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여행처럼 떠난 2006여이연여름강좌는 어제로 끝났다. 그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기획단에 합류했다. 남은 일은 자료집을 내기 위한 준비들이지만 그래도 함께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있어서 기쁘다.
오늘은 지난 학기, 같이 수업들은 사람들이랑 기말논문 발표회를 가졌다. 턱이 아플 정도로 많은 얘기를 풀어낸 자리. 즐겁다.
피곤하다. 한참 덥지만 이런 피곤함 속에서 즐겁다.
방학 여행처럼 떠난 2006여이연여름강좌는 어제로 끝났다. 그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기획단에 합류했다. 남은 일은 자료집을 내기 위한 준비들이지만 그래도 함께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있어서 기쁘다.
오늘은 지난 학기, 같이 수업들은 사람들이랑 기말논문 발표회를 가졌다. 턱이 아플 정도로 많은 얘기를 풀어낸 자리. 즐겁다.
피곤하다. 한참 덥지만 이런 피곤함 속에서 즐겁다.
두근두근, 설레고 있어.
히히히.
하지만, 이러다 말겠지.
이러다 말기 싫지만.
제목: 소년은 울지 않는다 (Boys Don’t Cry)
감독: 킴벌리 페어스
년도: 1999
좀 더 많은 정보는 여기로.
#루인의 설명
1. 이 영화를 얼마 만에 다시 본 걸까. 3년 혹은 4년 전에 이 영화를 비디오로 읽은 흔적이 몸에 있지만 그땐 어떻게 읽었을까. 지인이 이 영화와 관련해서 얘기를 나눠보자고 해서 다시 읽었지만, 다시 읽고 싶은 욕망과 그러고 싶지 않음 사이의 갈팡질팡은 꽤나 오랜 감정이다.
2. 영화 중반부까지 계속 불안했다. 공포영화보다 더 무서울 정도로 불안으로 안절부절 못했다. 자신의 정체성이 언제 들킬지 모르는 상황에서-단순히 들키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죽음을 부를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내는 행동이 주는 불안.
그래서 후반부에, 차라리 이젠 편하다고 한 말이 와 닿았다. 사실 그때, 영화를 보고 있는 루인이지만, 루인 역시 차라리 지금이 ‘편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아웃팅과 공포에 따른 폭력을 경험한 이후, 차라리 편하다는 말, 너무도 절실하게 와 닿았다. 들키지 않기 위해 끝없이 숨겨야 했던 불안함,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한 긴장감.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을 때, 차라리 편하다.
3. 이 영화를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는 어려운 문제다. 트랜스일까 퀴어일까.
루인 식으로 환원하자면, 트랜스섹슈얼이나 레즈비언/다이크가 아닌 넓은 의미의 트랜스젠더라고 읽었다. 영화 초반에 스스로 다이크(레즈비언)가 아니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브랜든 티나/티나 브랜든을 레즈비언으로 환원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고 성전환 수술을 준비하곤 있었다 해도 스스로 트랜스라고 명명한 적이 없는 상황에서 브랜든을 트랜스라고 환원하는 것도 문제다. (채운조 선생님은 영화의 시작 장면-경찰차를 따돌리는 장면이, 어떤 특정 정체성으로 브랜든을 환원하려는 명명을 따돌리는 것으로 해석했다.) 트랜스젠더가 젠더/성별의 범주와 역할을 위반하는 사람들 모두를 아우르는 의미일 땐, 브랜든을 트랜스젠더로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탐탁치 않다. 잠깐 구금되었을 때, 라나와 얘기를 나누며, 자신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지만 그 모두라고 말했다. (케이트 본슈타인에겐 이것이 트랜스젠더 범주이긴 하다.)
그래서 이 영화의 분류를 퀴어(이반)로 했다. 트랜스만큼이나 퀴어 역시 광범위한 범주를 지닌다는 점에서, 트랜스로 가두진 않겠다는 점에서. 하지만 이 역시 탐탁치는 않다.
4. 성폭력 장면이 고통스러운 건, 몸과 정체성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자기 해석과 타인의 해석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갈등이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성애’-젠더를 전제하는 기존의 페미니즘에서 성폭력 해석은 피해경험자를 성적 대상의 몸뚱어리로 환원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브랜든의 경우는 이렇게 ‘단순’하게 말하기 힘들다. 브랜든에게 성폭력은 “남성” 젠더정체성을 짓밟는, 그리하여 끊임없이 부인하는 “여성”젠더정체성으로 환원하는 폭력이다(얼핏 비슷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너무도 다른 맥락이다). 브랜든의 정체성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점에서, 성폭력 경험을 “진술”하기는 더욱더 어렵다. 성폭력/강간의 피해자는 “여성” 뿐이라는 식의 언설이 지배적인 문화에서 성폭력피해를 경험했다는 말은, 끊임없이 자신을 “여성”이 아니라고 말하며 “남성”으로 통하길 바라고 “남성”으로 정체화하기도 하는 브랜든에게 자신의 존재 자체를 흔드는 고통이다.
5. 그렇다면 이 사건은 트랜스혐오 범죄일까 ‘레즈비언’혐오 범죄일까.
브랜든 티나/티나 브랜든의 사건 공판이 있던 날, 많은 트랜스들이 법정 앞에서 시위를 했다. 그리고 한 레즈비언은 브랜든을 레즈비언이라고 이름 붙임으로서 트랜스/젠더와 레즈비언 사이엔 경계분쟁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논쟁은 브랜든이 백인이라는 측면에서 가능하다. 유색인, 이주민 트랜스들이 유사한 범죄로 죽었을 때 이런 시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브랜든은 자신이 다이크가 아니라고 했고 “남성”도 “여성”도 아니란 식으로 협상했으며, 라나는 브랜든을 “남성”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톰과 존은 브랜든을 죽이러 가며, 레즈비언을 처단하러 간다고 했다. 당사자의 정체성과는 상관없이 톰과 존이 브랜든을 레즈비언으로 인식했기에 레즈비언 혐오일까.
톰과 존은 브랜든이 성전환 수술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며 역겨워서 못 봐주겠다고 했다. 적어도 브랜든이 트랜스일 가능성은 인지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화장실로 끌고 가 브랜든의 젠더 정체성을 “여성”으로 강제할 때, 그러고 나서 레즈비언이라고 부를 때, 톰과 존은 트랜스젠더 자체가 있을 수 없다고 간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역설적으로 ‘동성애’가 좀더 가시적이라 쉽게 인식할 수 있지만 트랜스/젠더는 낯설어서 뭐라고 이름 붙이기 힘들어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트랜스의 존재 자체, 그 가능성 자체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트랜스 혐오라고 부를 수도 있다(루인은 이런 행위를 혐오라고 부르는 편이다).
하지만 만약 브랜든과 사귄 사람이 라나가 아니라 같이 어울렸던 캔디스였다면 어땠을까. 라나가 아니었어도 톰과 존이 브랜든을 죽였을까. 아니라고 느낀다. 존이 라나와 브랜든의 관계에 간섭하는 것은 순전히 존이 라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며(존의 입장에서) 브랜든에게 폭력을 가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도 브랜든을 없애면 라나가 자신에게 돌아올 거란 착각 때문이다. 만약 레즈비언 혐오였다면 톰이 라나를 죽이려고 했을 때 존이 악착같이 막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브랜든을 둘러싼 이 논쟁-트랜스혐오범죄냐 레즈비언혐오범죄냐와 같은 논쟁, 정체성의 경계분쟁은 모호한 위치로 이동한다. 읽기에 따라선 치정에 따른 살인으로도 읽을 수 있다. 아니, 영화가 재현하는 식으로 읽는다면 존의 살인 의도는 치정으로 다가온다. 브랜든은 이 살인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레즈비언이 아니라고 했음에도 레즈비언으로 환원하는 존과 톰의 말에서 트랜스혐오로 느꼈을까? 알 수 없다. 브랜든은 죽었고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밝힌 적이 없다고 하니 모두가 사후에 나온 논쟁일 따름이다. 더구나 이 논쟁엔 인종과 계급이 겹친다는 점에서, 이런 논쟁이 불편한 지점도 있다.
6. 이 영화를 읽다가 몸 아팠던 지점 중 하나는, 감옥에 구금되었을 때, 라나가 찾아오자 자신을 트랜스로 설명하기 보다는 “양성구유”로 말하다가 “남성”도 “여성”도 아니지만 그 모두란 식으로 설명하는 지점이었다.
종종 떠올리는 몸앓이. 만약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 사람은 루인의 정체성을 모른다면, 더구나 퀴어나 트랜스를 향한 공포와 혐오가 있는 사람이라면 루인은 어떻게 반응할까. 처음부터 밝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순진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지 않고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인식하도록 두며, 그것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건, 퀴어와 트랜스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협상하는 방식이다.
사랑하는 감정과 자신의 정체성이 충돌할 때, 그것이 엄청난 갈등을 일으킬 때,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말할 여건이 아닐 때, 루인도 침묵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느낀다. 구금되었을 당시 브랜든의 그 말은 이런 맥락으로도 다가왔다. 브랜든 자신도 성전환수술에 어느 정도 두려움이 있고 수술은커녕 호르몬투여도 아직 결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성전환 수술 할 거야” 혹은 “나 트랜스섹슈얼이야”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브랜든이 정말 간성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라나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음이 협상으로서 그렇게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느꼈다. 정말 간성일 수도 있고 어느 쪽도 아니지만 그 모두라고 자신을 부르고 있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7.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면서 Thanks To에 익숙한 트랜스젠더들의 이름이 보인다. 트랜스남성과 부치들의 조언에 특히 고맙다는 말은 지금까지 쓴 맥락에서 좀더 재밌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