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빈/비에나에서, 엿새째: 프로이트 박물관, 게이레즈비언 서점, 채식식당

ㄱ. 이곳에 오고 처음으로 혼자 외출을 했다.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마란 비건으로 향했고 낯선 지하철/도시철도로 인해, 그리고 한국과는 다른 블록 개념으로 길을 잘못 들기도 했지만 마란 비건으로 무사히 도착했다. 그리고 느낌은… 오오오! 베간즈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여기가 진정 비건을 위한 곳이구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음식과 식재료가 있었다. 베간즈와 같은 것도 있고 베간즈에 있는 것이 없기도 하고 없는 것이 있기도 했다. 한참을 구경하며, 하지만 많이 구매하지는 못 하고(짐 무게도 고려해야 하니) 빵을 두 개 사서 돌아왔다. 빵은 확실히 맛났다. 한국의 더 브레드블루도 나쁘지 않지만(아니 여기에 오기 전까진 괜찮은 곳이었지만) 아무래도 맛의 차이가 좀 났다.
ㄴ. 어제 베간즈에서 조각 케익을 샀고 아침으로 그것을 먹었다. 아아, 오래 오래 기억이 날 맛이었다. 아마도 정말 오랜 시간 그 맛을 떠올리며 빈에 다시 오고 싶겠지.
ㄷ. 점심은 호텔에 있는 별도의 식당에서 먹었는데… 음… 다시는 먹지 않는 것으로. 여기 와서 처음으로 음식 맛이 별로였다. 돈 아까워.
ㄹ. 낮에 ㅈㅇ님을 만나서 프로이트 박물관으로 향했다. 아침에 이미 길을 한 번 잃어서인지 길을 잃지 않고(사실 출발점에서 길을 물어보고 갔으니까) 도착했다. 한국의 모텔 같은 곳에서 사용할 법한 표지판이 프로이트 박물관의 위치를 분명하게 알려줬다. 박물관은 2층에 위치하지만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벽에 프로이트의 생애를 간단하게 표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로이트가 살았던 곳을 박물관으로 만든 이곳엔 홈비디오를 편집하고 안나 프로이트가 설명을 덧붙인 비디오, 프로이트를 전반적 생애, 그리고 생애를 가늠할 수 있는 각종 사진과 문서, 프로이트가 사용했다는 물건, 프로이트의 논의를 상기시킬 조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진마다 번호를 붙여서 각 기록물의 의미를 설명하는 책자를 별도로 비치했을 뿐만 아니라 각 방의 번호를 누르면 음성으로 설명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 모든 모습을 보며, 퀴어 아카이브 전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ㅁ. 프로이트 박물관에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에 빈의 게이, 레즈비언 서점 Löwenherz이 있어서 그곳으로 이동했다. 겉에서부터 무지개 깃발이 나부끼는 모습인데, 내부의 자료가… 오오오. 게이 포르노와 게이 누드집, 게이 누드 엽서가 한가득이었다. 이 지점이 분명하게 흥미로웠는데 게이와 레즈비언이 몸을 표현하거나 노출하는 방식이 무척 달랐다. 게이 포르노는 수십 종이 있었는데 반해 레즈비언 포르노는 한 종류 정도만 있었고, 게이 잡지는 포르노가 대부분이었다면 레즈비언 잡지는 정치적 의제를 주로 다루고 있는 인상이었다. 게이포르노를 종류마다 한 권씩 구매하고 싶었지만 자금의 문제로 딱 한 종류만 구매했고, 레즈비언 포르노를 몇 권 구매했다. 서점 측에 허락을 구하고 여러 모습을 촬영했는데, 확실히 이런 분위기가 부러웠다. 개별 관계에선 음란해도 정치적으로는 건전한 문화 시민 되기만을 주장하는 한국의 분위기와, 여러 정치적 입장과 함께 이렇게 성적 욕망, 몸의 표현 등을 좀 더 적극적으로 출판하는 오스트리아/빈의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다른 점이 내겐 어떤 아쉬움이었다.
잠깐 추가하면, 트랜스젠더와 바이 책도 적잖아 있었음에도 홍보 문서엔 게이 레즈비언 서점이라고 나와 있어서 몸이 복잡했다.
ㅂ. 한참을 구경한 다음 바로 옆에 있는 Berg Cafe라고, 게이 레즈비언 카페에서 잠시 쉬었다. 그냥 티는 나지만 그렇다고 엄청 특별하게 다르다거나 그런 건 없는 그냥 카페.
ㅅ. 저녁을 먹기 위해 Lebenbauer Vollwert Restaurant로 향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아마 마지막으로 비건 식당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번에도 길을 헤매지 않고(어제는 구글 지도를 전체적 모습만 찍어왔다면, 오늘은 아예 자세하게 확대한 모습을 일일이 다 찍어서 준비했으니까… 흐) 무사히 도착했다. 고급 레스토랑 분위기여서 잠시 망설였지만 뭐 어때. 기본 식사는 비건인 듯하며, 디저트도 비건 음식이 꽤나 있었다. 음식이 약간 짜다는 것만 빼면, 무척 맛있었다. 밥과 디저트를 먹으며, ㅈㅇ 님과 연구와 관련한 온갖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늦어졌고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빈의 대중교통 시스템을 이용해서 호텔로 돌아왔다.
ㅇ. 빈/오스트리아의 대중교통 시스템과 관련해서 꼭 해야 하는 이야기. 한국은 지하철을 타기 위해, 버스를 타기 위해선 꼭 표나 카드를 찍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그냥 양심에 맡기는 시스템이라 누구도 확인하지 않았다. 불시에 한 번씩 검사하고 그때 표가 없으면 벌금이 70유로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검사한 적이 없었다. 한국은 복지를 늘이면 국민이 나태해진다느니 그런 말을 하는데 여기는 양심에 맡기고 있다. 시민과 국민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는 이야기다. 이 태도는 정부가 정책을 시행할 때, 국민 국가의 사회적 약속과 협의를 구성할 때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성을 만들 수밖에 없다. 나는 역시 우물 안 개구리였어.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에서 닷새: 벨베데레 궁전, 베간즈(비건 슈퍼마켓)

ㄱ. 오늘 일정은 간결했지만 다리가 상당히 아픈 하루였다. ㅈㅇ 님을 만나 S-Bahn을 타고 이동하다가 환승할 때 반대 방향으로 가서 시간이 좀 더 걸렸지만, 아무려나 어때. 벨베데레 궁전에 무사히 잘 도착하면 좋은 것이지. 어차피 길을 잃어도 상관없는 여행이니까.
ㄴ. 역에서 내려 궁전의 초입에 들어섰을 때 멀리 연못 너머로 보이는 상궁이 무척 멋졌다. 겉모습만으로 충분히 멋졌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궁에 들어가고서야 깨달았다. 상궁은 에곤 쉴레부터 클림트의 키스를 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클림트의 키스는 워낙 유명하고 이미지를 찾기가 무척 쉬워서 마음 한켠에서 꼭 봐야할까 싶었는데, 확실하게 깨달았다. 작품을 사진이나 이미지로 보는 것과 실물로 보는 것은 아우라부터 다르다는 것을. 한참을 바라봐도 지겹지가 않고 계속해서 새로웠다. 모든 방에 미술작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정말 많은 작품을 봐서 사실 뭐가 뭔지 기억이 잘 안 나기도 한다. ^^; 인상파 미술, 고전주의 미술, 신고전주의 미술, 궁의 벽화, 천장화, 궁 자체의 조각과 전시 하나하나가 인상적이었고 아름다웠다. 1층 전시의 마지막 즈음에 Jasper Johns의 ‘Regret’이란 작품을 구경했다(개요와 작품 사진은 http://goo.gl/6zeFIp). 작품의 직접적 계기를 확인하기 전까지 Johns의 작품은 정말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에칭으로 작업한 다양한 판본이, 각 판본마다 매력적이었다.
(ㅈㅇ님과 둘이서 이것이 조종석이다 운운 온갖 추측을 했다는 건 비밀…)
ㄷ. 보다가 배가 고파서 궁전 근처 가게에 들어가서 점심을 먹었는데,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비건 음식 서너 가지는 반드시 있었다. 가지를 토마토 등으로 요리한 음식에 빵을 찍어 먹었는데 꽤나 맛났다. 계획 없이 그냥 들어간 가게였고, 유명 관광지 근처 자리가 좋은 가게의 경우 한국이라면 맛이 별로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작년, 강릉에 갔을 때 강릉시외버스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식당은 정말 맛이 없었지. 하지만 이곳은 상당히 맛있었고 ㅈㅇ님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점심을 먹었다.
ㄹ. 점심을 먹고 나서 일단 하궁을 먼저 보기로 했다. 황제의 초상화, 나폴레옹의 초상화,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 관련 그림 등 합스부르크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느낌은 정확하게 ‘제국의 아카이브’였다. 그것도 제국을 성찰하는 아카이브라는 느낌보다는 제국을 향수하고 이것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싶어하는 느낌의 아카이브였다. 빈의 건물 자체가 제국의 그것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점에서, 하궁은 제국의 기억을 응축하고 있고, 구체적 기록물로 증거/증언하는 곳이었다. 하궁을 지나 중세보물 전시관으로 가면… ‘와…’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1190년대 제작한 십자가부터 몇 백 년 전의 보물 혹은 작품이 전시된 모습은 역사 아카이브라는 측면에서 무척 탐났다. 퀴어락을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ㅁ. 다시 상궁으로 이동해서 3층의 전시를 구경하고(3층이 인상파였던가.. 헷갈리네…) 1층 중세미술 부스로 이동했는데… 시작하는 곳 Carlone Hall이 엄청났다. 벽, 천장 모든 것을 신에게 봉헌하는 느낌의 작품이었고, 방 가운데는 오래된 (다소 투박한) 조각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전체 분위기는 어떤 신앙, 신에게 향하는 마음으로 가득했고, 만약 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방에서 신앙심이 상당히 고무되겠구나라는 인상이었다. 다른 많은 곳보다 이곳이 내겐 가장 인상적이었다. (파노라마는 여기서 http://goo.gl/xwNfR7 )
ㅂ. 상하궁을 모두 구경한 다음 다리가 아파서 좀 쉬었다가 근처에 있다는 비건 슈퍼마켓 Veganz(베간즈)로 향했다. 하지만 내가 지도를 전체적인 모습만 캡쳐한데다 길을 찾기도 어려워서 한참을 헤매고서야 간신히 도착했다. 재밌는 점은 많은 사람이 길을 친절하게 가르쳐주지만 묘하게 맞지만 묘하게 틀린 지점이 있다는 것. 아무려나 찾아갔는데 밖에서 보면 좁아보이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상당히 넓었고 식품 종류가 무척 많았다. 한국에서 파는 비건 제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종류가 많았다. 콩단백으로 만든 제품이 한가득이었고 냉동고 서너 개에 다양한 제품이 있었다. 비건치즈 역시 있었고 케익 역시 있었다. 초코와 과자가 가득했고 각종 식재료가 있었다. 예를 들어 디저트용 크림을 대신할 수 있는 비건크림 같은 것. 스무디를 만들 수 있는 제품 같은 것. 다리가 아프고 배가 고팠지만 한참을 구경하다가 물건을 잔뜩 산 다음에야 나왔다.
ㅅ. 호텔로 돌아가는 길의 아무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처음엔 케밥집에 들어갔는데 비건용이 있었다. 오오. 물론 담배 냄새가 심해서 그냥 나왔다. 오스트리아의 특징은 어디서나 담배를 핀다는 것. 놀이터엔 아이와 동행하지 않는 성인은 출입할 수 없지만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 담배를 피는 모습, 길빵하는 모습은 정말 쉽게 찾을 수 있다. 어디서나 담배 냄새가… 그런데 한국처럼 독한 냄새가 아니라서 그럭저럭 참을만했다. 암튼 케밥집을 나와 다른 곳을 들어갔는데 역시나 서너 가지의 비건 음식이 있었고 음식 역시 맛있었다. 대충 들어갔는데 괜찮은 선택이라니! 저녁을 먹으며 ㅈㅇ와 논문 이야기, 글 주제 이야기 등을 한참하다가 점원에게 가는 길을 물어본 다음 밤 늦은 시간 호텔에 도착했다.
ㅇ. 이렇게 하루의 기록, 일기를 남기는고나.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에서 나흘째

ㄱ. 아침을 호텔에서 먹고 9시 즈음 몇 명이 모여서 슈테판성당에 가기로 했다. 38번 트램을 타고 이동했지만 잘못 내렸고 그 결과는 오히려 흥미로웠다. 슈테판 성당을 찾아 가는 길에 많은 건물을 보았고 그 모든 건물이 모두 멋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본 건물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 치명적 문제랄까… 하하. ㅠㅠㅠ 그럼에도 모든 건물이 매력적이었다. 규모로만 보면 한국에도 무수히 많은 건물이 더 큰데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은 무척 달랐다. 건물이 내뿜는 아우라가 나를 압도했고 이것이 역사가 축적되고 문화가 축적된 흔적인 것인가라는 고민을 잠시 하였다.
ㄴ. 그리고 유일하게 건물 이름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곳이 슈테판 성당. 이곳은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는데, 내부로 들어가는 순간 그냥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사진을 찍었지만 사진을 찍으면서도 내가 사진으로는 결코 이 느낌을 포착할 수 없겠구나를 확인했다. 마침 미사를 보고 있어서 성가대의 노래도 잠시 들었는데,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서구 클래식의 역사에서 왜 특정 시기, 특히 이런 종류의 건축물을 중시하던 시기에 웅장한 음악이 나왔는지를 깨달았다. 동시에 그런 음악은 바로 이런 공간에서 들어야 한다는 것도. 어떤 곳에서 연주할 것인가가 어떤 종류의 음악을 작곡할 것인가에 강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서 실감한 기분이었다.
ㄷ. 오전의 관광은 ㅈㅇ님과 돌아다녔는데 여러 건물을 보며, 내가 원하는 여행은 이런 것이란 걸 확인했다. 어딜 봐야 한다고 서둘러 움직이기보다는 그냥 조금이라도 더 음미하면서, 길을 잃더라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것, 이것이 내가 원하는 방식의 여행이다.
ㄹ. 1시 즈음 빈 대학으로 돌아가서 학술대회 마지막 일정인 퀴어시티투어에 참여했다. 첫 번째 간 곳은 frauen cafe. 이곳은 모든 여성과 모든 트랜스젠더, 모든 인터섹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트랜스/인터섹스를 배제하는 곳도 있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다음은 빈 시청 앞 공원이었다. 이곳은 게이 남성들이 크루징을 하는 곳으로 유명하며 빈에서도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했다. 다음은 비건 팔라펠을 파는 Maschiu Maschiu에 갔다. 무척 맛났고 무난한 가격인데도 무척 배가 불러서 한끼 식사로 충분했다. 차가운 바람에 다들 몸을 떨면서 마지막으로 이동한 곳은 Rose Lila Tipp. 1980년대부터 존재한 곳이며 주류에 편입되는 방식으로 운동하는 것에 비판하며 도착/변태pervert를 적극 표방하는 곳이었다. 아, 마음에 들어. 동시에 동물권을 이야기하며 채식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야스민의 말에 따르면 베를린에서 퀴어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이들의 경우 80% 가량이 채식을 한다고. 오오오, 멋진 곳이다. 이곳에서 나머지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보낸 다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다들 헤어졌다. 어쩐지 아쉬웠다.
ㅁ. 이곳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저녁 7시가 안 되어서 호텔로 돌아와 쉬었다. 내일은 벨베데레궁전이고 아침엔 장을 봐야 한다.
*답글은 제가 정신을 좀 차릴 수 있을 때… 죄송합니다.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