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외로움

정치적 외로움.

이곳에 오는 분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각자의 방식으로 떠올리며 공감할 것 같다. 정치적 외로움. 다른 많은 친밀한 관계에서 얻는 사랑이나 힘과는 별개로 정치적 입장에서, 이론적 사유에서 나 혼자 뿐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분명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인데 그럼에도 그 이슈로 계속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말을 하지는 않을 때 느끼는 어떤 서운함과 외로움, ‘난 지금 뭐하고 있나’ 싶은 감정 말이다.

이를 테면 트랜스젠더 이슈에 상당한 관심이 있거나 그 자신 트랜스젠더면서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날 때, 나는 종종 어떤 기대를 한다. 그 사람이 트랜스젠더 정치학을 공부해서 글을 쓰고 떠들면 좋겠다고. 재능도 있어서 그 기대는 더 커진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다른 이슈에 더 관심을 가질 때 어쩐지 서운하고 섭섭하다. 그렇다고 또 이 감정을 직접 표현할 수는 없다. 누군가 특정 주제를 파고 들며 발화를 하는 건 별개의 문제니까. 때때로 나는 어떤 이슈가 매우 문제가 많다고 화를 내는데 이 감정을 공유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 문제 의식을 갖지 않을 때 당혹스럽기도 하다. 나만 뭔가 이상한 건가, 혹시 내가 오버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정치적 외로움. 이 말을 다시 고민하고 있다. 다른 말로 LGBT/퀴어 정치학이라고 해도 어떤 이슈는 많은 사람의 관심 대상으로 인식되지만 다른 어떤 이슈는 인식 영역에 들어오지 않는다. 동성(애자의) 결혼은 많은 사람의 관심으로, 마치 한국 LGBT 공동체에 속하면 모두가 긍정적으로 관심이 있을 것처럼 얘기된다. 트랜스젠더 이슈는 소수만, 하지만 트랜스젠더가 아니며 별관심이 없는 사람도 약간 언급은 하는 그런 이슈가 된 것 같기는 하다. 트랜스젠더 정치가 중요하다는 인식 혹은 불쌍한 트랜스젠더를 도와야 한다는 수준의 인식 정도는 생긴 것 겉다. 바이/양성애 정치는 전혀 아니다. 소수가 혹은 소수라고 할 수도 없는 사람이 얘기하지만 LGBT/퀴어 공동체에서 회자되는 방식은 ‘문제로서, 논쟁의 대상인 바이’로만 존재한다. 바이가 아니면서 바이를 떠드는 사람의 자기 위치는 안전하다. 아울러 바이는 여전히 비난의 대상으로, 비정치적 존재로 내몰린다. ‘바이/양성애’가 존재함은 아는 것 같지만 바이/양성애 인식론을 사유하는 경우는 사살상 없다(극소수만 얘기할 뿐). 퀴어의 BDSM은? 같이 이야기하기는커녕 어떤 퀴어 모임은 BDSM을 거부한다. 퀴어 정치가 단지 성적 지향의 문제가 아니라면 어째서? 무성애 정치학은? 인터섹스 정치학은? 극소수만 얘기하고 사유할 뿐 대체로 LGBTAIQ라고 하니 궁금한 집단일 뿐이다.

한국엔 어떤 공동체가 있을까? 존재는 있는데 인식론이 없다면 그것은 무슨 공동체고 어떤 정치학인 걸까. 늘 얘기하지만 동성애가 전부는 아니다. 동성애자의 삶이 먼저 좋아지면 BTAIQ도 자연스레 좋아지고 그런 게 아니다. 때론 동성애자와 그렇게만 묶을 수 없는 존재의 이해가 경합하거나 대립할 수도 있다. 퀴어, 퀴어라며 말하지 말고, 정말 퀴어하게 복잡하게 사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정확하게 나를 포함해서 하는 얘기다). 정치적 외로움을 조금은 덜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선천/생득과 선택/양육에 관하여, 두 번째

발아점: 모두에게 완자가 “148화 왼손잡이에 대한 고찰”
하지만 이 이슈는 예전에도 쓴 적이 있어서 딱히 이 글을 발아점이라고 하기엔…;;; 그리고 이것이 완자와 모완을 비난하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트랜스젠더가, 바이/양성애자가, 동성애자가 그리고 또 다른 다양한 비규범적 젠더/섹슈얼리티를 실천하고 삶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종종 받는 질문은 제목과 같다. “넌 타고난 거냐 선택한 거냐..” 이 무례한 질문을 받으면, 사실 선택인지 선천인지 고민에 빠지기 쉽다. 이런 식의 질문이 양자택일을 선택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이런 식의 질문에 워낙 많이 노출되다보니 질문 받은 내가 답을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가장 많이 드는 기분은 뭔가 막막하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분 아닐까? 왜냐면 늘 얘기하듯, 우리는 타고나기도 했고 선택하기도 했으며 타고난 것도 선택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질문, 선천과 선택의 양자택일 자체가 누가 누구에게 하는 질문인지를 물어야 한다고 믿는다. 누가 누구에게 타고났는지, 선택했는지를 증명하도록 요구하는가? 선택과 선천이라는 양자택일은 적어도 내가 아는 수준/한계에서 퀴어의 경험은 아니다. 선천-선택이란 선택지 자체가 퀴어의 경험이 아니며 양자택일 형식이 퀴어의 경험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의 핵심 문제는 이성애-이원 젠더는 전혀 건드리지 않는데 있다. 이성애-이원젠더를 질문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 타고난 것, 그리하여 당연한 것으로 가정한다. 그리하여 이성애-이원젠더는 기준이며 기준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안전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런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한다. 왜 선천과 선택 사이에서 고르도록 요구하는지를 되물어야 한다. 왜 선천이냐 선택이냐가 궁금한지를 되물어야 한다. 또한, 내가 타고났는지 선택했는지 알면 뭐하려고 묻는 건지를 따져야 한다. 그거 알면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내가 트랜스젠더 범주로 타고났다는 걸 알면 나에 대해 뭔가를 더 잘 알게 된 것인가? 내가 트랜스젠더 범주를 선택했다는 걸 알면 나에 대해 뭔가를 더 많이 알게 된 것인가? 이런 걸 알면 도대체 얼마나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인가? 무언가를 이해했다면 도대체 무얼 이해한 건가? 이 질문은 나의 삶을 묻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자의 불안과 위기감을 잠재우고 안정화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러니 내가 타고났는지 선택했는지 알려고 하지 말고, 도대체 나로 인해 당신의 무엇이 불안한지를 살피면 좋겠다.
*여기서 선천-선택을 양자택일로 여기며 고르는 것이 곧 퀴어가 아니란 뜻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퀴어정치학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재검토해야 함을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