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어딘가로 환원되는 공간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어딘가로 환원되는 공간
― “Your Body Is A Battleground.”인 공동경비구역
#일전에 쓴 [공동경비구역 JSA]를 수정한 글이예요.
이랑에도 올렸고요.

공동으로 경비하는 구역은 어디에 속하는 곳일까. 대한민국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혹은 그 모두에? 아님 그 어느 쪽에도?

며칠 전 [공동경비구역 JSA]를 봤다. 그전까진 관심도 없다가 우연히 본, 지뢰를 밟고 살려달라는 장면이 재밌어서 봐야지 했다.

“권력은 ‘무지’를 통과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무지’가 공포를 만들어낸다. 서로에 대해 모르도록 함으로써 서로를 향한 적개심을 형성한다. 6.25 이후 특히 박정희를 거치면서, 북한과 공산주의/사회주의는 “빨갱이”, “얼굴이 빨간 괴물”, ([똘이장군]에서의) “늑대”이지만 공산주의가 뭔지, 사회주의가 뭔지, 주체사상이 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는 것 자체가 보안법과 같은 법에 걸리는 위법/친북행위이기에 아예 모르면서 무조건 “빨갱이”라고 적대시했다. 이 영화는 이런 무지가 적개심을 만들어 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볼 만’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작년 가을 즈음, 이영훈씨의 과거사 청산 관련 발언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반응이 떠올랐다. “세상엔 빨갱이와 빨갱이들의 적”만 있을 뿐이라는 사유는 기생 관광, 기지촌 성매매와 전시 성폭력은 연장선상에 있다는 말을 “(그럼) 정신대 할머니들이 매춘 여성이란 말인가?”로 반응하는 것처럼 획일화된 이분법(monolithic)의 전형이며 결국 적/타자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존재 근거를 세울 수 있다는 점에서 주체라는 것이 취약한 존재이며 허상임을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소피(이영애)는 이를 폭로하는 존재이다.

중립국에서 파견한 존재(소피)를 여성젠더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한데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전선이 남성젠더들만의 것이며 작년, 이영훈씨를 둘러싼 반응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음을 암시한다. 군 위계상 계급으론 상관임에도 실제 소피의 역할은 두 ‘남성’을 보살피는 것인데 이는 ‘남성’연대homosocial bonding사회가 ‘여성’이란 존재를 “어머니”/’창녀’로 환원함을 의미한다.

성매매 담론이 뜨거운 지금, 성매매방지특별법에 찬성이냐 반대냐 혹은 성매매에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식의 질문을 쉽게 접한다. 하지만 이런 질문 방식들 모두 문제인데 성매매와 같은 문제를 이렇게 획일적인 이분법으로는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찬성 아니면 반대란 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 문제 자체가 없다고 본다). 성매매엔 반대하지만 기존의 성매매 방지 특별법이 문제이기에 특별법에 반대할 수 있다(“반대한다”는 “그것과 의견을 달리 한다”는 의미지만 “그것이 틀렸다”로 해석하는 것 역시 이분법적 사유이다). 혹은 젠더사회에서의 노동을 다시 사유하고 성매매를 둘러싼 기존의 담론이 누구의 시각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문제 삼기에 성매매방지특별법을 비판 할 수도 있고 성매매방지특별법이 “‘남성’의 행복추구권을 침해 한다”며 성매매방지특별법을 반대할 수도 있다. 전자와 후자는 전혀 다른 의미/전선이지만 획일화된 이분법 구조에선 둘 다 같은 반대로 환원된다. 페미니즘과 같이 기존의 전선과는 다른 전선을 형성하는 정치에 너희들은 어느 편이냐며 끊임없이 ‘진보’ 아니면 ‘보수’, 찬성 아니면 반대 어느 한 편을 선택하도록 요구하는 기존의 정치적 전선에서 다른 목소리는 존재하기 힘들며 존재한다고 해도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공동경비구역이 ‘분쟁’지역인 이유기도 하다)

정치적 중립은 탈정치적이란 의미가 아니다. 중립은 기존의 양분된 대립구조에서 어느 쪽도 아닌, 다른 정치적 전선을 형성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립을 탈정치적인 입장으로 보는 것은 “비권”이란 말처럼 무지/이분법의 소산이다. 하지만 중립을 탈정치적인 것으로 환원하고 기존의 ‘진보’/’보수’를 위협하지 않고 보살필 것을 요구하는 것이 현재의 한국이다. 이 영화에서 소피의 존재가 그렇다. ‘여성’적 섹슈얼리티, 여성젠더로 재현된 중립국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모두를 보살피고 상처를 달래는 역할을 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이 또 하나의 정치적 전선으로 등장하려는 순간, 소피는 본국으로 ‘추방’된다. 그렇기에 소피와도 같은 존재인 공동경비구역은 “적 아니면 나”에 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 대리 분쟁지역이며 여성젠더로 재현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관련한 많은 영화들이 간첩을 여성젠더로 재현함에도 불구하고(대표적으로 [쉬리]를 보라) 이 영화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남성젠더로 재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 이다. 무지를 넘어 섰을 때, ‘친구’가 될 수 있는 ‘적’은 ‘남성’이어야지 이성연애 대상으로 간주하는 ‘여성’일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분쟁이 발생한다면 대리 분쟁지역이면서 여성젠더로 재현되는 공동경비구역에서 발발함으로써 ‘남성’연대의 위협을 해소한다. (수혁(이병헌)과 경필(송강호)의 갈등은 소피를 통해서/매개해서만 드러난다.)

영화는 “세상엔 빨갱이와 빨갱이들의 적”만 있을 뿐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시도에서 출발하지만 기존의 ‘남성’정치전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를 수 있었던 영화가 진부하고 (관객에게) 폭력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가시 돋힌) 질문과 (당혹스러운) 반응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건, 불편함을 느끼거나 갈등/경합을 느끼기 때문이지 당신의 말 혹은 언어가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럴 리가. 누가 누구를 틀렸다고 판단하랴.

하지만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지는데 상대방은 그것이 틀렸다는 지적으로 반응하면 겉으로야 표현하지 않아도 내심 난감하다. 이는 서로의 소통 과정에서 발생한 체증인데 질문하는 사람의 말하기 방식에 문제가 있거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세계관이 질문자와 달라 발생하는 문제거나.

일테면 심심찮게 듣는 “정치적으로 올바른”이란 말을 루인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 편이다(특정한 누군가를 지칭한 말이 아니 예요. 혹시나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루인에겐 “정치적으로 올바른”이란 구절이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올바른”인데 이 “올바른”의 기준이 없다고 본다. 이는 누구의 기준에서 “올바른” 것이냐는 질문을 함의 한다. 일테면 ‘장애”여성’의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하지만 ‘장애”여성’도 단일한 집단이 아니며 ‘이성애’냐 비’이성애’냐, 계층은 어떻게 되느냐 에서부터 ‘장애’에도 범주가 엄청난데(이때 놓치지 않고 물어야 할 지점은, 무엇이 ‘장애’이며 그 기준은 누가 정하냐는 것이다. 안경 쓴 사람은 ‘장애’인이 아닌데 휠체어를 탄 사람은 ‘장애’인으로 분류하는 근거는 뭘까.) 단순히 ‘장애”여성’이라고 칭할 수는 없다. (물론 타자는 항상 집단화 되고 균질화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게 뭐예요?”라고 물을 땐, 그것이 언어가 아님을 말하고 싶음도 있지만 동시에 당신이 생각하는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 혹은 토대는 무엇인지 묻고 싶어서 이다. 그러니 “정치적으로 올바른 게 뭐예요?”라는 질문은 “정치적으로 올바른”이란 말에 대한 루인의 해석을 말하고 싶음과 함께, 그 말을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으로 올바른”에 대한 해석 혹은 “올바른”의 기준/토대에 대해 듣고 싶음이다. 그 사람이 가지는 기준 혹은 토대는 그 사람이 서 있는 위치나 어떤 맥락일 수 있고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서로의 언어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소중한 경험이 될 테니까.

(“정치적으로 올바른”이란 말이, 루인에겐 문제라고 제기하기에 앞서 그 말을 싫어하는 이유는 정치적으로 “올바르”려고 하면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언어는 이데올로기이고 특정한 누군가의 경험을 반영하기에 ‘모든’ 언어가 다른 누군가에겐 폭력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말하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말 할 수는 있을까? 이런 맥락에서 “올바른”이란 말은 정답/모범답안이 있음을 함의한다. 즉, 한 가지 정답만 있고 그 외의 다른 말은 틀렸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도로 질문을 던지지만 그때 마다 상대방이 실수라도 한 것처럼 반응하면(여기선 이랑 세미나 경험이 반영된다, 루인에게 같은 혹은 비슷한 내용의 말을 여러 번 할 수 있는 곳은 이랑 밖에 없으니까) 아무리 여러 번 이라도 익숙해지기 어렵다. 루인의 질문 방식이나 말투가 문제일 수 있고 루인의 의도가 전달되지 않았기에 발생한 소통 실패일 수도 있다. 마냥 질문자의 태도만이 잘못일 수는 없겠지만 질문자의 질문 방식이나 말투 등을 통해 상대방은 ‘가시’로 느낄 수 있다(의도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도 그렇게 생각지 않을 테고 루인 역시 그렇게 몸앓지 않지만 루인이 하는 말은 단순히 루인의 입장을 나타낼 뿐이다. (루인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가 그렇지는 않지만) 어떤 지점에서 발생한 갈등/경합의 과정물을 나타낼 뿐이다. 그렇기에 루인에겐 너무도 불편한 언어가 다른 사람에겐 그의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유용한 언어일 수 있다. 그럼 서로의 언어에 대해 개입하지 말자고?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대화하자는 말이다. 하나의 언어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닐 때,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낼 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는 않더라도 한 언어가 다른 사람에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고민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변화하는 몸/언어의 과정에 들어설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