자신을 트랜스여성으로 설명하고 의료적 조치를 취하는데, 그럼 그의 일생은 어떤 범주가 되는가? 그 전까지는 ‘남성’이었던 역사가 갑자기 ‘벽장에 숨어지낸 트랜스여성’으로서 50년의 삶이 ‘진정한’ 범주를 찾으려 한 여정이 되는가? 평생 누구에게도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얘기하지 않았고 그 어떤 관련 흔적도 남기지 않은 트랜스젠더가 있다면 그는 트랜스젠더가 아닌가? 혹은 그는 트랜스젠더인가? 국적도, 혈연도, 민족 범주도, 젠더 범주도 명확하지 않고 모든 경계는 모호하다. 그렇다면 사실상 매우 제한된 범주의 몸만 다루면서 ‘우리 여성’을 논한다고 믿는 논의를 어떻게 명명할 수 있을까?

명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이 시대의 규범적인 존재, 규범적인 몸 형태와 피부표면, 규범적이라고 불리는 규범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짐작만 할 수 있지 그 규범을 명명할 언어는 없다. 그 자신을 무수한 수식어로 제한하거나(이성애-비장애-서구-비트랜스-백인-남성이란 식으로) 다른 집단을 제한하여(레즈비언-흑인-여성이란 식으로) 그것이 아닌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규범’이란 막연한 표현 외에 달리 가능한 언어는 없다. 규범이 언어가 필요 없는 ‘그 자체’여서만은 아니다. 규범이 언어로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화되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사실상 언어로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규범만큼 불확실한 것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집단적 믿음을 통해서만 존립할 수 있다.

05
콜린스는 힘기르기를 중시하고 교육과 언어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콜린스의 책 자체가 흑인여성의 언어로 기존 논의를 재구성할 때 역사와 이론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훌륭한 증거다. 따라서 비규범적인 존재에게 언어는 일종의 힘이며, 힘기르기의 밑절미다. 그리고 그 힘은 상상 이상으로 세다.

몇 해 전, 한국을 방문한 앨리스 워커는 여성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 가부장제는 충격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의 소설 『컬러 퍼플』에서 씰리가 미스터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그토록 고압적이던 미스터가 충격을 받고 아무 말도 못 했던 것처럼. 혹은 한 mtf가 서울서 지하철을 타고 가다 자신을 쳐다보던 이에게 “트랜스 처음 봐요?”라고 한 마디 했을 때, 쳐다보던 이가 도망갔다던 일화처럼. 비규범적인 존재의 언어에 규범이 충격을 받는 건, 비규범적인 존재도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아서가 아니다. 정작 그 자신에게 언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는’ 존재는 규범적인 존재다. 지배관계와 규범은 언어의 부재를 암묵적으로 합의하며 침묵할 때 유지된다. 그러니 비규범적인 존재들이 말을 하고,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하는 순간, 자신에겐 언어가 ‘없다’는 불안을 품고 사는 지배규범은 매우 취약하게 무너지거나 폭력을 행사한다.

서저너 트루스가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듯, 트랜스젠더들이 방송에서, 매체에서, 일상에서 “누가 여성이고 누가 남성인가?”란 질문을 던질 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규범의 언어는 없(었)다. 비트랜스여성과 비트랜스남성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막연한 환상을 믿으며 침묵으로 버텼을 뿐이다. 때때로 여러 조건을 제시하며 설명을 시도했지만, 각 조건은 이제까지 ‘여성’ 혹은 ‘남성’으로 여겼던 이들을 배제할 뿐이었다. 토대가 단단하다고 믿었지만 규범의 토대는 살얼음이(었)다. 아니다. 그것은 살얼음도 아니(었)다. 허우적대는 것이 일상이자 규범적인 행동이어서 규범의 토대란 없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거나 외면했을 뿐이다.

06(경우에 따라 03에 이어서 혹은 04의 첫 문단에 이어서 읽어도 무방)
몇 해 전 봄, 여성학 수업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수업에서 나의 삶을 설명할 언어를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들은 수업에서 트랜스젠더는 부가적인 사례였지, 기존의 젠더 자체를 문제삼는 인식론이 아니었다. “하리수와 같은 트랜스젠더도 있다”며 지나가듯 언급할 뿐, 수업은 언제나 이성애-비트랜스(젠더 이분법 규범)에 맞춰 진행했다(그 수업에 인종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그 수업 내내 강사가 정의한 젠더와 내 몸이 체화한 젠더가 달라 갈등했다. 만약 그때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트랜스젠더 경험이 배제되어 있긴 해도, 최소한 기존의 젠더(혹은 ‘여성’) 개념이 누구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알 수 있었으리라.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다른 개념을 상대화하는 도화선으로 작용하며 내가 체화한 젠더를 설명할 수 있는 힘을 주었으리라. (다행인지 그해 가을 청강한 수업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의 향연이었다.)

나는 트랜스젠더 이론의 주요 이슈 중 하나가 젠더 이분법을 공리 삼아 사실상 ‘타고난 젠더’를 전제하는 인식론에 문제제기하고, 젠더의 구성 자체를 질문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으로 ‘보편적 젠더’ 혹은 질문 없이 사용하는 젠더가 허상임을 말하려고 애쓴다. 따라서 트랜스젠더 이슈는 소위 말하는 젠더 이슈에 핵심이다. 이것은 미국사회의 젠더 규범이 중산층 백인 중심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밝히고, 젠더를 새롭게 구성한 콜린스의 작업과 매우 닮았다. 물론 단순히 이런 유사함을 들어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트랜스젠더 이론의 인식론으로 받아들인다면, 모든 흑인 페미니즘은 비트랜스젠더 이론이고 모든 트랜스젠더는 백인(!)으로 가정하는 문제를 일으킬 우려가 있다. 미국의 경우, 흑인 mtf는 백인 mtf보다 훨씬 더 트랜스혐오에 쉽게 노출되고, 여성으로 통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젠더화된 몸은 이미 인종화된 몸이란 점에서 젠더 범주와 인종 범주는 동시에 작용한다. 그럼에도 문제가 있는 방식인 줄 알지만, 젠더에 좀 더 강조점을 두고 얘기한다면, 콜린스의 논의는 비트랜스라 해도 젠더를 동일하게 경험하지 않으며 지배적인 젠더 규범과 경합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논의로 읽을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비록 콜린스의 책이 사실상 트랜스젠더를 간과하고 있다 해도, 트랜스젠더 이론에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자 내가 콜린스의 논의를 봉합사로 삼은 이유 중 하나다.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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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 보낸 판본으로 PDF 올립니다.
 http://j.mp/aOyYdI
이 글에 관한 가장 정확한 판본 및 서지 사항은 『여/성이론』 21호(2009년 겨울)에 실린 것입니다. 따라서 잡지에 실린 것을 참고해주셨으면 합니다.

뭔가 속보이는 멘트라 말을 조금 더 덧붙이면… 모 사이트에서 원문서비스를 하는데, 아직 21호가 안 올라왔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출판사에 보낸 판본을 공개한달까요. 하하. ;;

+
출판사 정식 인쇄본은
공식 인쇄본입니다. 출판 서지사항은 http://goo.gl/6Ij75

쓰지 않거나 혹은 지우는 행위

콜린스의 책 『흑인 페미니즘 사상』 리뷰를 쓰며 18년간 한국에서 미등록거주자로 살았지만 결국 ‘추방’된 미누 씨 이야기를 조금 썼습니다. 펜으로 쓴 초고 포함 총 5개의 교정본에선 남겼지만, 6번째 교정본에선 지웠습니다. 콜린스의 책과 매우 밀접한 이슈지만 제 글의 전체 주제와는 밀접하지 않을 수도 있어서요.

며칠 전 콜린스 관련 글에서, 책엔 트랜스젠더란 단어가 몇 번 나오지만 트랜스젠더 맥락에서 분석하진 않고 그저 단어만 몇 번 나올 뿐이란 지적을 했습니다.
사실 이건 바이/양성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일부러 바이/양성애의 부재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줄이라도 언급하면 어떤 식으로건 효과는 있겠죠. 하지만 전 그걸 ‘나 양성애/바이 이슈에도 관심있어서 이렇게 언급한다~’란 태도로 느낍니다. 적어도 저 자신에겐 이렇게 판단합니다. 9월에 쓴 이태원 관련 글에서도 바이/양성애를 언급할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내용은 트랜스젠더 범주로 분류할 수도 있는 이들에 관한 것인데 딱 한 곳에서 양성애/바이를 잠깐(한 줄 분량으로) 언급한다는 건, 마치 ‘나 바이도 언급했다~’란 쇼 같았죠. 제대로 분석할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분석범주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면 어설프게 언급하는 건 “언급하지 않았으니 은폐했다”는 식의 비난을 피하려는 과잉방어일 뿐이니까요. 단 한 번 언급하여 알리바이를 만들려는 어설픔이죠. 그리고 지금은, 한두 번 어설프게 언급하는 게 더 문제란 걸 배웠으니까요. 어설프게 한두 번 언급하는 건 말 그대로 타인을 자신의 지식 자랑, 정치적 올바름 자랑을 위한 악세사리로 동원하는 짓이니까요.

이런 이유로 미누 씨 이슈를 지웠습니다.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에요. 현재 한국사회의 이슈에서 콜린스의 책과 미누 씨 이슈는 상당히 시의적절하게 연결되니까요. 그리고 제 글을 읽는 이들은 누구나 미누 씨를 기대하거나 떠올릴 테니까요. 하지만 그저 서너 줄 정도, 전체에선 서너 번 정도 언급할 바엔 언급하지 않는 게 낫죠. 이런 언급은 ‘타자’를 ‘타자’로 확증하는 일이니까요.

아, 리뷰에 미누 씨 이야기를 뺏다는 변명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언젠가 이와 관련한 글을 쓰려고 계획했지만 항상 미루고 있었거든요. 그러다 오늘 다시 떠올라 쓰는 겁니다. 굳이 이번 리뷰가 아니어도, 미누 씨가 아니어도 이와 관련해서 쓸까 하다가 쓰지 않은 이슈는 상당하니까요.

그러고 보면, 이렇게 지우는 행위의 정치학을 배우면서 동시에 글쓰기 방법도 배우네요.

『흑인 페미니즘 사상』: 매우 짧은 리뷰

인종차별주의와 연관된 공포가 상당히 가시적으로 대상화된 흑인의 몸에 투사된 관념에서 나오는 것인 반면, 동성애공포증에 깔려있는 공포는 누구나 게이나 레즈비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온다. (231)

혐오범죄는 개인을 처벌함으로써 가시적인 동성애의 사례를 만들어내는데, 이러한 사례로 인해 나머지 동성애자들을 벽장 속에 가두어 두는 효과가 발생한다. 게다가, 동성애가 제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인식되자, 동성애를 공적이고 합법화된 공간에서 제거하려는 전략이 의도된다. 동성애자 결혼금지법은 동성애의 “확산”을 멈추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232)

에이즈 담론에서 아프리카, 동물, 표면상 일탈적으로 보이는 섹슈얼리티가 서로 연결된다는 점은 이러한 관념들이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Hammonds 1986; Watney 1990). 폴라 기딩스가 논의한 대로, “믿을 만한 학회지에서도 예컨대 녹색원숭이와 흑인여성을 연결한다거나 에이즈의 기원이 아프리카 성매매여성(흑인여성의 오염된 성기)에게 있다고 추정하려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계속해서 인종차별주의 이데올로기에 취약하다는 것을 드러낸다”(Giddings 1992, 458). (246-247)

그 이후 윌리암스는 포르노그래피가 성관계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이라고 논의한다. 윌리암스는 포르노그래피를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재연하는 “사유관습”이라고 보게 되었다. 윌리암스에게 포르노그래피는

관음증적인 응시주체로 하여금 상상력을 펼치며 관찰대상의 주체성을 말소해버리는 자동감각에 탐닉하게 한다. 온전한 타인과 상호작용하며 듣고 대화하고 상대를 돌보는 대신에 그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낸 감각으로 대체해 버리는 사유습관인 것이다. … 대상은 진압되어 이러한 감각이 투사되는 유순한 “사물”이 된다.(Williams 1995, 123) (249)



패트리샤 힐 콜린스의 책 『흑인 페미니즘 사상』(박미선, 주해연 옮김. 서울: 여이연, 2009)을 읽고 있습니다. 저는 섹슈얼리티와 성정치를 다룬 6장을 가장 좋아해요. 그 중에서도 포르노그래피를 사유습관으로 분석한 윌리암스의 통찰은 매우 매력적이라는. 에헷.

한국에 페미니즘 이론 공부할 때 보통 로즈마리 통의 『페미니즘 사상』을 많이 사용했는데요(요즘도 그런가요?). 저는 콜린스의 책이 훨씬 좋다고 느껴요. 기초입문으로 벨 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을 읽고 콜린스의 책을 읽는다면 무척 좋을 듯. 통의 책은 젠더를 중심으로 여타의 범주를 덧붙이며 설명합니다. 젠더는 이런데 계급에서는 저렇고, 인종이 더해지면 또 다르고 …. 어떤 보편적인 젠더(혹은 ‘여성’)를 가정하고 그 기준에 계급이나 인종을 더하며 다양성을 만드는 식이죠. 사실 많은 이들의 글이 이렇고요. 하지만 콜린스의 책은 덧붙이기 식의 설명이 아니라 뒤섞여 있는 상태에서 설명합니다. 최소한 세 가지 범주, 젠더-인종-계급의 교차점, 그리고 (이성애)섹슈얼리티의 교차점들에서 이들이 서로 얽혀 있음을 매우 잘 분석하고 있습니다. 전 이 책이 다양한 범주의 교차점을 분석하는 글쓰기나 방법론의 역할모델로, 교차점에서 사유하는 방식의 역할모델로 매우 좋다고 판단해요.

불만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이 책에서 콜린스는 트랜스젠더를 여러 번 언급합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가 분석 범주는 아닙니다. LGBT를 나열할 때만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트랜스젠더를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요? 반면 흑인 레즈비언 인식론은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는. 하하.

+또 다른 리뷰가 어딘가에 실릴 예정입니다만 … 아하하;;;;;;;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