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학교, 탐욕

벌써 몇 년 전, 대학원 석사과정에 처음 입학했을 땐 석사과정이 끝나면 바로 박사과정에 들어갈 거라 믿었다. 같은 학기의 다른 학교 지인들도 그렇게 믿었다. 친하게 지낸 사람들 중 박사과정은 나만 갈 것 같았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졸업한 지금, 절대 박사과정에 가지 않을 거라던 사람들은 유학을 준비하거나 박사과정을 알아보며 준비하고 있다. 나는? 그냥 이렇게 살고 있다.

사람들이 박사과정에 들어가지 않느냐고 물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둘 중 한 가지로 대답한다. 돈이 없다거나 학교를 안 다니 좋다거나. 둘 다 사실이긴 하다.

돈이 없어서 박사과정 입학을 망설이는 건 사실이고 현실이다. 석사과정 동안 겪은 생계비 걱정은, 정말 다시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긋했다. 난 머리가 나빠 뭘 하건 남들보다 두세 배의 시간이 걸린다. 책을 읽어도, 논문을 읽어도… 그런데 생계비를 벌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해서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난, 공부는 돈이 많거나 머리가 정말 좋거나 둘 중 하나는 만족해야 한다고 구시렁거렸다.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서, 읽고 싶은 것을 읽으며 노는 삶도 나쁘지 않다. 학교에 다녔다면 요즘처럼 글을 쓸 수 있겠는가? 지금 연재하고 있는 글을 쓸 수는 있을까?(왠지 가능할 거 같기도 하다만;;;) 물론 학교를 다니면서 배울 수 있는 즐거움도 있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서 노는 즐거움도 상당하다. 그런데..

어제(13일, 토요일) 경주에 다녀왔다. 학술대회에 발표를 하기로 했다(자원한 건 아니고 요청 받아 하기로 했다). 가는 데 사연도 있었다. 기차표 예약을 늦게 해서, 아침 6시 30분 입석을 샀다. 그럼 기차를 타기 위해선 4시 반에는 일어나야 준비를 하고, 기차를 타는데 지장이 없다. 그런데… 눈을 뜨니 5시 35분. 두둥. 그것도 내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엄마고양이가 배 위에서 꾹꾹이를 한 덕분에 일어날 수 있었다. 미친 듯이 머리 감고, 씻고, 머리 말리고, 커피 마시고, 냥이들 밥 챙겨 주고, 옷 입고… 집을 나서니 6시 7분. 평소라면 절대 불가능하지만 바쁘니 가능하더라는 그런 훈훈한(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얘기. 암튼 집에서 눈을 뜨고 세 시간 지나니 경주더라는 그런 기이한 이야기. 서둘러 가서 정신없이 발표를 하고, 논평을 듣고, 나의 무지와 무식을 깨닫고, 오랜 만에 아는 사람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그런데 그곳이 학술대회라 그런지, 자활도 학생이고, 진행팀도 학생이고… 밥을 먹는데 맞은 편에 있는 사람들은 수업 얘기를 하고, 옆자리 사람들은 논문 주제 얘기를 하고… 뭔가 낯설고 조금 슬픈 기분이었다.

서울로 돌아올 땐 대회측에서 마련한 버스를 탔다. 차는 많이 밀렸고, 그래서 두어 시간 졸다가 잠에서 깨었는데… 사실 난 공부를 하고 싶다.

지금은 놀고 있다. 논다는 개념이 다른 사람과 좀 다르긴 하다만…;;; 어쨌거나 나 나름의 방식으로 놀고 있다. 이렇게 노는 것도 즐겁다. 읽고 싶은 책과 논문을 읽으며, 내 무지를 확인하고 무지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하는 삶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문득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싶은 바람이 강하게 들었다.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 몸을 훈련하며 배우는 그런 과정과 학교 밖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각각의 매력이 달라 어느 것도 더 좋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난 너무 오래 학교에서 훈련하는 방식에 길든걸까? 그러고 보면, 초등학교 이후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계속 학교에 속했다. 8살 이후의 인생에서 학교를 떠난 시간은 대학 그만두겠다고 휴학했을 때와 지금이 전부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부분, 학제에서 훈련받 수 있는 부분을 탐하는 것일까? 다시, 학교에 가고 싶다는 바람이 들었다. 학제에서의 훈련 방식을 공부하고 싶다.

사실 이런 바람이 어제 갑자기 생긴 건 아니다. 돈이 없어서라는 대답 자체가 박사과정에 가고 싶다는 바람의 표현이기도 하니까. 석사를 졸업했던 학과에 박사과정이 있었다면 벌써 입학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로선 그 학과에 박사과정이 생길 가능성은 없다.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안이 차선으로서 대안이 아니라 최선일 수 있는 대안이기도 하다. 어떻게 할까?

돈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긴 하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까?

+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으니 이것은 분명 복이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순 없지만 그렇다고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는 말, 요즘 자주 중얼거린다.

오후 2시 30분부터 4시 20분 사이, 연구실이 있는 건물 앞: 출결제도

제이콥 헤일(Jacob Hale)은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글을 쓰려는 비트랜스젠더들을 위한 글쓰기 규칙이란 제목의 글에서, 만약 어느 트랜스젠더 이론가가 당신의 글을 비판한다면 그것을 당사자주의로 여기며 비난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얘기를 한다. 그것은 당신의 글이 논의를 할 만한 의미가 있는 글이란 뜻이며, 비난하려고 리뷰를 쓸 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여러 맥락에서 이 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느꼈다. 왜냐면, 루인의 경우, 누군가의 글을 읽다가 그 글과 관련한 비평을 하겠다고 결정하는 건(고민을 시작하는 건), 그 글이 그런 의미가 있다는 걸 의미하지, 단순히 비난하려고 글을 쓰지는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예외. 읽은 영화와 관련한 상당수의 글은 기록의 의미를 지니는 경우도 상당히 많음.] 루인이 누군가의 말에 고민을 하는 건, 그 사람의 그 말이 그 만큼 루인에게 의미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 정도의 의미가 없다면, 루인에게 그 정도의 어떤 떨림을 주지 않는다면 대체로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때론 상대방보다 루인이 더 많이 고민해서 상대방이 뜨악할 정도로;;) 그래서 인터넷 기사로 접하는 트랜스젠더 관련 기사는 거의 다 무시하기 마련이고, 댓글은 언젠가 인용해야지, 하는 정도의 목적으로 읽거나 캡쳐하지, 답글을 단다거나 일일이 기억하지는 않는다(이렇게 말하지만, 사실, 거의 다 기억하고 있다-_-;;; 켁. 흐흐). 그 만큼 한가하지도 않거니와 더 신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참, 루인이 이웃 블로거의 어떤 글에 댓글을 달지 않을 경우, 이런 이유는 절대 아니에요!!! 혹시나 오해하지 말아 줘요 ㅠ_ㅠ 블로그 글에 댓글 달기는 조금 다른 맥락이 있어요. 흑. 아, 그리고 오프라인의 만남에서도 마찬가지고요.ㅠ_ㅠ

루인은 범생이 원단에 속하는 편이라(물론 이렇게 말하면 “네가?”라며 뜨악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안다;;;) 학부 9학기를 다니며 지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결석은 5번이 안 되는 정도였는데, 이런 결석도 사자死者를 보내는 자리에 참여하기 위한 유고결석(기록상으론 결석이 아닌)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루인이 다닌 학부의 출결제도는 루인에게 그렇게 의미 있는 제도가 아니었다. 적어도 지난달까진 그랬다. 혹은 지난주까진 그랬다.

R과 루인이 다닌 학부의 출결제도와 관련한 얘기를 나누고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이와 관련한 고민이, 지금까지 학교를 다니며 간과하고 있던 많은 지점들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지점임을 깨달았다. “출결제도는 루인과 무관해”, 라는 인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니 “출결제도는 루인과 무관해”, 라는 인식조차 한 적이 없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껏 고민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닫고 있는 중이다. 일테면 루인은 루인이 범생이 원단이라는 식의 표현을 하면서 그 예로 바로 위에 쓴 문단에서 “학부 9학기를 다니며 지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결석은 5번이 안 되는 정도였는데, 이런 결석도 사자를 보내는 자리에 참여하기 위한 유고결석(기록상으론 결석이 아닌)을 포함하고 있다“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출결의 여부가 범생이라는 이미지를 구성하는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혹은 종종 농담처럼 말하는 “출결제도가 있어요?”라는 반문은 이런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할 수 있고, 이 말은 출결제도가 루인에게 얼마나 깊숙이 새겨져 있는지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지각 몇 번에 결석 몇 번인지를 얼추 기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루인에게 출결제도는 너무도 강력하게 작동한 제도라는 걸 의미한다.

여기에 아울러, 출결제도가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이래로 교육제도가 요구하는 방식의 몸만들기(주민등록제도와 관련한 글을 읽다보면 박정희는 이런 제도를 “몸에 익히도록 하라”고 얘기한다)의 하나임을 깨닫고 있다. 수업에 지각하면 안 된다는 느낌들, 수업을 빠지는 행동을 통해 마치 뭔가를 위반했다고 느끼는 쾌감들 모두 출결제도가 만든 효과들이다. 이런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제도가 제도적인 강제가 아닌 루인의 욕망인 것처럼, 루인의 의지에 따른 행동이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느끼며 루인의 욕망으로 얘기한 셈이다. 수업을 빠지면서, 그 재미없는 수업을 빠지면서도 그것을 정당화하는 말을 자신에게 반복하고, 너무도 자주 뭔지 모를 책잡히는 느낌과 죄책감들 모두 이런 교육제도와 밀접하게 관련 있다는 걸 이제야 비로소 깨닫고 있달까. 출결제도를 통해서 학교제도를 고민한 적이 없고, 출결제도와 관련한 루인의 감정들이 어떤 역사적인 맥락 속에 있는지를 이제야 비로소 깨닫고 있다.

생생한 감정을 나눠서 고마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