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 퀴어, 페미니즘/페미니스트

결국 어제 나스타샤와 만난 [신돈]을 10회까지 봤고 오늘 아침 새로 만난 11회도 봤다-_-;; (“신도니언”이라는 말도 있더라고요..크크크) 그렇다고 [신돈]에 대한 리뷰를 쓸 건 아니고, [신돈]을 읽으며 루인이 읽고 싶은 몇 가지 코드가 있어서. 우훗.

원현이 신돈(편조)을 향한 마음과 안도치가 공민왕을 향한 마음은 ‘게이’ 관계로 읽힌다. 후후후. 물론 이런 식의 독해가 얼마간 젠더(‘이성애’)적인 발상에 기반하고 있지만, 특히 도치가 공민왕을 향해 바라보는 눈빛은 절절한 애정을 나타낸다([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와 샘처럼). 한채윤씨가 지적했듯 이반queer 관계가 낯설지 않은 한국의 동성사회(homosocial)에서 이런 코드를 찾기는 어렵지 않지만 [대장금](보지는 않았다) 이후 또 한 번 이반코드가 가득한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싶다.

루인이 이 드라마를 보는 이유 중 하나라고 했던, 노국대장공주는 애증이 교차하는 인물. 한 편으론 ‘재앙’이고 한 편으론 페미니스트라고 보고 있다(노국대장공주를 페미니스트라고 명명한다면 욕하려나? 흐흐)

[신돈]을 보며 혼란스러운 부분은 어떤 부분은 근대 이후에 나타난 연애 관계나 조선 중기 이후에나 나타나기 시작한 이데올로기들이 쉽게 등장한다는 점. 일테면 ‘연애’ 장면이나 이제현의 딸 혜비의 정조 관념은 얼마간 당혹스러운 것이 사실. 루인이 알고 있는 짧은 지식(!)으론 이런 정조 관념이 고려 후기엔 별로 심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그러니 아닐 수도 있다는;;; 암튼 하고 싶은 말은 노국대장공주의 캐릭터 특징은 (본 적은 없지만) [다모]의 채옥을 연상케 하는데, 노국대장공주는 현명하고 똑똑하며 내조도 잘하고 무술까지 잘하는 슈퍼 울트라 메가톤급이며, 이런 ‘여성’상은 현재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이상적(이데올로기적) ‘여성’상에 부합하는 모습이다. 현모양처는 기본이고 돈도 잘 벌고 똑똑하고 등등. 그렇기에 이런 노국대장공주의 재현(representation, projection)은 ‘재앙’으로 다가온다. “새로운” 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그래서 뭔가 ‘다른’) ‘여성’상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바로 그 ‘여성’상이다.

그럼에도 노국대장공주가 좋은 이유는 어제도 적었듯이 변태하는 삶 때문이다. 비단 변태하는 삶 때문만은 아니다. 흔히들 신사임당을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그리지만 사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가 ‘아니다.’ 죽으며 이원수(남편)에게 남긴 유언이 “재혼하면 귀신으로 나타날 것이다”였다. 당시의 그리고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이런 유언이 현모양처의 그것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현모양처란 이미지는 젠더사회/가부장제에서 필요한 모습으로 재현한 것일 뿐이다. 노국대장공주의 삶이 그렇다. 원나라의 수도에서 몽골 초원으로 돌아가자는 말이나 고려 땅을 달라고 하는 모습이나 실상 노국대장공주의 실제 욕망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인 듯 하다. 권력을 요구하는 모습. 하지만 당시의 유교 관념에서 왕이 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왕비가 되는 것이다. ([신돈]에 등장하는, 권력을 요구하는 ‘여성’들이 실제 권력을 성취하는 방법이 섭정이나 황후가 되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여성’들을 ‘악녀’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젠더화된 폭력/성폭력이다.) 즉, 나이팅게일이 전쟁에 참여하고 싶으나 그런 욕망이 좌절되자 간호장교가 되었듯이(“백의의 천사”란 말은 성별제도에서 만들어낸 재현/왜곡이다) 노국대장공주 역시 자신의 ‘권력지향’에의 욕망을 당시의 사회제도의 틀 내에서 실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공민왕을 선택했다. 이런 노국대장공주의 행동은 몸의 언어를 듣고 몸/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협상력이다. 바로 이런 모습(변태하는 삶과 협상력)이 루인으로 하여금 노국대장공주를 페미니스트로 읽고 싶게끔 한다. (물론 페미니스트/페미니즘을 어떻게 정의 하느냐에 따라 루인식의 독해가 얼토당토 안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나저나 무려 60회라던데, 과연 끝까지 다 볼까나. 훗, 그 여부는 MBC에 달려 있군-_-;; (그렇다면 처음으로 보는 드라마가 되려나? 지금껏 TV라곤 안 보고 살았으니까..)

#어쩌면 기황후를 위한 변명이란 글을 쓸지도 모르겠다.

글쓰기2 – 코끼리, 벼룩 그리고 부재하는 한계

언젠가 어디에서 읽은 글: 써커스단에서 어린 코끼리를 “사육”할 땐 튼튼한 쇠사슬로 묶어 둔다고 한다. 하지만 힘이 엄청나다고 하는 어른 코끼리에겐 오히려 쉽게 끊을 수 있는 가죽끈으로 묶어 둔다고 한다. 쇠사슬에 묶인 어린 코끼리는 도망치려해도 도망칠 수 없고 결국엔 자신을 묶고 있는 줄(쇠사슬)을 끊을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도 포기한다고 한다. 이런 포기가 결국 쉽게 끊을 수 있는 가죽끈으로 묶어 두어도 끊고 도망치지 않게(못하게) 한다.

벼룩에 관한 유명한 얘기: 흔히 벼룩은 몇 미터씩(과장인가;;) 뛸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벼룩을 30Cm 높이의 실린더에 가두고 뚜껑을 닫으면 벼룩은 첨엔 계속 뚜껑에 부딪히며 더 높이 뛰려고 하지만 결국엔 30Cm 만큼만 뛴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게 ‘훈련’한 벼룩을 60Cm 실린더에 옮겨도 벼룩은 여전히 30Cm 만큼만 뛸 뿐 그 이상 뛰지 않는다고 한다.

소논문(레포트가 요약보고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앞으로는 논문이라고 쓸까 한다, 이제껏 요약보고서를 써 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을 쓸 때 마다 항상 루인의 한계점을 만나길 기대하는 편이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현재의 루인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기에 소논문 숙제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런 소논문 쓰기의 가장 큰 즐거움은 단지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만나서가 아니라 이런 한계를 만남과 동시에 지금까지의 한계가 더 이상 한계가 아니게 되며 새로운 한계점을 설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이렇게 자신의 새로운 한계점과 만나는 과정이기에 글을 쓴 이후,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불가능하다.

코끼리의 가죽끈 얘기나 벼룩 이야기를 쓴 건, 바로 이 한계라는 지점 때문이다. 한국의 제도화되고 정형화된 교육 틀과 루인을 ‘인정’하지 않는 이성애혈연가족제도에서 자랐기에 루인의 많은 부분들이 깎여 나갔거나 불가능한 기대로 여기게끔 배웠다. 하지만 이런 불가능성은 어떤 의미에선 두려움일 지도 모른다는 몸앓이를 종종 한다. 더 잘 할 수 있음에도, 다른 세상으로 횡단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서성이고 망설이는 이유는 “넌 할 수 없어” 혹은 “너 따위가 어떻게 그런 걸 해” 라는 식의 말들을 통해 생겨난 보이지 않은 벽이 주는 두려움은 아닐까 하는 몸앓이.

루인에게 한계점이 없음을 깨닫게 해 준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물론 여기서의 글쓰기는 소설이나 시가 아니라 소논문에 한정되겠지만(소설이나 시는 루인의 한계, 높은 벽을 선명하게 만난 계기이다). 그렇기에 루인에게 글을 쓴다는 행위는 루인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두려움의 벽들을 넘어서려는 행위이다.

비단 루인 뿐이랴. 글 쓰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이다.

글쓰기1 – 노국대장공주와 변태

오전부터 [신돈]을 봤다. 한 편만 보고 다른 일 해야지 했는데 6편까지 보고서야 중단했다. 이런, 이런. 그나마 숨책가야지 하는 계획이라도 있었으니 가능했지 아니면 10편까지 몰아서 다 봤을 듯;;;

이곳, [Run To 루인]의 포스팅 ‘원칙’이라면 최소한 하루에 한 편의 글을 쓰는 것이다. 가능한 한 하루라도 거르지 않고 매일 한 편씩의 글을 쓰는 것. 글쓰기를 좋아하는 편인데(고통의 쾌락?) 왜 글을 쓰느냐고 묻는다면 지금 루인의 위치를 읽으며 현재의 루인을 알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글쓰기를 통해 글쓰기 이전의 루인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이다.

글을 쓰든 책을 읽든 주로 낮에 하길 선호하지만 블로그에 쓰는 글만큼은 저녁 혹은 밤에 하는 이유는 (나스타샤와 노는 시간이 주로 저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날 하루의 루인을 읽기 위해서이다. 어딘가에 제출하는 글이나 이랑에 올리기 위한 글과는 달리(이런 글들은 쓰는데 일주일가량 걸린다) 그날 몸앓았던 어떤 지점들을 정리하고 그 몸앓이들을 설명하고 그 몸앓이 이전의 루인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렇기에 이곳에 쓰는 글은 그 만큼 정리되지 않은 날(raw)것이며 글을 공개한 순간 글 내용과는 다른(그 글의 내용을 비판하는) 루인이 되기도 한다.

[신돈]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노국대장공주이다(사실, 기황후도 꽤나 매력적이다-_-;;). 징기스칸의 말을 들먹이며 사막으로 유목민으로 돌아가자는 노국대장공주의 말/몸은 아마 루인이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게 할 요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유목민으로서의 삶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노국대장공주를 보고 있으면 요즘 유행처럼 말하는 “유목적 주체”나 “유목적 사유” 혹은 루인이 좋아하는 “변태하는 삶”이 떠오른다. 강박적일 정도로 변화에 집착하는 편인 루인이기에 한 자리에 정착한 후 고정된 삶, 변화하지 않는 삶을 영위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변태에 대한 ‘오해’는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성(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발악)의 반영일 가능성이 크듯 유목민으로 돌아가자는 노국대장공주의 몸은 변태하자는 말로 들린다. 물론 사람마다 노국대장공주의 이런 몸―징기스칸의 말을 상기하며 몽고인의 ‘전통’을 되찾자는―을 다르게 해석할 것이고 과거로의 회귀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루인은 노국대장공주의 이런 몸이 과거로의 회귀라기보다는 현재의 정체하고 있는 삶, 고여서 썩고 곪아가고 있는 삶에서 벗어나 유목하는 삶, 매 순간 새로운 상황에서 변화하는 삶을 살자는 것으로 읽는다.

유목한다는 것은 돌아갈 곳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몇 곳의 자리를 정해놓고 움직인다고 해도 그 자리는 매 순간 변하는 공간이기에 그곳에서의 삶 역시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변화할 수밖에 없다. (사실 정착하고 사는 삶, 변화 없는 삶은 없다고 보며 그런 삶이 있다는 믿음을 일종의 환상으로 여긴다.) 앞으로의 노국대장공주가 어떤 식으로 묘사될지는 알 수 없지만 노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와서 “만세, 만세 만만세”를 외칠 수 있는 고려를 만들려는 노력은 원나라 혹은 몽고에 대한 배신이라거나 부부라는 성역할gender rule에 따라 “지아비”를 따른 것이 아니라 유목하는 삶, 변태하는 삶을 사는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M_ 또한.. | 하하하.. | “돌아갈 곳이 없다”고 말하는 신돈이란 인물 역시 매 순간 변화하며 개혁적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은 잃을 것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비슷한 맥락에서 신돈의 웃음소리는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모짜르트의 웃음처럼 간단하게 기존의 권력/권위를 조롱하는 웃음으로 들린다._M#]

이런 맥락에서 글쓰기는 유목하는 행위라고 본다. 몸이 글이라는 형태로 나타나( 자리를 잡)는 순간,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