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

작년 언제부터인가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와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를 혼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트랜스젠더퀴어로 일괄적으로 쓰고 있다. 아직 입에는 잘 안 붙어서 트랜스젠더라고만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거의 10년을 트랜스젠더라고만 말해왔으니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 단독으로 쓰는 글에선 어지간하면 트랜스젠더퀴어로 쓰고 있다.

사실 트랜스젠더퀴어는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용어다.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를 붙인 용어라고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 정확한 의도를 설명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나는 특별히 의도를 쓰지 않고 LGBT/퀴어란 용어를 그냥 쓰는 등 이런 일이 많으니 특별할 것은 없다. 하지만 어쩐지 트랜스젠더퀴어와 관련해선 몇 번 질문을 받아 정리를 해야 할 듯했다.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를 쓰기로 한 첫 번째 이유는 나 자신이 트랜스젠더퀴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 동안 나를 트랜스젠더라고 설명하며 지내왔고 이를 통해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에 저항하는 젠더 인식론을 구성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내가 말하는 트랜스젠더는 또한 젠더퀴어기도 하다. 아울러 나 자신이 트랜스젠더면서 젠더퀴어기도 한데 내겐 이것을 분리해서 설명하는 일이 매우 불편했다. 트랜스젠더’면서’ 젠더퀴어가 아니라 그냥 트랜스젠더퀴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개인적 이유에서만 이 용어를 채택하지는 않았다.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란 용어가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되고, 쓰이는 방식을 살피다 보면 이 두 범주를 분명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장면을 포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현재 시점에서의 트랜스젠더, 혹은 의료적 조치를 하고 자신을 (트랜스)여성 아니면 (트랜스)남성으로 설명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 가입한 모든 사람이 자신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이런 식의 설명에 저항하면서도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말하는 이들이 적잖게 있었다. 아울러 자신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설명하는 이들 역시 특정 순간엔 이런 식으로만 말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한다고 해서 남성으로 살아야 했던 과거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이런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른 한편 젠더퀴어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호르몬만 하건, 수술을 하건 의료적 조치를 원하는 사람이 분명하게 있었다. 아울러 의료적 조치를 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이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다면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를 어떤 순간엔 구분하는 듯하지만 젠더퀴어의 복잡한 경험 맥락에서 어디서 이를 구분할 수 있을까? 또는 나 자신은 이런 구분과 분열, 모순을 어떻게 하면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부연설명을 해야 하는 고단함을 겪지 않으면서, 그 분열과 모순을 내 삶이자 내 몸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란 고민을 했다. 그것이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를 쓰기 시작한 이유였다. 즉 의료적 조치를 하건 하지 않건, 이원젠더 규범에 부합하지만 가끔 틈새를 드러내건 이원젠더 규범에 저항하며 다른 방식으로 젠더를 구성하건 상관없이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고 저항하고 때때로 능청스럽게 무시하는 그런 일시적이거나 지속적 삶의 태도, 젠더 경험, 인식론을 설명하고 싶어서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를 채택했다.
그런데 여기엔 한 가지 강한 우려가 더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발표한 염려기도 하다.)
1990년대부터 대략 2000년대 어느 순간까지 용어의 대립(‘대립’이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은 트랜스섹슈얼과 트랜스젠더였다. 트랜스섹슈얼은 의료적 조치를 한 사람이고 트랜스젠더는 의료적 조치와 상관없이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젠더를 표현하는 사람을 포괄했다(학제 기준으로는 지금도 이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즉 지금 시점에서는 젠더퀴어가 당시엔 트랜스젠더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트랜스젠더는 의료적 조치를 하거나 원하고, 전형적 여성성이나 남성성에 부합하거나 부합하려 애쓰고, 신자유주의 경제에서 스스로를 생산성 있거나 상품성있는 몸으로 재현/구현하고자 하는 사람을 지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젠더퀴어는 바로 그런 정치학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이미 1990년대부터 사용한 개념/용어지만) 마치 새로운 것처럼 등장했다. 즉 트랜스섹슈얼-트랜스젠더 구도가 트랜스젠더-젠더퀴어로 바뀐 느낌이다. 나의 염려는 단순했다. 젠더퀴어가 또 다시 범주를 구분하고 범주를 확정하는 용어가 되지 않기를, 트랜스젠더란 용어가 쓰이는 방식처럼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염려가 있었다. 물론 이것은 나의 바람처럼 되지 않을 것이며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용어가 지금의 젠더퀴어를 대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지금의 정치적 인식론을 고집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선택한 용어가 트랜스젠더퀴어다.
그러니까 이성애-이원젠더 체제에 저항하고 비판하고 농담처럼 무시하는 그런 인식론적 태도를 지속할 수 있길 바라는 어떤 입장이 있다.

외로움과 슬픔의 네트워크: 라즈 온 에어Raz on Air

현재 진행하고 있는 인천인권영화제의 상영작 <라즈 온 에어>를 설명하는 원고를 썼습니다. 좀 급하게 써서 부끄럽지만…
해설서가 나오면 우편으로 보내준다고 하는데, 상영기간에 보내 줄 여력이 없을 테니 나중에 오겠지요.. 책을 받으면 영화제 홍보와 함께 올리려고 했는데.. 이건 안 될 듯하여 소개글 먼저 올립니다. writing 메뉴엔 나중에 책자를 받으면 그때 추가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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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제18회 인천인권영화제, <라즈 온 에어> 인권해설 원고.
외로움과 슬픔의 네트워크
-루인(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runtoruin@gmail.com )
당당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라즈의 팬은 말했다. 라즈는 당신도 당당하게 살라고 맞받아쳤다. 일상에서 비슷한 일화는 수두룩하다. 나는 특강을 간 자리에서 행복하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어쨌거나 행복하기에 행복하다고 답할 때가 있다. 청중은 감동하고 때때로 박수를 친다. 젠장. 당당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말, 행복하냐는 질문 모두 칭찬이 아니다.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존재/범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범주의 범위/한계를 확인하는 언설이자 트랜스젠더는 당당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다는 지배 규범을 환기하는 언설이다. 트랜스젠더의 고통과 불행은 이 사회가 트랜스젠더에게 요구하는 규범적 삶의 양식이자 미디어와 ‘대중’에게 통용되는 유일한 상상력이다. 트랜스젠더가 다양한 어려움과 고통을 겪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고통과 불행이 트랜스젠더의 유일한 경험으로 강요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당당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말, 행복하냐는 질문은 모두 존재의 사회적 가치를 평가하는 언설이며, 감정의 조건과 삶의 조건을 심문하는 언설이다.
이옥섭 감독의 다큐멘터리 <라즈 온 에어>(2012)는 볼 때마다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처음엔 정말 멋진 존재를 알아 기뻤다. 두 번째 봤을 땐 어떤 슬픔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살며 겪는 어떤 슬픔이나 외로움과의 공명이기도 하다. 몇 번 반복해서 보며 이 작품에 흐르는 정서가 경쾌함과 슬픔, 외로움의 동시적 공존이라고 느꼈다. 즉 <라즈 온 에어>는 트랜스젠더 라즈의 감정과 정동을 다룬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가 연예인이나 성판매 업소가 아닌 직업군에서도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특강 후기를 받은 적 있다. 라즈와 라즈의 부모님 역시 이런 상상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네가 갈 데는 그런 데[트랜스젠더 업소] 밖에 없다”는 부모의 말은 이 사회가 공유하는 트랜스젠더의 이미지를 반영한다. 업소에서 일하는 것도 하나의 직업 선택이다. 하지만 업소 선택이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면 분명 문제가 있다. 우리/트랜스젠더에게 다른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미래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는가는 현재의 삶이 어떤 조건과 상황에 위치하는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징표다. 트랜스젠더가 갈 곳이 제한된 것이 아니라 트랜스젠더를 제한된 곳에 가두려는 것이 이 사회의 규범이자 상상력이다. 다른 말로 이 사회는 트랜스젠더를 사유하기보다 소비하기만을 원한다. 사유해야 할 수많은 트랜스젠더 이슈가 소비된다. 이런 한계가 우리/트랜스젠더의 삶을 외롭고 또 슬프게 만든다. 이토록 빈약하고 빈곤한 상상력이 트랜스젠더의 삶을 어렵게 만든다. 다른 말로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사유하지 않는 이 사회가 문제다. 주제넘은 말이지만, 나는 라즈가 아프리카 TV건 다른 방송이건 방송 진행자로 성공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트랜스젠더가 우리 자신의 삶을 상상할 수 있길 바란다. 이것은 타인이 우리/트랜스젠더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는 경고다.

트랜스젠더 인식론을 향하여: 메모

알다시피 그리고 이미 알고 있듯, 기존의 설명 체계와 사유 체계는 트랜스젠더를 배제하거나 사유하지 않으면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를 얘기한다면 후반부에 덧붙이는 식의 첨언이거나 트랜스젠더는 좀 다르게 경험한다는 식으로 부연할 뿐이다. 이것은 모두 기존의 지식 체계, 설명 방식 자체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으면서 트랜스젠더를 예외지만 추가로 알아야 할 항목 정도로 여김과 같다. 트랜스젠더 인식론은 기조의 지식 체계, 설명 체계 자체를 재구성하려는 작업이다. 그리하여 개개인 수준에선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트랜스젠더를 인식틀로, 세계를 이해하는 기본 토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기본이어야 한다. 비트랜스젠더 중심의 설명 방식은 문제 삼지 않으면서, 트랜스젠더를 중심축으로 삼는 걸 문제 삼는다면 이런 문제제기 자체를 다시 문제 삼아야 한다.
다른 한편, 트랜스젠더 인식론은 트랜스젠더의 경험, 트랜스젠더에 대한 경험을 쓰는 작업에도 중요하다. 나는 트랜스젠더의 경험과 관련한 문헌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생산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때 중요한 건 트랜스젠더 경험 관련 글을 어떤 관점에서 설명하느냐가 쟁점이다. “트랜스젠더, 저 변태”라고 설명할 것이냐, “저 힘들고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설명할 것이냐, “이원 젠더 구조에서 삶이 어떻게 조직되느냐” “비트랜스젠더의 삶은 트랜스젠더의 삶을 기반으로 어떻게 구성되느냐”로 설명할 것이냐는 완전히 다르다. 나는 가장 마지막 두 가지 방식이어야 한다고 믿으며, 이를 위해 트랜스젠더는 인식론의 토대여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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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트랜스젠더 인식론과 관련한 글에 모 님께서 문의 메일을 주셨고 답장을 썼는데, 그 답장을 각색한 글입니다.