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갈등의 순간: 생존과 확장

만약 조선일보에서 내게 원고청탁을 한다면 글을 쓸 것인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까? 글쎄… 고민이다.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다.
몇 해 전 인기가 상당했던 첨바왐바의 텁덤핑이란 곡. 한국이라면 민중가요 혹은 운동권가요라 부를 법한 노래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멜로디만 좋으면 가사와 정치적 함의를 개의치 않는 시대, 이 노래의 인기가 신기할 것 없다. 그런데 이 노래와 관련한 고민은 위 영상의 후반에 나온다. 몇몇 대기업이 이 노래를 광고에 사용하겠다고 제안했고, 첨바왐바는 받아들인다. 물론 그렇게 받은 금액은 모두 해당 기업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단체에 전액 기부했다.
“이런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몇 해 전 누군가가 내게 이 이슈를 질문했다. 그 시절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계약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첨바왐바의 결정도 나쁘지 않다는 말도 못 했다. 지금이라면? 나도 첨바왐바처럼 할 거 같다.
다시 첫 번째 문단에서 던진 질문. 조선일보 같은 신문에서 트랜스젠더 이슈로 원고청탁을 한다면 글을 쓸까? 쉽지 않은 문제다. 해당 신문의 논조를 비판하는, 아니, 아예 무관심한 나이기에 거절할 가능성이 클까? 세상 일이 이렇게 간단하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다. 조선일보를 애독하면서 트랜스젠더 이슈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조선일보만 구독하는 집에서 트랜스젠더 이슈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아울러 한겨레로 대표하는 어떤 정치성과 조선일보로 대표하는 어떤 정치성이, 트랜스젠더 이슈에서 무슨 차이가 있을까? 둘 다 트랜스젠더 이슈에 감수성이 없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고민한다. 평생가야 내게 원고청탁을 할 일 없을 어떤 지면에서 내게 원고청탁을 하면 나는 어떤 결정을 할까를 고민한다.
고민은 많겠지만 수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느낀다. 이런 판단엔 현재 트랜스젠더 이슈를 둘러싼 논쟁의 판이 너무 좁다는 아쉬움 때문이기도 하다. 아니, 현재 한국사회에서 트랜스젠더 이슈를 논하는 판이 있기는 할까? 어떤 판이라고, 일군의 무리라고 말할 만한 규모가 있긴 할까? 사실상 없다. 트랜스젠더 이슈란 몰라도 무방한 그런 이슈일 뿐이다. 판이 너무 좁아서, 아직도 세상에 트랜스젠더란 존재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라서, 종종 갑갑하다. 판이 좀 커졌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트랜스젠더 이슈를 말하는 사람이 더 많길 바라는데, 없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적다. 그래서 트랜스젠더 이슈를 말하는 지면이 한 곳이라도 더 늘기를 바라는 몸으로(비록 그 지면이 단발성이겠지만) 글을 쓰겠지?
아울러 어차피 트랜스젠더 이슈로 누군가가 글을 쓴다면 내가 쓰자는 심정이기도 하리라. 물론 내가 최선은 아니다. 나보다 관련 이슈를 더 잘 쓸 수 있는 사람을 나는 몇 명 알고 있다. 하지만 해당 언론에서 내가 추천하는 사람에게 원고를 청탁하리란 보장은 없다. 어정쩡한 사람에게 청탁하여 병리현상으로 설명하는 글이 나올 수도 있다. 혹은 불쌍한 존재에게 동정을 베풀자는 글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런 글을 읽느니, 차라리 내가 쓰자는 심정도 있으리라.
2009년 인권위 사업을 반환했을 때, 나는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사람이 장으로 있는 단체의 기금은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지금은? 고민을 조금 달리한다. 그 돈이 어쨌거나 누군가를 통해 쓰일 거라면, 가장 혹은 조금이라도 더 잘 할 수 있는 곳이 실행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예를 들어 현 정부의 어떤 기관에서 트랜스젠더 이슈와 관련한 어떤 사업을 진행하겠다며 사업자를 공모한다고 치자. 어차피 사업기금은 누군가가 수주하여 사용하리라. 그렇다면 누가 그 사업을 하는 것이 좋을까? 나로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얘기를 하는 단체에서 해당 사업을 하거나 말거나, 나는 현 정부의 기금사업은 일절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좋은 걸까? 아님, 비록 현 정권은 너무 싫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과 함께 팀을 꾸려 해당 사업을 하는 것이 좋은 걸까? 내가 일을 잘 한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최선이나 차선이란 말도 아니다. 그럴리가. 그저 어떤 재원을 어떻게 분배하고 활용할 것인가와 관련한 고민이다. 그저 나의 블로그라, ‘나’를 앞세운 것뿐이다.
생존을 고민하고 있다. 확장을 고민하고 있다.

[영화] 행복을 찾아서: 그런데 무슨 “행복”?

[행복을 찾아서] 2007.03.10. 09:30, 아트레온 2관 3층 G-17

※곳곳에 스포일러가 있답니다. 🙂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The Pursuit of Happyness인데, 영화를 시작하며 뜨는 제목에 Happyness의 y의 글씨체가 다르다. 영화관에서 이 글씨체를 구별하며 재밌다고 느꼈다. 그런데… 영화를 읽다보면 나오지만 y가 아니라 i로 써야 맞는 표기법이다. Happyness가 아니라 Happiness. 루인의 영어 수준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잘못 쓴 줄 몰랐기 때문;;; 물론 영화 제목에서 i 대신 y를 사용하는 건, 의도적인 오기를 통해 행복의 의미를 재구성하려는 건 아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느낌은 그렇다. 문법에 맞는 행복Happiness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문법이 틀리더라도 때에 따라선 행복일 수 있는 그런 행복Happyness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Happyness는 크리스(윌 스미스 분)의 아들, 크리스토퍼가 머무는 놀이방의 벽에 그래피티로 적혀 있는 글자이다. 중국인(으로 추정하는 사람)이 운영하는 그 놀이방으로 크리스토퍼를 데려다 줄 때마다 크리스는 철자가 틀렸다고 불평한다.

이쯤 되면 틀린 철자를 통해 영화의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느꼈다. [행복을 찾아서]는 행복Happyness/Happiness을 추적pursuit하고 있지만 그 행복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는 영화이다. 무엇을 행복이라고 부를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그런 질문을 탐구하는 영화가 아니라 현재 혹은 이 영화의 배경인 1980년대 미국의 사회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을 고정된 것으로 가정하며 그것을 향하고 있다. 이러한 기획 속에 현재 사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다만 개인이 노력을 하느냐 노력을 하지 않느냐가 “행복”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조건이 된다. 그렇기에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순전히 개인의 문제다.

(이 영화 속의 배경이 반드시 1980년대의 미국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느꼈기에 “현재”라고 쓴다면) 현재 사회에서 빈부의 격차가 어떻게 조직되고 있는지,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심해지고 부의 세습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개인의 능력 문제로 설명하고 있는 사회적인 측면을 이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빈부의 구조를 그나마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잘 곳이 없어 쉼터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 앞으로 스포츠카를 타고 즐거워하는 백인들이 지나가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이러한 구조적인 측면이 아니라, 단지 쉼터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비참한가 혹은 주인공들은 지금 얼마나 힘든 상황에 있는가 이다.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나타나는 성조기는 행복이란 건, 미국 백인 중산층의 부에 따른 그것임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하고 크리스의 부단한 노력은, 결국 “노력하면 너희들도 할 수 있어”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또한, 이 영화에선,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인종주의가 개인의 능력 문제로 지워진다. 인턴들을 담당하는 사람은 유일한 흑인(으로 가정한다면)인 크리스에게만 각종 심부름을 시키며 부하 다루듯 하고, (인턴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남성이라고 간주하는 모습이고,) 앞서 적었듯 쉼터에서 하루 밤을 지내려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백인이 아니었다. 크리스는 놀이방을 운영하는 중국인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이 모든 지점들이 이 영화에선 개인의 노력과 능력의 문제이지 성별이분법과 인종주의가 작동해서는 아닌 것처럼 그려진다.

물론 이 영화는 현재 상황에서 크리스가 어떻게 협상하는가를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자본 혹은 돈은 행복Happyness/Happiness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바뀐다. 물론 살아가는데 있어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중요한 건 너무도 분명하고, 공부를 하기 위해서도 책을 읽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한 세상이란 점에서 돈이 행복이 조건일 수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돈 혹은 취업이 행복의 도달점일까?

대기업에 입사해서 고액 연봉을 받는 것이 최고의 추구점인 이 영화는, 한국의 오늘날과 상당히 겹친다. 무엇이 행복이냐고 묻기도 전에 행복해야 한다고만 말하는 사회에서, 크리스의 입사는 기쁘고 상당히 감동적이지만(영화 속 크리스의 상황에서 입사를 위한 노력은 어떤 의미에서 너무도 당연한 ‘선택’이었다) 영화가 끝나며 크리스의 이후의 상황을 설명하는 자막-엄청난 돈을 벌었고 회사를 설립했다는 내용은 입사를 축하하고픈 감흥을 깨버린다. 영화 마지막에 가서 결국 이렇게 행복의 추구는 돈이라는 노골적인 말은 이 영화의 의도를 의심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Happyness는 Happiness의 의도적인 오기를 통해 행복 그 자체를 질문하려 했던 건 아니라고 몸앓았다.

그나저나 린다(탠디 뉴튼 분)는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가 끝나며 나오는 자막 어디에도 린다와 관련한 내용은 없다. 린다의 입장에서 크리스는 유쾌할 수 없지만, 영화에서 린다의 존재는 크리스를 설명하는 사건으로 등장한다. 린다가 뉴욕으로 떠나는 장면을 읽으며 영화 말미에 다시 린다와 만나는 통속을 바랐지만 이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린다의 뉴욕행은 영화 밖으로의 퇴장을, 영화가 설명하는 크리스의 삶 밖으로의 퇴장을 의미한다. 크리스토퍼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린다의 감정은 모성애라는 어떤 성역할에 따른 본질로 여겨지지만(린다가 크리스토퍼를 키워야 하는 이유로, “엄마”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크리스토퍼를 챙기는 크리스의 감정은 책임감, 자기성실성 등으로 크리스를 포장한다(영화 초반에 크리스는 자신의 친부를 20대에 만났다며 자신의 아들에겐 결코 그런 아버지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말을 한다).

그래서 가볍게 영화를 읽으려던 의도는 그렇지 않은 몸으로 변해 있었다. 문득 떠오른 말, “저항은 권력을 징후한다.” 하지만 이 말의 측면에서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렇지 않음을 통해 권력을 징후하고 있다. 재밌는 역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