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젠더퀴어와 인터섹스

나는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를 사용할 때 인터섹스를 당연히 포함하고 함께 사유하는 개념어로 쓰고 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퀴어는 인터섹스를 명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곤란함이 있다. 더 큰 곤란함은 맥락에 따라 ‘트랜스젠더퀴어와 인터섹스’라고 써야 할 때다. 나의 첫 의도와 무관하게 트랜스젠더퀴어에 인터섹스는 포함되지 않음을 표명하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마다 곤란하고 곤혹스럽다. 새로운 용어를 만드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아마도 나는 이 곤란함과 곤혹스러움을 어떻게 해결할지, 앞으로 몇 년의 시간을 보낼 것이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언어를 사용할 것 같다. 그때가 되면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다른 누군가가 정말 멋진 방식으로 해결했을 테니까 미래를 걱정하지는 않는다. 그저 지금 내가 사용하는 순간이 곤혹스러울 뿐이다. 내 글이 나를 배신하기 때문에 곤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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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요로 툴은 참 좋구나. 툴의 내한 공연은 나의 커나큰 꿈이지만 절대 안 오겠지. ㅠㅠㅠ

연구자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가 세계를 재구성하고, 책임감, 시간성, 맥락 등의 개념이 전면적으로 바뀌고 있는 시대에 공부란 뭘까? SNS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연구를 할 수 있을까? 그런 연구는 가능할까? 지금 현재에 적극 개입하고 현실을 계속해서 사유하는 동시에 SNS로 재편되고 있는 세계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공부하는 것은 가능할까?

무책임함이 독려되고(공적 발언이 문제가 되면 그냥 삭제하는 것으로 해결하고), 24시간이 영겁과 같은 시간으로 인식되고(24시간 이내 대답이 없으면 무시한 것이 되고 몇 시간 전 사건도 오래 전에 흘러간 사건이 되고), 맥락이 전적으로 무시되어도 괜찮은(캡쳐한 장면 하나가 모든 것을 판단할 근거가 되고) 방식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을 때, 책임감, 시간성/역사성, 맥락을 고집스럽게 붙들고 연구를 하거나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떤 태도일까?
나는 아직도 무인도나 극소수의 사람과만 연락이 되는 곳에서 몇 년 간 공부를 하고픈 욕심, 혹은 로망을 못 버리고 있다.
물론 내가 고립된 곳에 간다면 몇 년 간 뒹굴거리며 놀기만 하겠지만…

잡담

무책임함을 독려하는 SNS시대에 책임감이란 뭘까란 고민을 하고 있다.
자신이 퀴어페미니스트라고 말하며, 퀴어하지 않은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 논리가 성립할 수 있다면, 그렇게 말하는 당신의 논의는 조금도 퀴어하지 않다는 평가도 성립할 수 있다.
어쩐지 퀴어페미니즘과 퀴어페미니스트가 정치학이 아니라 정체성으로 소비되는 인상이라 당혹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