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지 않는 번호

오후에 숨책에 갔다. “숨”과의 만남은 즐겁다. 하지만..

지상(숨책은 지하와 지상으로 이루어져 있다)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데, 한 통의 문자가 왔다.

핸드폰에 저장한 번호 중엔 받지 않기 위해 저장한 번호가 하나 있다. 모르는 번호, 낯선 번호는 웬만하면 받지 않지만 간혹 그런 번호 중에도 받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보니 받기 싫은 번호를 저장한 것이다. 숨책에서 책과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중에 온 문자의 번호가 그 번호다. 내용은? 이번 주말에 결혼한다고 찾아오라는 내용.

그 번호의 사람을 알게 된 건, 어떤 일을 통해서이다. 하지만 그 일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기에 그 일과 관련해서 알게 된 사람과는 연락하지 않고 지낸다. 그간 번호가 한 번 바뀌었고 바뀐 번호를 알려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든 번호를 알아냈고 친한 척하며 연락 해왔다. 그것이 불편해서 번호를 저장했고 받지 않고 있다.

벌써 결혼한다는 말에 깜짝 놀랐지만 찾아갈 리 없다. 가장 가고 싶지 않는 곳 중의 한 곳이 결혼식장이거니와 그곳은 서울과는 꽤나 거리가 먼 곳이다. 아니다. 핑계다. 번호의 사람이 싫은 것이고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서 이다. 그 뿐이다.

부딪히지 않고 도망치기만 해선 소용없지만 때론 이렇게 도망치며 회피하고 싶은 일도 있다.

보일러 +

이틀 전 보일러가 고장 났다. 뜨거운 물은 나오지만 순환이 안 되는지 玄牝은 싸늘한 얼음장 같았다. 우후. 그런 玄牝에서 잠드니 수시로 잠에서 깨는 것은 물론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더라고. 이불 밖으로 나오는 것은 곧 싸늘한 바닥에 올라서는 것이며 이불을 젖히는 것은 곧 차디찬 공기와 만나는 것이니까.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보면 차디찬 공기 때문에 잠에서 깼음에도 이불 밖으로 나오기 싫어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그 장면이 몸에 확, 와 닿았다.

보일러가 고장난지 이틀째인 오늘 아침의 경우, 맨발로 방바닥을 딛고 서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고 할까.

어제 저녁 주인아저씨에게 말했고 학교 가는 길에 보일러 고치는 분이 오는 걸 봤다(주인집에서 玄牝 열쇠를 가지고 있다). 저녁에 돌아오니, 따뜻한 玄牝. 우훗. 정말 오랜만에 냉방에서 잠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실감했다.

[#M_ +.. | -.. | 목요일은 이랑 정기 세미나가 있은 날이고 내일은 루인이 발제를 하는 날인데 이랑 카페에 벌써 발제문을 올렸다. 뭔가 난감하고 당혹스럽고 허전한 느낌이라니. 왠지 밤 11시 즈음에 올려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마구마구 든다. 이랑 사상 가장 빨리 올린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까지 하고 있다;;;

의외로 발제문이 빨리 끝난 건, 당연히 아래아 한글로 작업하지 않고 공책에 볼펜으로 썼기 때문. 초고 없이 나스타샤와 발제문이나 소논문을 쓰면 서핑 하느라 시간을 질질 끄는 경향이 있다. 꼭 서핑 때문만은 아니고 볼펜으로 쓰는 글이 더 편하다. 이런 모습을 보면 역시나 아직은 아날로그가 좋은가 보다. 디지털의 편안함을 무시할 순 없다 해도._M#]

누구의 언어로 상상할 것인가

목요일에 있을 세미나 발제문을 쓰겠다고 여성학 사무실 책상에 앉았다. 노트를 펴고 세 쪽 정도를 쓰다가, 몸이 엉키면서 쓰고 있던 내용을 찢어버릴까 했다. 하지만 그 순간의 몸앓이 지점에서 새로 쓰려면 목요일까지 발제문을 쓴다는 건 불가능해 그냥 쓰기로 했다. (슬프다.)

이맘이랑 종종 나누곤 하는 얘기 중 하나는, 한국어로 상상하기다. 즉, 외국어(주로 영어)를 외래어로, 음역으로 사용하지 않고 한국어로 번역/해석해서 사용하고 그런 한국어로 상상하는 것. 비단 번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소위 학술적인 용어라고 말하면서 배배꼬아놓아 내용은 쉬운데 단어만으론 무슨 내용인지 모르게 만드는 지점,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나 신나고 너무 재밌는 공부들이 영어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점에 대한 문제제기/불편함/불만이다.

그렇다고 “순 우리말”이란 게 있다고 믿지 않는다. “순 우리말”이란 것 자체가 환상이고 이데올로기다. 그렇기에 “우리말을 사용하자”는 민족주의적 언설을 반복하려는 것도 아니다. 자국어와 외국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는 식민주의/탈식민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기 때문이다.

일테면 젠더(gender)라는 용어가 그렇다. 한국어론 젠더 뿐 아니라 sex/sexual/gender/sexuality 모두를 성性으로 번역/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거의 모든 페미니즘 책이 이 용어들을 어떻게 번역/해석할 것인가로 최소한 몇 마디는 언급 한다. 경우에 따라선 성을 이렇게 구분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고 불편함을 말하기도 한다. 루인 역시 그랬고/그렇고, 그래서 항상은 아니지만 음역을 사용하곤 했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로.

하지만 요즘 들어, 이렇게 구분하는 것 보다는 성이라는 하나의 언어로 쓰는 것이 어쩌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는, 몸의 경험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몸앓이를 하고 있다.

히즈라, 버다치, 트랜스젠더, 트라베스티와 같이 외국어로 익숙한 언어가 한국어, 양성구유와는 대응해서 사용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면 몸은 더 복잡해진다. 흔히 “제 3의 성”이란 말을 쓰며(루인은 이 용어가 불편하다) 트랜스젠더 등을 의미하지만 트랜스젠더와 양성구유는 그 의미와 내용이 너무 다르다. 그렇다면 한국어론 음역, 트랜스젠더로 사용할 것인가. 아님, 뭔가 께름칙해서 사용하길 꺼려하지만 성전환자란 용어를 계속 사용할 것인가. 성전환자와 트랜스젠더를 같은 의미/내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미묘하고도 께름칙한 지점이 큰데 계속해서 사용할 수는 없다.

불만은, 이런 고민들을 한국어를 사용하는 루인은 하지만 미국에 살며 영어를 사용하는 이는 하지 않는다는 것. 기존의 언어와 학문이 누구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말 하나 마나?). 전 지구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 언어의 사용은 위계와 권력을 나타낸다.

암튼 대충 이런 문제로 세 쪽 가까이 쓴 발제문을 찢어버릴까, 했다. 다만 이걸 핑계로 발제문을 안 쓸 수는 없어 그냥 계속 쓰겠다고 다짐했지만, 불편하다. 기껏 젠더를 해석하고 그 해석에 토대를 둔 언어를 구성하려는 찰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한다. 행복하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