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삶이 퀴어락을 구축한다.

퀴어락에서 상근을 하며 분명하게 확인하는 사실 중 하나는 퀴어락은 상근자와 운영위원에 의해 조직되고 구성되는 ‘단체’가 아니란 점이다. 어떤 단체는 활동가의 조직력과 기획력으로 운영되고 단체의 역사가 축적될 수 있다. 그리고 조직력과 기획력은 단체의 지속에 있어 매우 중요한 측면이다. 그런데 퀴어락, 그러니까 퀴어아카이브는 상근자나 운영위원이 어떤 주제의 전시회를 개최하고 한해 중점 사업을 어떻게 설정하는가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퀴어락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LGBT/퀴어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삶, 활동, 그리고 LGBT/퀴어 이슈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의 삶, 활동으로 구축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절대적이다. 퀴어아카이브는 퀴어 ‘대중’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퀴어아카이브는 퀴어 ‘존재’가 살아온 흔적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오직 퀴어 범주에 속하는 개개인의 다양한 활동이 퀴어아카이브를 가능하게 한다.
자료를 수집할 때뿐만 아니라 자료를 기증받을 때 이 사실을 더 분명하게 확인한다. 기증받은 자료를 검토하고 있으면, 기증이 아니고선 도저히 수집할 수 없는 자료, 기증이 아니라면 존재했는지도 몰랐을 법한 자료와 만난다. 그리고 이들 자료는 모두 스스로를 LGBT/퀴어의 어느 범주로 설명하건 LGBT/퀴어 이슈에 관심이 있어서건 그들 개개인이 살아가고 활동하며 기록한 흔적이다. 퀴어락에 모이는 자료는 퀴어락이 기획하는 자료가 아니라 퀴어락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개개인의 흔적이 집적된 것이다. 정말로 개인의 역사, 개인의 활동, 단체의 활동이 축적된다. 그리고 이런 역사와 활동이 없다면 퀴어 아카이브는 존재할 수 없다.
사실 퀴어 아카이브는 LGBT/퀴어 개개인에게 가장 거리가 먼 공간이긴 하다. 사실 대다수에게 퀴어 아카이브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무방한 곳이다. 예를 들어 퀴어문화축제의 축제 관련 활동은 무척 중요한 관심사지만 퀴어아카이브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퀴어락의 필요성을 인지하건 하지 않건, 퀴어 아카이브에 관심이 있건 없건 그들 개개인의 삶이 퀴어락을 구축한다. 그리고 퀴어락이 더 성장하고 잘 된다면 LGBT/퀴어 개개인의 역사와 삶은 더욱 풍부해지고 다각도로 이해할 수 있는 삶이 된다. 물론 이것은 개개인의 피부에 와닿지 않는 지점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퀴어락이 없어도 퀴어의 삶은 지속되지만, 퀴어의 삶이 없다면 퀴어락은 없다는 점,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겸사겸사 퀴어락의 지속에도 관심이 있다면… 여기로! http://goo.gl/lJMZjc

애도하는 방법

애도를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그 방법 중 하나로 제사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음식 준비를 누가 하고 제사 의례에서 권력을 누가 행사하느냐에 있지 제사라는 방식 자체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나는 기생충). 음식 좀 간소하게 하면서(떡 대신 피자를 올린다거나) 동시에 음식을 주변 친구와 함께 나눠먹을 수 있다면 이것도 애도하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일년에 몇 번 명절 차례나 제사에 참가해야 하는 나는, 한때 이것이 무조건 폭력적이라 폐지해야 하는 악습이라고 믿었다. 기본적으로 여성에게, 그리고 비규범적 삶을 사는 이들에게 명절 차례와 제사는 폭력적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고민이 조금 바뀐 것은 ‘이 시기가 아니면 언제 모이겠느냐’고 ‘어른’들이 자주 말하는 그런 이유가 아니라 ‘이 형식이 아니면 언제 애도하고 기억하겠느냐’에 있다. 그러니까 어떤 하루를 기념일로 혹은 애도할 날로 약속하지 않는다면 애도의 대상은 그냥 스쳐지나가기 쉽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으며 오래오래 기억할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 생각보다는 금방 잊힌다. 평생 기억할 것 같은 일도 몇 년, 십년 정도 흐르면 조금씩 그리고 계속 희미해진다. 물론 잊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년에 하루 정도 의도적으로 시간을 내서 애도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살아 있는 삶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리고 애도하기 위해서, 정치적 삶/죽음을 마냥 정치적 의제로만 가져가지 않기 위해서 제사라는 형식도 나쁘지 않다. 애도의 형식을 제사로만, 차례로만 규정한다면 이때부턴 심각한 문제지만. 애도 형식의 독점권을 갖지 않는다면, 애도의 내용을 규정할 독점권을 갖지 않는다면 제사도 나쁘지 않지.

그러니까 슬퍼할 시간, 애도의 형식, 애도의 내용을 타인이 규정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는 말은 윤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권력의 문제다.

‘이렇게 태어났다’는 말: 생득과 선택

“우리는 타고났다”는 언설, 즉 LGBT/퀴어는 선천적으로 타고났다는 언설은 정말 많은 LGBT/퀴어가 사용하는 수사다. 그리고 이를 통해 존재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ㄱㅇㅍ(ㄱㅇㅍ이 혹시나 자기 이름으로 웹검색을 할까봐…)은 “동성애가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면, 동성애는 치유가 불가능하다. … 동성애가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면 동성애를 도덕적인 문제가 없는 정상으로 인정해야 한다.”(11)로 쓰면서 동성애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선택임을 입증하려 한다. 그런데 이른바 성적지향, 젠더정체성은 타고난다는 생득설이 LGBT/퀴어를 혐오하고 때때로 살해하는 근거로 쓰인다면 어떡할 것인가? LGBT/퀴어를 정당화하고, 사회적 차별을 문제삼으려고 사용하려는 언설, 수사, ‘논리’가 혐오와 때때로 살해의 근거로 쓰인다면? 그런데 이것은 정확하게 현실이다. 생득설은 혐오의 근거로 쓰이곤 한다. 그럼 선택을 주장할 것인가? 아니, 이런 식의 프레임에 갇히지 않는 논의가 필요하다. ‘생득 vs 선택’은 LGBT/퀴어의 삶을 설명하는 언설이라기보다는 이성애규범, 이성애제도를 안정화시키는 논리기 때문이다.
오늘 어느 글을 읽다가 생득설이 혐오의 근거로 쓰이는 구절을 읽고 든 진부한 단상, 그리고 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