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세수하지 않고 만나는 얼굴

루인이 사랑하는 주말 휴식은 빈둥거림이다. 특히 최고의 빈둥거림은 늦잠자고 세수를 하지 않는 것. 핵심은 세수를 하지 않는 것이며 이 행위의 의미는 밖에 나가지 않겠다와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 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일 玄牝에서 지냈다고 해도 세수를 했다면 그건 온전한 휴식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토요일이나 일요일 하루 정도를 지내고 나면 자그마한 위로가 몸에 전해진다.

그렇기에 어제 강의(민우회 여성주의 학교-간다 “경계에서”)에서 레저마저도 노동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편안하게 쉬는 것과 편안한 관계는 세수를 하지 않고도 만날 수 있는 관계라는 말에 어떻게 ‘열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세수를 하지 않고도 만날 수 있는 관계.

맨송맨송한 얼굴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의 편안함, 더 이상 정치가 정치가 아닌 날은 언제가 될까.

거대 토끼의 “저주”

#마지막 즈음에 가면 스포일러 살짝 있어요.

예전에 봤던 [월래스와 그로밋]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몸에 각인되어 있는 기억을 되살리기가 쉽지 않다. 클레이메이션이라는 것 자체가 신기해서 좋아했을까. 마냥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조조로 영화를 보며 깔깔 웃기도 했지만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다. 드림웍스나 다른 헐리우드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패러디를 [월래스와 그로밋]에서도 봐야 한다는 사실과 전형처럼 여겨지는 헐리우드 ‘공식’이 엿보이면서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대의 한 부분이 무너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역시나 헐리우드완 손잡지 않는 것이 좋았을까.

그래도 재미는 있다. 예상치도 못한 [마다가스카의 펭귄]들은 귀엽고^^ 등장하는 토끼는 너무 깜찍해서, 으흐흐, 인형으로 나오면 꼮 가지고 싶을 정도.

뭐, 이 정도로 끝내기로 하자. 20세기 초반 재산권을 가진 ‘여성’들의 재산을 탐내며 질투와 음모를 벌였던 ‘남성’들의 행각이(뤼팽 시리즈에 이런 모습들이 잘 나온다) 여기서도 반복된다는 점, 젠더역할gender rule을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 주는 불편함 들과 마지막에 결혼을 한다거나 하지 않고 친구로 남는다는 점이 몸에 들었음을 덧붙이며.

자기 글이 주는 불안

특히 이곳에 글을 쓸 때마다, 글의 내용과 형식(이런 식의 구분이 가능하다면)이 모순을 일으키며 충돌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에 시달린다. 글을 통해 비판하는 바로 그러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 분명 그런 모순 속에 있을 것이다.

이런 불안들이 글쓰기를 힘들게 하지만 그렇다고 글쓰기를 중단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루인에게 1990년대는 소설 그리고/혹은 시를 쓰던 시절이었다. 재능은 없었지만 즐거웠고 미친 듯이 좋아했다. 하지만 서서히 힘들었고 지쳐갔고 어느 순간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그때가 99년. 결국 모든 걸 불태우고 끝내버렸다.

왜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꺾어진 골목이었음을 몰랐을까.

이후, 다시는, 이렇게 다시 시작할 수 없게 하는 자기 저주를 퍼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글을 쓰고 싶었지만 두 번 다시는 글을 쓰지 못했고 그렇게 잊혀진 기억이 되었다.

힘들어 질수록 더 많은 글을 생산하고 있다. 불안하고 글쓰기가 힘들어질수록 더 열심히 글을 쓰겠다는 다짐. 관계가 불안할수록 더 많은 대화를 통해 소통의 새로운 장으로 들어가듯 글쓰기의 불안이 심해질수록 더 많은 글을 씀으로서 새로운 길로 들어가는 것. 그것은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곳이 사실은 꺾어진 골목임을 깨달으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여하튼 간에 계속해서 이곳에 쓰는 글들이 불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