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라 네티즌 청원: 성전환자 성별변경법에 따뜻한 지지를 모아주세요

“성전환자 성별변경법에 따뜻한 지지를 모아 주세요!”

신체와는 반대의 성별로 자신의 성별을 지속적으로 확신하고 의학계(정신과 등)가 진정한 성전환자임을 확인해 준 성전환자들의 경우 일정한 의료적 조처(애초의 생식능력을 만드는 기관의 제거 등)를 마친 후 주민등록증과 호적 등을 자신이 확신하는 성별로 바꿀 수 있게 해주는 “성전환자성별변경 등에 관한 특별법“(안)이 민주노동당 노회찬의원의 대표발의로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제출되어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 9인 뿐 아니라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인 한나라당 안상수 국회의원도 본 법안에 대한 찬성 의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지만 현재 수많은 법안들이 밀려 있어 아직 법제사법위원회의 안건으로 상정조차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2년에도 유사한 법안이 제출되었다가 국회에 상정되지 못하고 폐기되어 성전환자들을 절망케 한 일이 있었습니다.

많은 차별과 고통 속에 살아 온 성전환자들은 이 법안이 하루 빨리 상정되고 통과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에 본 법안의 입법을 위해 성전환자들과 함께 활동해 온 “성전환자성별변경 법제정 공동연대”(51개 시민사회인권단체들)는 법안의 조속한 상정과 통과를 갈망하면서 이 일에 많은 시민들의 따뜻한 지지와 힘찬 응원을 모으고자 합니다. 이 곳에도 응원의 글을 모아주시고, 공동연대 홈페이지(www.t-gender.org)에 오셔서 국회에 제출할 입법청원 서명에도 참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 때문에 차별과 가난 속에 숨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성전환자들이, 이제 사회의 당당하고 성실한 시민이고 이웃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첫걸음이 될 “성전환자성별변경 등에 관한 특별법“(안)에 여러분들의 따뜻한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법공동연대 운영위원장 최현숙
010 4510 4351 / bebreaking@hanmail.net

성전환자성별변경법제정 공동연대
www.t-gender.org

아고라 네티즌 청원 가기

사실 루인의 경우 다음(DAUM)을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냥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지난 6월 3일을 기점으로 거의 메일 들락거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전혀 엉뚱한 소리네요. 그냥 관련 글이 있어서 링크했어요. 정확하게는 관련 글이라기보다는 같이 하고 있는 사업이기도 해요.

그럼에도 잠깐 외면하고 있어요. 자꾸만 슬퍼지거든요. 모르겠어요. 그냥 관련 글을 읽으려면 슬퍼지거나 괴롭거나, 그래요. 흐흐.

잠깐 시간이 되고 다음 아이디가 있으면 한 줄 부탁해요^^

변태고냥 J의 나비날기

그냥 조용히 링크만 걸어놓고 말까했지만 그냥 슬쩍 이곳에 기록하기로 했어요. 이건 일종의 루인에게 보내는 기록이니까.

처음 염두에 두고 있던 다방 이름은 “변태고냥 J의 제비다방”으로 하려 했더래요. 푸후후. J와 제비가 운율도 맞고 그냥 재밌더라고요. 하지만 막상 만드는 당일 우울증이 살짝 심한 날이어서 제비다방으로 할 엄두는 안 나고 그냥 나비날기로 했더라는. 난다는 것이 희망을 의미하느냐면 꼭 그렇지는 않아요. 루인은 나비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의 나비날기. 헤헤.

변태고냥 J의 나비날기는 [Run To 루인]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꾸미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있어요. 물론 음악만 주구장창 트는 공간이 되겠지만요. 다른 건 안 쓰고 그냥 음악만 틀고 관련해서 넋두리 조금 하고. 푸푸푸. 그러면서 또 다른 공간 하나를 더 만들었다는;;; 티스토리가 멀티블로그가 된다는 걸 알고 너무도 하고 싶은 주소가 있어서 하나 더 만들었더래요. 푸훗. 근데 그곳의 용도는 뭘로 할지 모르겠어요ㅡ_ㅡ;;;; 크크크.

변태고냥 J의 나비날기로 가기
(링크에도 있어용. 헤헤)

근데 변태고냥 J의 나비날기에 트는 음악을 좋아하는 분은 별로 없어서 결국 변태고냥 J 혼자 노는 공간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흐흐흐.

나를 주장한다는 것: 협상, 행위성 그리고 저항의 가능성

역시나 딱히 새로 쓸 글이 없으면 예전에 쓴 발제문을 올리는 것이 좋다…는 건 아니고, 그냥 언제나 그렇듯 올리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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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주장한다는 것: 협상, 행위성 그리고 저항의 가능성

루인
2006.11.29.

1. 협상하기
TV나 주간지, 일간지 등에서 읽을 수 있는 트랜스젠더 관련 인터뷰나 기사는 거의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어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한 두 개만 읽어도 될 정도이다. 일테면 어릴 때부터 얼마나 힘들었는지(하지만 “어떤 고통을 경험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소위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간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적용하는 질문이며, “다른” 삶을 산다는 건 힘들며 “남들”처럼 사는 것이 무난하다고 가정하는 태도이다), 자신의 몸을 얼마나 혐오하는지와 같은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직장에서 쫓겨났다거나 몸의 일부를 도려내고 싶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미국의 경우 1960년대, 1970년대 트랜스섹슈얼들을 “진단”한 의사들은 해리 벤자민이 제시한 트랜스섹슈얼의 정의/증세와 일치한다고 학회나 저널에 보고했다. 19세기 후반, 히스테리를 연구한 한 의사는 히스테리는 몇 가지 단계를 거친다는 가설(假說)을 설정했는데, 그 가설을 발표한 이후 그와 상담한 모든 히스테리“여성”들이 이와 같은 단계를 거쳤다. 짐작할 수 있듯, 미국의 트랜스섹슈얼들은 자신이 원하는 의료과정을 거치기 위해 매뉴얼대로 얘기했고(의사에게 가기 전에 예행연습도 했다고 한다), 히스테리“여성”들 역시 의사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았기에 가설대로 ‘무대에서 상연’했다고 한다.
질문자들이 인터뷰 과정에서 범하는 중요한 문제점 중 하나는, 질문자는 질문자로서의 위치에 있고 답변자는 답변자로서의 위치에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질문자가 “연구자”일 경우엔 질문자는 답변자의 ‘경험’을 지식으로 재단할 수 있는 사람이며 답변자는 “데이터”(“객관적인 사실”)를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인터뷰interview는 말 그대로 inter-view, 즉 상호 응시, 상호 관찰이라는 의미이다. 인터뷰는 질문자와 답변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답변자로 설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 역시 질문자로 설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는데, 다만 그 형식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란 형식을 통할 뿐이다. 즉, “질문자”가 구성하는 언어에 맞춰서 “답변자”는 대답할 언어를 구성하는데 어떻게 대답을 해야 상대가 수긍하는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로 살면서 어떤 차별을 겪고 있나요?”란 질문에 “직장에서 쫓겨난 적이 있어요.”라고 답하는 건 ‘너는 나에게 얼마나 차별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으니 이렇게 대답하겠다’ 혹은 ‘너는 내가 반드시 차별을 겪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구나’라는 뜻을 내포한다. 트랜스젠더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사회적인 승인이 있을 때, 트랜스젠더들은 거의 모두가 그런 “승인”에 맞춘 대답을 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말하지 않을 때에도 “승인”에 맞춘 내용만 받아들이고 활자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터뷰 자리가 아닐 때, 좀 더 ‘친밀한’ 사람들과 있을 때의 내용은 그것과 다른데 이 말은 어느 말은 진실이고 다른 말은 거짓이란 의미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지 협상한다는 의미이다.

루인의 경우, 가급적 커밍아웃을 하며 사람들과 만나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럼에도 커밍아웃을 하지 않고 있고 어쩌면 영영 하지 않을 집단이 있는데 이성애혈연가족들이 그 집단이다. 많은 퀴어들이 그러하듯, 커밍아웃을 한 곳에서의 행동과 하지 않은 곳에서의 행동 사이엔 상당한 “간극”이 있는데 루인은 루인의 젠더정체성을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는 방식을 취한다. 루인이 트랜스젠더임을 모르는 공간일 경우, 상대방이 인식하는/요구하는 젠더로 행동하는데, 주민등록상의 성별이 1번이고 “아들”로 인지하는 가족체계에서 “남성”적이라고 간주하는 행동을 좀 더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적이라고 간주하는 행동을 ‘안’/‘덜’ 하는 편이다. 이른바 “남성”적이라고 말하는 행동들을 하는데 그렇다고 이것이 루인이 ‘트랜스젠더임’을 부정하는 건 아니라고 느낀다. 트랜스젠더라는 걸 모르는 가족과 있을 때,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에서 같이 활동하는 운영위원에게서 전화가 온다면 루인은 트랜스젠더인 동시에 트랜스젠더가 아닌 것일까(한편으론 그렇기도 하다). 혹은 전화기가 닿아 있는 부분은 트랜스젠더이고 나머지는 아닌가? 어떤 사람은 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라고 밝히지 않는 건 기만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트랜스젠더면서 동시에 트랜스젠더가 아닌’ 루인(의 행동)은 기만인가. 루인이 트랜스젠더란 걸 상대방이 알건 모르건 루인의 행동엔 별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같은’ 행동도 사람들마다 자신들이 읽고 싶은 방식으로 해석하며 특정 젠더로 간주한다. 이런 “해석” 역시 루인‘의’ 기만인가.

2. 행위성
자신을 주장하는 것―“나는 트랜스젠더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자신을 단일한 정체성으로 고정하는 것은 아니다.
mtf 트랜스여성의 경우 트랜스여성이 아니라고 불리는 여성들보다 더욱더 여성‘스럽고’ “여성성”을 ‘과잉’체화해야만 다른 사람들이 ‘여성임’을 승인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여성임이 부인되고 트랜스젠더/트랜스여성으로 각인된다. 자신을 주장하는 바로 그 행동이 자신을 부인한다. 예전에 잠깐 얘기를 나눈 한 CD는 크로스드레서들은 자주 ‘업’하지만 트랜스젠더들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옷을 입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고 말한 반면 미디어나 어떤 누군가들을 통해 전해 듣는 얘기 속의 mtf/트랜스/여성은 이성애를 강화하는 행동과 ‘여성보다 더 여성스럽게’ 행동한다. 하지만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처음부터 루인을 트랜스젠더라고 여기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고 “강호동”(이라는 사회문화적인 코드)을 “남성”이 아닌 다른 어떤 성으로 여기고 얘기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물론 반드시 루인에게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의사 앞에서 자신의 외부성기를 혐오한다고 말하는 것, 어떤 장소에서 여성성을 ‘과잉’체화하는 것과 같은 행동은 그 상황에 따른 협상이다. 협상한다는 건,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담론 지형 내에서 어떻게 자신을 주장할 것인가, 하는 전략이며 그래서 맥락에 따라 “모순”처럼 여겨지는 행동(의사 앞에선 자신의 외부성기를 혐오한다고 말하고 친밀감을 형성한 관계와 있을 땐 자신의 외부성기가 주는 쾌락을 말하는)을 하기도 한다.
자신임을 주장한다는 건 자신을 본질적인 정체성/주체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 사회의 맥락에서 자신의 위치를 그리는 작업이며 이를 통해 사회의 담론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것을 행위성이라고 해석하는 데, 헤크만(Hekman 1995)의 지적처럼 행위성은 “긍정”적인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협상하는 행위면서 어떤 행동을 어떤 맥락에서 그렇게 했는지를 읽는 작업이다.

3. “Inside/Out”-이분법을 드러내기
나마스테(Namaste 1994)는 푸코와 데리다의 논의를 통해 “내부/바깥”Inside/Out의 관계를 논하며 그것은 구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는 관계에 있음을 지적한다. 제도 바깥에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은 제도 내부에 있으며 “반대”라는 설정을 통해 “나”를 구성한다. 그렇기에 “내부/바깥”이란 구분은 그 자체로 이분법인 동시에 딱 잘라 구분할 수 없는 걸 구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 구조는 이런 식의 구분 그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 존재들을 원천 배제한다.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식의 설명은 양성애, 트랜스젠더, 간성, 퀴어 등을 ‘존재하지만 부재중’으로 간주한다. 그렇기에 나마스테는 이런 이분법을 거부하는 것이 저항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푸코를 읽으며, 결국은 허무주의로 빠져서 죽음 외엔 저항이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저항조차 기존의 담론 구조 내에서 발생한다는 말이 저항 불가능성을 얘기한다고 해석한 듯 하다. 하지만 저항이 기존의 담론 구조 내에서 발생한다는 말은, 한편으론 저항 행위 자체가 저항하려는 대상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공고히 하는 행동임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 만큼 지배담론이란 것이 취약하고 틈이 많음을 의미한다. 푸코는 그 사회를 지배하는 담론이 있다고 해서 단 하나의 담론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담론들이 경합하고 있다고 말했다. 헤크만이 모색하고, 나마스테가 말하는 저항의 공간은, 담론과는 무관한 바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담론의 틈, 담론들이 경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균열지점들이다.
“여성성”/“남성성”을 과잉체화해야만 비로소 “진짜”라고 승인하지만 그 승인이 역설적으로 부인/부정(“그러니까 넌 트랜스야”)을 의미하고, 자신을 주장하는 바로 그 행동이 자신을 부인하는 행동이기도 하다는 건, 담론의 틈, 균열지점을 체현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사회제도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저항 아님”, “행위성 없음”으로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가장 순종적으로 보이는 바로 그 행동이 가장 저항적인 행동인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루인, “젠더를 둘러싼 경합들(gender dysphoria):트랜스/젠더 정치학을 모색하며” <여/성이론> 15호 (서울: 도서출판 여이연, 2006)
푸코, 미셸, <성의 역사: 앎의 의지> 이규현 옮김, (서울: 나남,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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