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빨 통증

일년에 한 두 번 왼쪽 혹은 오른쪽 어금니에서 진통이 생기곤 한다. 꽤나 오래 전 오른쪽 부위부터, 가장 안쪽 어금니에서 통증을 느꼈고 죽염을 머금으며 진통하곤 했다. 그러다가 이빨이 조금씩 부서졌고 몇 달마다 조금씩 부서지다가 결국 오른쪽 어금니가 뿌리만 빼고 다 떨어졌다. 지금은 뿌리만 남은 상태고 혀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다 부서질 즈음 왼쪽 어금니가 동일한 증상을 보였다. 통증, 죽염으로 진통, 부서짐, 부서짐, 그러다가 뿌리만 남은 상태다. 그리고 뿌리만 남은 상태에서 한 번씩 통증이 온다. 딱히 치과를 무서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치과가 무섭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어쩐지 무서워야 하는 곳이란 인상과 함께 치료비가 비싸서 그냥 방치하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되려나. 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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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은 내일… 죄송합니다 ㅠㅠㅠ

2015 제15회 퀴어영화제 텀블벅 개설!

퀴어영화제에서 올해 영화제를 개최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위해 기금을 마련하는 텀블벅을 열었습니다.
작년에는 마이너스 25,000원으로 영화제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말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무사히 영화제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올해도 한 번 상영했던, 케이트 본스타인 다큐멘터리를 상영했지요. 정말 멋진 영화, 퀴어라면 한 번은 봐야 하는, 사실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싶은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올해는 작년과 달리 16,859원으로 시작한다고 합니다. 작년과 올해의 차이가 별로 없다는 느낌은 저만의 것이 아니겠지요. 영화를 운영하기 위해선 1000배의 비용이 필요한데 현재 상황은 그것과는 전혀 다르지요. 정말 개최는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들 정도고요. 그런데도 영화제조직위원회 사람들은 모두 무임으로, 그리고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한 편으로는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슬프지요. 15년의 역사가 흐르는데도 여전히 재정 상황은 열악하고 인건비는 전혀 없는 상황. 그런데도 어떻게든 영화제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 사실 제가 감히 뭐라고 말을 붙이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희생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활동은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설명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이 글에서 가볍게 말을 할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아무려나 텀블벅을 열었다고 합니다. 많은 분의 참여가 있으면 좋겠어요. 십시일반으로, 많은 분이 모이기를.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 있습니다. 꼭 보시기를!

트랜스젠더인권연대 지렁이를 발족할 때가 문득 떠올랐다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 그리고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 2006년 11월 4일 정식으로 발족해서 2010년 활동을 중단하고 2012년 단체를 해소.
2005년 하반기에 초동 모임이 시작되었다는 언설도 있었고, 2006년 초에 초동 모임이 시작되었다는 언설도 있다. 어쨌거나 2006년부터는 본격 활동을 시작했고, 나는 초동 모임이 한창 진행 중일 때, 합류했다. 우리는 정말 미친척 단체를 만들었고 이런 저런 활동을 했고, 우왕좌왕 힘들어 했고, 그럼에도 열심히 활동했다. 하지만 다들 힘들었고 지쳤고 결국은 단체를 중단시키기로 했다. 명의만은 유지하다가 결국 해소했다.
퀴어락에서 지렁이 활동과 관련한 문서를 정리하고 있다. 그러다가 2006년 11월 04일 지렁이를 발족할 당시 사용한 명찰을 사진으로 확인했다(이미 퀴어락에 등록되어 있는 사진이다). 그곳(http://queerarchive.org/bbs/51117)엔 “운영위원(학술정책)”이라고 적혀 있었다. 기분이 참 묘하다. 2006년 11월이면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공부를 한지 두 번째 학기다. 내가 여성학을 처음 공부했을 때가 2004년이었다. 트랜스젠더 이론을 생전 처음 읽었을 때가 2005년이다. 그러니까 길어야 2년, 기껏해야 1년 정도 트랜스젠더 이론을 공부하고선 단체에서 “학술정책” 분과를 담당하겠노라며 그 명의를 받아들였다. 물론 나는 그때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학술, 혹은 연구나 공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무슨 깡으로 그랬을까? 무식해서 정말 용감했구나,라는 말 외에 달리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싶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모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지금에 와서 나는 그때의 기록을 흑역사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한없이 부족했지만 어쨌거나 그때 내가 담당하기로 했던 역할인 학술정책 분과에서 정책은 모르겠지만 학술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으니까. 지렁이라는 단체를 세우며 내가 무슨 사명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는 지금도 계속 공부를 하고 있다. 학술이라는 분과에서 내가 잘 하고 있지는 않지만, 많이 부끄럽고 여전히 한없이 부족하지만 어쨌거나 그 역할은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은 그 명찰이 나의 흑역사는 아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10년 뒤 다시 그 명찰을 본다면, 나는 어떤 기분일까? 더 부끄러울까?
그냥 그 명찰을 보며 조금 감상적으로 변했다. 여러 이유로 슬픈 것인지도 모른다. 단체는 해소했고, 지렁이 활동을 하다가 공부/연구라는 측면에서 평생의 빚을 지기도 했다. 그때 같이 활동했던 이들은 지금도 활동가로 연구자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몇은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만들기 프로젝트에서 적극 활동했고, 그 중 한 명은 지금도 적극 활동을 하고 있다. 누군가와는 더이상 연락이 안 되고, 누군가와는 영원히 연락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노력해도 영원히 연락할 수 없음. 이것이 감상적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한무지를 빼곤 지렁이를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혹은 지렁이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그 인간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게 지렁이는 어쩐지 슬픔으로 남아 있다. 미안함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의 행동으로 인한 부끄러움만은 아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