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밤

18시 59분. 컴퓨터의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 창밖은 어둡고, 제목은 밤이라고 적혀 있다. 이제 19시. 흔히 저녁이라고 말하는 시간. 그리고 루인은 밤이라고 적고 있다. 어두우면 다 밤이다.

불을 끄면, 창밖 눈꽃이 피어있는 나무들이 보인다. 북향인 사무실은, 학교 건물에 있는 방들이 그러하듯, 커다란 유리를 통해 밖이 보인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형광등을 끄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나무들은 트리처럼 보이고 그 풍경은 영화 속의 장면 같다. 지금은 Cat Power의 Maybe Not을 듣고 있는 시간. 피아노 소리는 겨울과 어울린다.

어릴 때 읽은 소설 중엔, 북극 지방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몇 편 있었다. 그 소설 속의 풍경은 나무들이 눈에 덮여 있는 장면들. 항상 그렇진 않지만, 지금은 북극에 있는 기분이다. 커다란 나무들로 만든 집에서 글을 쓰고 있는 느낌이다. 무덤 같다. 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지금 이 자리와 상관없고 음악은 서늘하다. 몸은 따뜻하다. 그리고

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문득 우울하다. 무엇이? 우울의 원인을 알 수 있다면 우울하지도 않겠지. 그 원인조차 잃어버린 순간. 하지만 그 원인이란 것이 있긴 했을까. 왜 자꾸만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걸까. 원인을 찾으면 조금이나마 괜찮아질까. 사무실은 어둡고 모니터 화면은 눈이 아프게 밝다. 황병승의 시를 연상케 한다.

내일까지 써야 할 발제문과 목요일까지 써야 할 기말 논문과 수요일에 있는 학과회의와 내일 저녁에 있을 기획단 회의와 … 이런 식이다. 계속해서 일정들을 떠올리고 몸은 이런 일정에 맞춰 돌아가고 그런 와중에도 당신이 떠오르면 모든 걸 멈춘다. 노래한다. 노래한다. 노래는 세월 따라 반복한다. 그리하여 노래가 흐르는 순간은 그 노래를 듣던 모든 시간들을 동시에 경험한다.

2학기가 끝나가고 있다. 일 년이 지나가고 있다. 다시 일 년을 더 하고 나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 미래를 향한 불안이 아니다. 그저, 이런 식으로 질문을 반복함으로써 외면하고 싶은 것뿐. 그래, 일 년 뒤의 루인은 한창 석사논문을 수정하고 있을까? 그래서? 그것이 뭐…

영영 소식을 알 수 없을 당신과 영영 소식을 알고 싶지 않은 당신은 같은 인물일까. 영원히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영원히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같은 인물일까. 영영 소식이 닿지 않아 알고 싶은 사람과 영원히 소식을 전하지 않으려고 도망치는 사람은 같은 사람일까. 그들은 다들 어디서 만날까. 만나야 할까. 만나서 무엇을 할까. 만나면 꼭 무언가를 해야 할까.

왜 아직도 당신은 낯설까. 여전히 낯설까. 지금은 Nina Nastasia의 Counting Up Your Bones를 듣고 있는 시간. 이토록 달콤한!

Transgender? Transgender!

어제 공동연대 문화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하는 과정에서(비록 루인은 문화제기획단은 아니었지만) 예전에 사용했던 리플렛을 볼 기회가 생겼다. 그곳엔 “Transgender? Transgender!”란 제목의 설명글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루인이 가장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일테면 트랜스젠더/성전환자는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불일치하는 사람”이란 식으로 설명한다거나, 취직, 학교 등에서 얼마나 고통 받고 있는지를 얘기한다거나.

당장 시간이 바쁘다고 하더라고 이건 고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며 두어 번의 수정을 거친 내용이 지금 이 글. “시비조다”, “공격적이다”란 평을 들어서 나름대로 “착하고 순하게” 바꾸는 작업까지 거친 내용이다. 믿거나 말거나. 흐흐.

Transgender? Transgender!

트랜스젠더는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너무도 ‘쉽게’ 그리고 너무도 자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성전환자들이 겪는 ‘고통’과 ‘긴장’은 자신이 인식하는 성별과 다른 사람들 및 사회 제도가 요구하는 성별 사이에서, 바라는 몸의 형태와 호르몬 등으로 변하는 몸의 형태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일치하지 않는”과 같은 표현은 이러한 긴장과 고통을 성전환자/트랜스젠더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그것이 사회 문화적인 맥락에서 발생한다는 걸 은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사회에 살며 고통과 긴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흔히 트랜스젠더/성전환자는 “성별위화감”, “수술 자체의 위험과 부담”, “직업 찾기의 어려움” 등을 겪기에 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너무도 자주 이런 식으로 우리를 재현했고,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의 고통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꼭 이렇게 고통을 전시하고, 얼마나 고통 받고 있는지를 호소해야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꼭 고통을 받아야만, 그래서 피해자나 희생자가 존재해야지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고통을 전시하지 않고, 고통을 얘기하지 않으면서도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운동을 지향합니다. 그리하여 동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하고, 이러한 소통 과정에서 변화할 수 있길 바랍니다.

똑똑하면 채식주의자가 된다고요?

관련기사: 똑똑하면 채식주의자? (네이버로)

채식과 관련한 이야기를 할 때, 루인이 가장 비판하는 내용은 건강상의 이유와 동물권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채식을 하면 더 건강해진다는 말, 채식이 인간의 몸에 더 적합하다는 말은 채식에서 발생하는 계급과 어떤 나라에선 음식쓰레기가 넘치지만 어떤 나라에선 기아로 인한 사망자가 상당한 국제정치학(오오, 거창한 용어를 사용했다 -_-;;;)을 무시하는 것이다. 동물권은 누가 무엇을 생명으로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를 무시하는 것이며, 그래서 동물권을 얘기하며 채식이 더 윤리적이라는 말은, 과대망상일 뿐이다.

그런데, 드디어 채식의 우생학 논리까지 나왔단 말이냐!!! 똑똑한 것과 공부 잘하는 것은 상관이 없고 똑똑한 것과 수능시험을 잘 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학벌이 곧 한 개인의 모든 능력을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인 한국사회에서 서울대 법대 출신은 상당수가 채식주의자라도 된다는 의미냐? 비건[vegan]이면 채식주의자 중에서도 가장 똑똑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냐?

희대의 코미디라고만 간주하기엔 너무도 끔찍한 상상력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