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어제 이랑 친구가 갑자기, 누군가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면 무얼 말하겠느냐고 묻자, 잠시 당황하다(갑자기 물어서…) 곧 바로 한 대답이, “소원 백 가지 들어주세요”였다.

흔히 동화라고 불리거나 옛날이야기로 불리는 이야기들을 보면,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거나 한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면, 꼭 그것에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한 가지 소원의 경우는 대개 그 상황에서 그것 말고는 달리 선택할 것이 없는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고(일테면 죽은 누군가를 살려달라는 식으로) 세 가지일 때도 그렇게 개개의 것으로 이루기 마련이다. 루인이 이상하게 여겼던 건, 왜 “소원 백 가지 들어주세요”라고 소원을 말 하지 않느냐는 것. 그러고 나서 99가지 말하고 한 가지 남으면, 다시 백 가지…-_-;;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1조가 들어 있는 통장은 어떨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화폐로 평가되고 모든 가치가 화폐로 획일화되고 있으니까. 그래서 1조의 잔고가 있는 통장을 가진다면 지금 루인이 회원으로 매달 조금씩의 회비를 내고 있는 운동단체/NGO들에 더 많은 회비를 낼 수 있을 테고 회원이 되고 싶음에도 최소한의 생활비에 걸려 가입하지 못하고 있는 곳에도 회원이 될 수 있을 테고, 루인이 바라는 단체를 만들 수도 있을 테고. …이렇게 소원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은, 유일하지만 가벼움이라는 속성을 지닌 소원을 통해 다른 것을 이루긴 싫다는 루인식의 윤리 때문이다. 대화와 소통 그리고 고통이 따르겠지만 엮어갈 관계에의 노력처럼 과정을 통해 많은 앎이 따를 일들을 소원을 통해 이루긴 싫기 때문에(이런 몸으로 살기에 “폭력(혹은 빈곤) 없는 세상을 만들어 주세요”라던가 “모두가 맥락으로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세요”라는 식의 ‘소원’을 망설이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천박”하지만 필요한 현금을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용들 모두 상상에 불과하고 정말 누군가가 루인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뭐든지 말하라고 한다면, 다음에 말하겠다며 미룰게 분명하다. 다음에 필요하면 말 할께, 라고 미루면서, 아마 평생 그렇게 미루면서 언제든 이룰 수 있는 소원이 한 가지 있다는 그 가능성만 가진 체 살아가겠지. 결국 사용하지도 않고 죽을 한 가지 소원. 이건 어떤 의미에선 ‘희망’을 안고 살겠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고통을 유예하며 그 유예의 쾌락을 느끼듯 그런 의미에서 미루고 싶은 것이다. 이룰 수 있을 쾌락을 연장하고 미루어서 쾌락의 정점엔 도달하지 않지만 그 정점에 도달할 듯 말 듯 하는 바로 그 상태로 살고 싶으니까. 뭐든지 한 가지를 손쉽게 이룰 수 있다는 쾌락, 그 유일할 수밖에 없는 쾌락을 당장 누리고 싶지 않고 그런 쾌락을 통해 삶의 또 하나의 쾌락을 누리고 싶기에 죽기 전까지 아니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소원을 이루지 않겠지.

(루인이란 그런 인간이다. 다치면 아픈 곳을 괜히 콕콕 찔러보는 인간이 루인이고 그렇게 찌르다 더 심하게 아플까봐 걱정해서 찌를 듯 찌르지 않은 상태를 즐기는 것도 루인다.)

어쩌면 한 가지 이룰 수 있는 소원이 있음에도 미루려는 것은, 이루는 순간이 (한 과정이 끝나는) 결말이라면 바로 그 “결말”이라는 것, 즉 변화의 과정이 끝나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은 매 순간 변화하는데 이런 식의 소원 담론은 매 순간 변화하는 삶을 고정시키고 싶은 욕망의 투사로 여겨진다. 변화하지 않고 결론이 나는 삶이라면 끔찍하게 지루하기에 소원 같은 것 이루지 않고 평생 유예 시키며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살고 싶으니까.

몸/언어

지식이 삶과 만나 앎이 되는 순간, 지금까지 썼던 언어는 바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언어가 바뀌는 찰라 삶과 앎이 만나고/분리될 수 없음을 몸으로 앓게 되고 다시는 이전에 언어로 돌아갈 수 없다. 왜냐면 이전의 언어는 지금의 몸과 충돌하며 불편하기 때문이다. (글 분류의 “삶~앎”은 그런 의미에서 나온다. 자기 다짐의 의미랄까.)

그래서 루인이 스스로 내뱉고도 가장 무서워하는 말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비단 자신이 하는 말이 타인에게 어떤 폭력이 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지식자랑을 하고 있는지 정말 몸으로 앓은 언어를 말하고 있는지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제 민우회 강좌를 들으며, 근래 들어 들은 강좌 중, 몸을 가장 복잡하게 만든 강좌였다고 중얼거렸다. 정말 너무도 불쾌하고 불편한 강좌면서 어떻게 그렇게 괜찮은 강좌일 수 있을까 싶었다(좀 심하게 과장하면 최악이면서 최상이었다고 할까). 초반의 강의 부분에선 수강생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을 말했고, 질의응답시간(아무리 봐도 그 시간을 ‘토론’시간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엔 질문자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답변을 하기도 했다. 나서기를 싫어하는 루인이면서 동시에 튀고 싶어 하는 루인이기에 그다지 질문을 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어젠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건 질문이 아니라 문제제기였고 그래서 어제의 그 공간 자체가 루인이 바랐던 것과는 틀이 맞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암튼 루인은 몇 가지 문제제기를 했는데 강사는 루인의 맥락을 읽지 못했다. 그럼 다시 말하라고? 아쉽게도 그럴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강사는 자신이 권위와 차별이 없는 공간에서 생활하며 그런 생활을 만들려고 한다지만 어제 그 자리에서 루인이 겪었던 건, 강사와 수강생이라는 위계질서의 엄격함, 나이에 따른 권위주의 등이었다.

지난 봄, 지금과 같은 민우회 여성주의 학교-간다 봄 학기 수업을 들으며 깨달았던 것은, 정말 몸의 세계관이 다르면 타인의 말을 알아듣기가 어렵구나, 였다. 강사 중 한 명인, ‘남성’ 평화학자의 질문(두 명의 강사가 함께 진행했다)은 어느 부분까지는 알아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멍한 상태로 말을 흘렸다. 이전까지, 학교 수업 시간에 토론을 하며 루인이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답변을 하는 것을 경험하며 답답했는데 왜 그런지 이해되는 순간이랄까. 그렇다고 다른 세계관과는 대화/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른 몸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더 격렬하게 대화의 장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다(대화/소통의 첫 번째 전제는 이 과정을 통해 달라진 자신을 만나겠다는 열망이다). 어제의 자리가 토론의 장이 아니라 질의응답시간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사는 루인의 언어를 자신의 세계관으로 환원해서 ‘엉뚱한’ 말을 해버렸고 그래서 당황했고 심지어 강사가 말하는 “유목적 사유”란 말 자체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유목적 사유”라는 말을 하기는 쉽다.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고 믿기도 쉽다. 하지만 루인이 읽는 “유목적 사유”는 끊임없는 자기 회의와 반성, 그리고 새로운 언어의 사용이다. 루인의 믿음 중 하나는 지식이 삶과 만나 앎이 되는 순간, 언어가 바뀐다는 것이다. 더 이상 기존의 언어는 불편하고 변화한 몸을 설명할 수 없기에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양성평등”이란 단어가 문제적이라고 지적하고 ‘동성애’자가 인구의 10~15% 정도를 차지한다고 말하면서도 모든 설명을 ‘여성’/’남성’으로만 말하거나, 근대화 기획의 ‘공사’구분이나 ‘거대’담론/’일상’의 정치 등으로 구분하는 말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탈근대를 말하면서도 사회적인 것을 위해서 개인적이고 작은 것은 좀 참고 지낼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의심한다. 몸으로 트랜스섹슈얼리티/트랜스젠더를 앓고 났다면, 더 이상 언어에서 ‘여성’이나 ‘남성’이란 말을 쉽게 쓸 수가 없으며 탈근대나 유목적 사유와 ‘공사’를 구분하는 식의 언어를 함께 사용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고백하자면, 어제 그 강사의 강의 내용은 지식자랑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M_ 보태기.. | 접기.. | 트랜스섹슈얼리티/트랜스젠더를 단지 성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몸은 그것과 다르다는 말을 들으며 얼마간 충격을 받았는데, 그럼 도대체 강사가 정의하는 몸이란 무엇일까 궁금했다. 또한 몸과 성적인 것의 구분이 가능할까? 강사가 생각하는 트랜스섹슈얼리티/트랜스젠더는 무엇일까. 학벌에 연봉까지 성/적인(sexual/ity) 것으로 여겨지는 한국사회에서 강사가 생각하는 ‘성적인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_M#]

그럼에도 그 강의가 좋았다면 공동체 생활에서의 윤리, 문학과 관련한 나중의 부분 때문이다. 자연과 대화하는 글쓰기란 말은 공간과 소통하는 몸이란 루인의 앓이에 꽤나 자극적이었다(강사가 말한 자연은 타자화된 자연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지점이 있었는데 이는 좀더 조심스럽게 접근할 부분). 또한 밥상공동체를 통한 소통 방식은 이랑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를 몸앓을 수 있게 했다. 이와 관련해선 나중에 더 쓸 수 있겠지.

뫼비우스시간

시간이 뫼비우스 띠와 같다면, 빙빙 돌면서도 여기가 어딘지 궁금하겠지.

한 걸음 내디디면 옆 자리는 낯설게 움직이고 새로운 시간이 몸을 휘감겠지. 한 걸음 옆으로 옮겼을 뿐인데, 여기는 안쪽, 저기는 바깥쪽.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말 같지만 그렇게 느껴지는 시간의 길을 걸어가고 있어.

한동안 너의 이름이 옆 자리에 놓여 있다고 믿고 살았어. 그 옆자리는 어디일까 묻지도 않고 그냥 옆 자리에서 함께 한숨쉬고 있다고 믿었지. 그러나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너는 어디에도 없고 고개를 돌리고도 한참을 헤매서야 비로소 너는 내가 있는 곳과는 너무도 다른, 반대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하지만 그 반대편이란 건, 어디가 출발점이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단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해.

꼬인 시간을 따라 한 바퀴 돌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어디서 시작하는 걸까. 어디서 새로 시작하고 싶은 걸까, 혼자 중얼거리다가, 두 달 차이가 나는 너와 나의 생일, 그 두 달 차이가 엄청난 경험의 차이를 만든다고 말한 너의 말이 떠올랐어. 12월생과 2월생의 경험, 4월생과 6월생의 경험은 어떻게 얼마나 다른 걸까.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너의 말을 중얼거리다가 다시 꼬여버린 시간을 타고 이 자리에 섰는데 이 자리가 아까와 같은 자리인지 다른 자리인지는 모르겠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냥 너의 이름을 옆에 두는 것만으로도 이별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휘어진 기억의 선로를 따라가다 보면 매번, 같은 곳에서도 다른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걸까. 가을이어서 울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너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M_ 참고.. | 정말?.. | 미분기하에서의 뫼비우스 띠 해석을 토대로 한 상상력이에요, 한 점에서의 방향성이 띠를 따라 돌다보면 반대 방향으로 바뀐다는.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