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리카와 1년

처음엔 고양이가 무서웠다. 고양이는 좋아했지만 막상 함께 살기로 했을 땐, 무서웠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어떤 식으로 동거를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함께 살겠다는 연락을 하고서도 그 연락을 물리고 싶었다. 리카를 임보하고 있던 집도 더 좋은 집을 물색하고 있었다는 얘길 들었을 때, 리카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아쉽기도 했다. 나보다 더 좋은 집을 찾아 갔다면 리카는 더 행복하고, 나의 두려움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난 다시 연락을 했고 리카와 만났다. 그때가 2010년 3월 5일이다. 날씨가 조금 흐렸고 바람이 찼다. 길고양이로 살던 리카는 내게로 왔다. 임보하던 곳에서 내게로 차를 타고 오는 시간,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리카는 임시 박스에 오줌을 눴다. 몸은 좀 지저분했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이 어색했다.
리카와 처음으로 단 둘이 남은 시간, 그 짧은 시간. 리카를 집에 들이고, 알바를 하러 가기까지 매우 짧은 시간. 모든 것이 어색하고 고양이를 무서워한 감정이 집을 채우고 있던 시간. 리카는 방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리카는 내 무릎에 올라와 잠시 그릉거리다 내 손을 물곤 내려갔다.
나는 방안에 사료와 물, 화장실을 몰아 넣고 방문을 닫았다. 고양이도 무서웠지만, 외출했다 돌아왔을 때 리카가 문을 박차고 달아날까봐 두려웠다. 기우였다. 리카는 잠깐 문앞을 탐색할 뿐 내게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나의 걱정이 기우란 걸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리카와 살기 시작한 얼추 일주일 정도, 나는 리카를 방안에 가뒀다. 내가 집에 있을 땐 방문을 열어뒀지만 외출할 때면 방안에 필요한 것을 모두 넣어두곤 방문을 닫았다. 미안해서 음악을 틀어놓고 갈 때도 있었지만 이것이 무슨 소용이랴… 넓은 길에서 좁은 방으로… 리카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리카는 순했다. 나와 살던 초기, 리카는 침대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어딘가로 이동할 때면 침대를 빙 돌아갔다. 고마웠다. 미안했다. 감탄했다. 의심했다. 리카가 길고양이 출신이 아니라 집에서 버림받은 고양이라고 의심했다. 고양이가 집에서 살며 어떤 관습을 지킬 수 있는지를 깨달으며 감탄했다. 목욕을 하기 전이라 리카의 몸은 지저분했기에, 침대에 올라오지 않는 리카가 고마웠고 나의 이기심에 미안했다. 리카는 무려, 아기고양이가 침대를 놀이터 삼을 때까지 올라오지 않았다. 아기고양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침대에 올라오지 않았을까?
1년 조금 더 된 고양이로 추정하는 리카는, 여덟 아깽을 임신한 엄마고양이였다. 몰랐다. 초산이라고 추정했기에 많아야 너댓 아깽을 품었으리라, 짐작했다. 그래서 출산 2주 전부터 긴장했다. 언제 출산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그러다 4월 초, 여덟 아이를 낳았다. 모두가 건강했다. 리카도 건강했고, 여덟 아깽도 무사히 다 살아남았다. 그 모습이 애잔해서, 혼자 울었다. 리카는 아무렇지 않은데 나 혼자 감상에 잠겨 울었다.
출산 후, 비쩍 말랐을 땐 속이 상했다. 밥을 잘 안 먹을 땐 걱정이 상당했다. 그 시절, 나는 알바와 프로젝트로 상당히 바빠 리카를 제대로 돌봐줄 수 없었다. 미안했다. 하지만 그 복잡한 상황에서 벗어날 핑계가 있다는 점에서, 가끔은 바쁜 일정이 고마웠다. 미안했다. 집에 돌아올 때면 두부를 샀다. 미역을 우린 물에 사료와 두부를 섞어 리카에게 주기도 했다. 한창 많이 먹어야 할 시기에, 먹는 게 부실해서 전전긍긍했다. 여덟 아깽에게 젖을 주려면 무척 많이 먹어야 할 텐데, 리카는 하루에 사료 한줌을 안 먹을 때도 있었다. 무서웠다.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되더라. 너무 안 먹어서 큰일이 생길 줄 알았는데, 아가들을 하나, 둘 떠나보내고 리카도 여유가 생기면서 살이 붙기 시작했다. 비쩍 마른 모습만 봐서 살이 붙은 모습을 살찐 모습을 착각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해서 어떤 모습이 좋은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리카는 나와 동거한 첫 번째 고양이라, 모든 것이 낯설었다. 임신했던 시절의 배가 만삭의 배가 아니라 원래 그런 것으로 보였듯,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다.
리카와 나의 관계가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출산 이후, 여덟 아깽이 우다다 달리던 시절, 리카와 나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경계했다. 리카가 곤란한 상황에서 나는 리카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리카는 나를 공격하려 했다. 그랬다. 그 시절, 초보 집사인 나는 사소한 일에도 지쳐있었다. 리카의 감정을 살피기보단 나의 피곤함이 앞섰다. 지금은 그때가 부끄럽지만, 다시 그 시절도 돌아간다면, 아마 그때와 똑같이 행동을 하리라. 그리고 뒤늦게 나의 감정이 잘못이라고 깨닫고 태도를 바꾸리라. 그래. 그 시절에 비하면 작년 6월부터 얼추 두 달에 걸친 발정기는 그저 괴로운 시기일 뿐이었다. 만날 득음하는 리카를 판소리 대회에 보내고 싶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 리카가 발정기일 때, 만날 잠을 설치며 괴로웠지만 농담을 할 여유는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어느 순간 리카와의 삶이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집을 단 하루도 비우면 안 되는 줄 알았는데 이틀 정도 비워도 큰 문제가 없다는 걸 깨달으며, 내가 바쁠 땐 조금 덜 신경써도 괜찮다는 것을 깨달으며 동거생활에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두 가지 못 잊을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하나는 중성화수술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 마취가 덜 풀린 리카는 몇 번을 토했는데 매번 화장실에 토하려고 애썼다. 그냥 아무 곳에 토했어도 그러려니 했을 텐데 토기를 참으며 화장실까지 기어가곤 했다. 또 다른 에피소드. 언젠가 몸이 안 좋아 밥도 제대로 못 챙겨 주고 잠들었다. 새벽인가, 목이 너무 말라 잠에서 깨어나 물을 마시러 가는데 리카와 바람이 우다다 달려왔다. 배가 고프니 나를 깨울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고마웠고 미안했다.
나의 고양이가 리카라서 정말 다행이다.
+이곳에는 처음 공개하는 사진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을 이곳에 공개한 적도 없거니와 리카와 바람 사진을 이곳에 공개한 적도 없어서..;; )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3월 4일, 정확하게 365일 되던 날 저녁.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리카. 아니.. 잠들려는 찰나 내가 사진을 찍어 깨운 상황이다. 흐.
사용자 삽입 이미지오랜 만에 올리는 사진이라, 바람도 함께. 🙂

루인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

다른 어떤 블로그를 하나 만들까 고민했다. 이곳에도 한번 적었고. 하지만 말이 쉽지, 실제 운영하기란 쉽지 않다. 자칫 잘못하단 둘 다 놓칠 수도 있으니까. 아울러 요즘은 트위터를 조금씩 활용하면서 다른 공간을 바라는 욕심이 잠잠하기도 하다.

아옹 님 블로그에서 티스토리와 텍스트큐브닷컴 비교 글을 읽으며 구체적으로 서비스를 고민하기도 했다. 일단 이글루스는 제외했다. 주민등록번호 문제 땜에. 티스토리는 이미 사용 중에 있어 언제든 개설할 수 있다(티스토리 초대장 필요하신 분 비공개 댓글 달아주세요^^). 하지만 기업 같은 곳에서 문제제기하면 언제든 열람제한에 걸릴 수가 있다. 무려 글을 쓴 나 자신도 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논쟁적인 글을 쓰진 않겠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 그나마 텍스트큐브닷컴이 괜찮을 거 같았다. 하지만 번거롭게 이것저것 더 만들기가 싫었다. 관리하기 쉽게, 기존의 것에 하나 더 덧붙여 쓰기로 했다. 티스토리에서 텍스트큐브닷컴으로 이사하는 건 어렵지 않을 테니, 문제가 생기면 나중에 고민하기로 하고.

이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든 고민 하나. 다른 공간은 어떤 성격일까? 어떤 글을 쓰면 좋을까?

고전적인 의미에서 ‘나’라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리고 그 ‘나’에게 100가지 종류의 특성, 삶, 성격 등이 있다고 가정하자. 여기서 ‘루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 법률상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을 빼고 났을 때 뭐가 남지? 아니, 법률상의 이름으로 불리는 삶은 어차피 무시해도 좋다. 이런 이름으로 만나는 사람들(대부분이 혈연가족과 친적)과는 웹에서 관계를 맺지 않으니까. 그럼 루인을 빼고 나면?

나는 분명 루인으로 불리지 않는 어떤 삶, 그리고 별도의 블로그를 운영할 수 있을 어떤 삶이 있다고 믿었는데, 뭔가 막막했다. 내 삶은 루인이라는 이름을 매개하지 않고선 설명이 힘들 정도였다. 뭔가 있긴 한데, 그건 굳이 웹에서 공유하고 싶진 않은 부분이었다. 그렇다고 오프라인에서만 유통할 부분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내 몸 안에서 휘발하고, 흡수되고, 어느날 갑자기 되살아나며 내 안에서만 유통되길 바라는 부분이었다. 사적인 영역이라거나 그래서는 아니고,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영역은 아니겠지만 꺼내고 싶지는 않은 영역일 뿐이다. 이렇게 하고 나니, 루인을 제외한 ‘나’는 누구인지 헷갈렸다. 어느 순간, ‘나’라는 어떤 사람은 루인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되는 어떤 사람과 너무 붙어버렸다. 하지만 루인도 아니고 법적 이름의 누군가도 아니고 별도로 쟁여둔 누군가도 아닌 그 누군가. 루인이라는 삶과는 다른 어떤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 그 누군가는 누구일까? ‘나’는 어디까지고, ‘루인’은 어디까질까? 루인인 나와 루인이 아닌 나는 어떤 관계일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와중에, 아는 분에게서 매력적인 소식을 받았다(다른 식으로 썼다가 굳이 노출하지 않아도 될 듯한 부분이 드러나는 듯 하여, 문장을 수정했다). 누군가가 동거인을 구하고 있는데 의향이 없으냐고. 물론 표면적으론 주변에 동거를 구하는 사람이 없느냐였지만, 사실상 내게 제안한 거였다. 나는 덥석 물었다. 이런 건 눈치껏 물어야 한다. 마치 낚인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한 가지 문제가 있긴 하다. 예전에 동거 혹은 작은 방 월세를 고민할 때 핵심은 이를 통해 공과금이라도 해결하려는 거였다. 근데 이번에 동거를 한다면 내가 생계부양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아하하. 그런데도 나는 심각하게 동거를 고려했다. 이것은 어쩌면 기회일 수도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고, 현재는 의견 조율 중에 있다.

이 상황에서 문득, 그래 동거일기를 써도 괜찮겠다 싶었다! 아하하. 그래, 이거야, 이거.

어쨌거나 이곳과는 다른 곳에서 다른 어떤 이름으로 살고 있는 나의 일상. 그것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자, 기분이 좀 좋았다. 하하. 그러며 블로그를 개설하고, 스킨을 디자인하고…

물론 아직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이다. 서둘러 결정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좋다. 그저 뭔가 다른 이야기, 다른 ‘나’를 풀어 놓을 공간이 생겼고, 가능성이 생겼다는 사실이 즐거울 뿐이다.

익히 얘기했듯, 새 주소를 여기에 공개할 의향은 없다. 하지만 너무 쉬운 주소라 알고 나면 허망할 듯. (아무리 그래도 설마 fndlsdksla이거나 iamnotruin은 아니겠지? 흐흐) 소개해준 ㅎㅈ 님을 비롯해서 몇몇 분에겐 알려드릴 예정이지만,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알려드리고 싶은 분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곳 외에 다른 곳도 알고 싶어하는지 확실하지 않아 먼저 알리진 않을 예정이다. 눈팅만 하던 어떤 블로거에게도 알려주고 싶지만 그 분이 여기에 들어온다는 보장이 없으니 생략. 하하. 디자인만 있고, 글은 없으며 진행 상황에 따라 조용히 묻힐 수도 있으니 천천히 알려드릴까 한다.

아무려나 그곳은 루인이 아닌 다른 어떤 삶일 거 같다. 행여 루인이라는 어떤 사람의 모습이 언뜻 드러난다고 해도, 그저 우연히 비슷한 모습일 뿐입니다. 🙂

+ ㅎㅈ 님은 이와 관련해서 댓글을 다시려면 절대로 비공개로 달아주세요!!! 흐흐.

++ 여기서 대반전.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안 만들었는데, 만든 척해서 관심을 구걸하는 걸지도? 푸하핫. 데굴데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