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개가 된 사나히(4회차)

일단 오늘이 막공이었고 배우들도 마지막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힘을 더 쓴다는 느낌.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ㄴ.

지난 번에 못 쓴 짧은 메모.

일단 공주가 소년에게 니마이 역을 가르쳐 주는 장면에서 공주의 성적 욕망을 사유할 수 있게해서 좋았고, 또한 공주가 소년에게 니마이 역을 가르쳐주며 가장 니마이스럽게 행동하는 모습이 정말 재미있었다. 남성성은 무엇을 알아야하고 니마이는 무엇을 알아야 하며 또한 그것이 어떻게 본질이 아닌지를 탐색할 뿐만 아니라 공주의 몸짓이 좋았다. 이 몸짓은 또한 소녀/아랑도 비슷하게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의 경계를 질문하는 방식으로 나와 좋았고.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꼬마는 종종 소년의 짝패 같고 또 때때로 꼬마는 기존 극의 흐름을 잡아가는 핵심이자 주변이기도 해서 좋았다. 꼬마는 어떤 의미에서 이번 여성국극의 핵심 같다. (딴소리, 꼬마를 연기한 이주영 배우가 중간에 애드립으로 가수 캐릭터를 꺼내서 좋았고 재밌었음 ㅎㅎ)

ㄹ.

공연을 보기 전 나의 오해. 남역배우 사나히가 상대에게 벼개 역할을 해주는 제목인 줄 알았다.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벼개가 된 사나히’에서 ‘된’은 본질적 되기도 아니다. 예를 들어 하리수의 자서전 제목은 ‘이브가 된 아담’인데 이때 ‘된’은 아담이기를 버리고 이브가 되는 의미다. 즉 양자택일의 삶에서 됨이 작용한다. 물론 자서전을 꼼꼼하게 읽으면 이렇게 독해할 수 없는 지형이 펼쳐지지만 기본적으로는 양자택일의 지형에 배치된다. 그런데 ‘벼개가 된 사나히’는 사나히/소년이 벼개/여자가 되는 양자택일의 선택이 아니다. 그보다 남자, 여자, 벼개, 관역이 될 존재를 결정하는 왕이 되기를 선택하기보다는 그런 권력 작동에서 벗어나기를 모색하고, 또 왕의 권력으로 벼개가 되어야 했던 이들이 되기를 결정함으로써 벼개가 되어야 했던 이들의 곁에 선다. 즉 ‘벼개가 된 사나히’는 ‘사나히가 아닌 벼개가 되기’가 아니라 벼개로 강제되는 이들 옆에 함께 하기를 선택한 남성성이다.

정확하게 여기서, 소녀는 소년에게 니마이는 피 흘리는 여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남성이라고 설명하는데, 이 그림자 공연 같은 멋진 장면 이후 (왕과 벼개의 꿈을 지나) 2막 아랑애사가 나온다. 아랑애사에서 아랑은 겉보기에 좋은 모습이 아니라 피 흘리며 살해된 모습이고 이상사는 바로 그 모습을 사랑한다. 과거의 좋았던 모습으로 치환하며 나쁜 상태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피 흘리며 죽은 모습 그 자체 또한 애도하고 사랑하며 타인/여성을 단일 형상으로 규정하기를 거부한다. 그리하여 이상사는 소년이 삼마이되기, 가다끼되기, 니마이되기를 거쳐 벼개가 되기를 거치면서 만든 어떤 남역배우/남성성이라 할 수도 있다.

또 남은 메모라면 명명. 왕이 나왔을 때 소년은 폐하라고 했다가 마마라고 했다가 폐하라고 했다가. 꼬마는 소년과 비투비를 할 때 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상대의 명명을 심심찮게 바꿔내서 재미있었다. 이것이 이 공연의 중요한 장치 중 하나일 것이고.

무대 미술이 좋았는데 공연의 분위기가 구현되기도 했고 이 분위기에 이 미술작품이 나오면서 상상이 구현되는 느낌이었다. 음악도 무척 좋았다. 몇몇 음악은 제목을 알고 싶어서 유튜브에 플리가 있으면 좋겠다. 나의 좌석 위치로 인해 공연 내내 공연의 일부였던 수어 통역을 제대로 못 봐서 아쉽기도 했고.

… 암튼 다시 재공연할 수 있기를.

벼개가 된 사나히, 메모

벼개가 된 사나히에는 80대 여성국극 배우 이미자, 90대 여성국극 배우 이소자가 나온다. 두 배우의 출연은 계속해서 감사하고 또 감동적인데, 단순히 역사적 두 배우의 출연 때문만은 아니다. 이 공연은 기존 여성국극의 관습과 규범성을 근본적으로 문제제기하고 있는데, 두 배우는 기존 여성국극의 규범성을 체현하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으로서 자신들이 만든 역사의 부정적 측면을 직접 재현한다. 동시에 이 공연에서 그 부정적 측면을 문제삼고 재구성하고자 하는 작업에 후배 배우들과 함께 한다. 역사를 만든 이들이 자신들이 만든 역사와 관습, 규범성을 새로운 흐름과 함께 하는 것으로 여성국극의 새로운 약속을 만든다. 무엇보다 새로운 세대만 참가하는 공연이었다면 자칫 세대 갈등처럼 오해되었을 장면을, 두 배우의 참여로 인해 이런 반성과 도전이 여성국극의 관습이라고 설득한다. 그래서 소년과 왕자 사이의 욕망이 재현되는 장면 등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두 배우의 출연이 감동적이고 또 계속 곱씹으며 배우고 싶은 태도이기도 하다.

이 공연, 안 본 사람 없기를!

벼개가 된 사나히(2번째)

오늘, “벼개가 된 사나히”를 보며 불현듯 구자혜 연출의 공연이 전반적으로 그렇듯 이번 작품 또한 완벽하게 구축한 한 편의 시와 같다고 느꼈다. 뺄 것 없고 괜히 나온 장면이나 대사가 없으며 그냥 쓰는 무대가 없다. 모든 것이 한 편의 시처럼 어울린다. 아, 그래 이게 그동안 내가 구자혜 연출의 작품에서 느낀 공통된 느낌이었구나.

소년은 계속해서 남성성, 남성되기의 의미를 탐색한다. 삼마이, 니마이, 가다끼, 그리고 왕에 이르기 다양한 형태의 남성성을 탐색하고 그것에 내재하고 외재해는 모순과 의존성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그리하여 꿈에서, 왕과 벼개 사이의 이분법을 벗어나기 위한 고민과 괴로움을 계속 밀고 나간다. 그 모든 곳에 여역배우가 있고 그들은 남성성, 혹은 남역이 구성되는 방식을 명확히 지적한다. 남성성은 여성과의 관계에 의존해야만 비로소 완성되지만 여성이 죽어 사라져야 그 성질이 완결된다. 여기에 2막 아랑애사가 중요하다. 피를 흘리며 죽은 시체, 여성을 존재로 다시 사유하는 태도. 그리하여 아랑애사는 어떤 의미에서 소년이 여성국극단에 들어가 모색하고 변형하려는 남성성의 한 형태이자 윤리에 대한 질문이다. 무엇보다 남역배우라는 말은 남성성이 본질이기보다 계속해서 배우고 수행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압축한다.

무엇보다 이 극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비투비다. 남역배우되기와 비투비의 실천이 만드는 퀴어함이 또 다른 매력이며 모든 곳에서 모든 규범을 흔드는 꼬마의 역은 작품의 주제를 재현하는 핵심이다.

한 번 더 볼 예정인데 또 한 번 더 볼까 싶다. 진짜 정말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